34화
“마지막 에반이 남았는데, 남은 사람이 시우밖에 없네요. 그럼 자연스럽게 시우! 그런데 이건 진짜 너무 대놓고 티를 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맞아요. SNS에 시우 형 사진으로 도배하고. 나랑 찍은 셀카는 올려 주지도 않고!”
현수의 깔끔한 진행에 안이 꿍얼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시우가 이런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처음이라 에반이가 엄청 챙겼죠.”
다들 한마디씩 거들자 시우의 귀가 빨개졌다. 왜 한 번도 자신이 그의 마니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역시 3초맨은 연기도 뛰어났고, 자신은 결국 착각의 늪에 빠진 것이었다.
“맨날 시우만 챙기고! 여러분도 방송 보면 에반이 얼마나 시우가 마니또라는 걸 티 냈는지 아실 겁니다.”
“그래서 에반 씨는 시우 씨를 위해 무얼 준비했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는 멤버들을 무시하고 현수는 에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바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이걸 시우에게 주겠습니다.”
시우는 멀리 앉아 있던 에반이 일어나 자신에게 건네는 걸 받으면서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껏 매일 들고 다니던 카메라였다.
“에?”
“카메라?”
늘 능수능란하게 진행을 하던 현수조차 마땅한 말을 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에반의 이름이 각인된 카메라 보디에 고가의 렌즈까지 고스란히 시우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수억대의 물건을 갑자기 받게 된 시우는 혹시나 이걸 놓칠까 두 손으로 카메라를 꼭 잡았다.
“잠깐만요. 그 카메라가 그냥 평범한 카메라가 아닌 것으로 아는데. 에반 씨, 진심으로 이걸 시우 씨에게 준다는 겁니까?”
“네. 좀 늦게 줘도 되는 것이면, 이번 촬영 동안 찍은 사진으로 미니 앨범 같은 걸 만들어 주고 싶은데. 그걸 지금 준비할 수 없으니 일단 카메라를 드리려고요.”
“야! 그러면 루이한테 저 가방 사 준 내가 뭐가 되냐고.”
현수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고, 루카는 왜 내가 에반의 마니또가 아니냐고 한탄을 뱉었다.
“이게 어. 그러니까 제가 못 받겠는데.”
어정쩡하게 카메라를 들고 있던 시우는 에반에게 다시 넘겨주려 했지만, 그는 손사래 치면서 원래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시우는 카메라를 안듯이 들고 뒤쪽으로 돌아가 에반의 곁으로 갔다.
“이거 나 못 받아. 들고 있기도 부담스럽다.”
에반의 옆에서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던 시우는 손목을 잡아끄는 손길에 일단 그의 옆에 앉았다.
“빨리 가져가.”
옆에서 웃고 떠들고 진행을 하든 어쩌든 시우는 이 부담스러운 카메라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시 한번 그에게 속삭였다.
“왜?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잖아.”
“이걸 어떻게 받아?”
“왜 못 받아?”
시우는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에반을 바라보다 살짝 표정을 굳혔다. 세상 보기 힘든 착한 사람일세. 이게 얼마짜리인데.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에반. 이렇게 고가의 물건, 더군다나 네가 아끼는 그런 건 아무한테나 막 주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야.”
시우는 검지를 에반의 눈앞에 들고는 살짝 흔들며 말했다.
“네가 남이야?”
“후우. 그럼 안의 사진만 인화해 주면 되잖아.”
“지금 보여 주고 싶어서.”
“알겠어. 그럼 사진만 볼게.”
한 발도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에반의 단호한 대답에 시우는 먼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에반이 이내 시우의 손 위로 손을 겹치고 카메라를 조작했다.
“어? 이거 언제 찍었어?”
제일 먼저 보인 자신의 사진에 시우는 고개를 돌려 에반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거기 두 분 그사세 만들지 말고 진행 좀 들으시라고요.”
촬영 중인 것을 잊고 에반과 대화를 하던 시우의 고개가 파드득 들렸다. 정말 모든 것 잊고 있었기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카메라를 보는 시우와 다르게 에반은 무표정하게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일단 물건에 대해서는 촬영 끝나고 알아서 처리하시고,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
현수 형, 뭐라고 하셨나요? 철없이 고가의 물건을 덜컥 자신에게 준 에반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던 시우의 입에서 멍한 대답이 나갔다.
“단체 사진 찍고 오늘 촬영 끝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좀 들으세요, 좀!”
단체 사진을 찍자마자 동시에 일곱 명의 SNS에 똑같은 사진이 업데이트되었다.
아직 공식적인 뉴스는 뜨지 않았지만, 팬들 사이에선 이들 일곱 명이 멤버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Journey’라는 멘트가 똑같이 달렸다.
“시우 형, 진짜 내 마니또였어요?”
기념 촬영이 끝나고 단체 SNS에 업데이트 후 기린 인형을 거꾸로 들고 휘휘 돌리며 다가오는 예찬의 말에 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 웃으면서 붙임성 좋게 돌아다니는 예찬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말이 마니또였지 다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하필 예찬이 놀이공원에서 페로몬 장난을 쳤을 때, 옆에서 안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니또. 루카 형이잖아. 지금 같이 있어.’
마니또라기보다 천성이 모질지 못했기에 대충 대답을 받고 끝낸 일이다. 그 외에 예찬을 위해 딱히 도와준 일이 없었지만, 다른 멤버들의 말에 얼렁뚱땅 그가 마니또로서 열심히 한 것처럼 넘어갔다.
“진짜 몰랐어. 형. 그럼 그래서 페로몬 그거 그냥 넘어간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날 이후 안 했잖아.”
“당연하죠. 에반 형한테 진짜 맞아 죽을 뻔했는데. 그리고 에반 형도 더는 안 그러고.”
예찬은 시우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 번씩 시선을 돌려 피디와 이야기 중인 에반을 확인했다.
“그래? 에반이도 안 하는 거 확실하지?”
시우는 소매를 코끝에 대고 킁킁거렸다. 자신은 절대 맡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페로몬 이야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맡게 됐다.
“네. 전혀. 여기 있는 알파, 오메가 전부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김시우. 이리 와 봐.”
예찬과 이야기하던 시우는 피디의 부름에 그쪽으로 향했다.
“방금 에반과 이야기 끝냈는데, 둘은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서 입국해. 지금부터 연예 뉴스에 홍보 시작할 거고 분명 내일 공항에 사람 많이 몰릴 거니까.”
“지금요? 저희 둘만요?”
“다 같이 입국하는 줄 알지, 너희 둘만 먼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다 같이 가는 게.”
“코코. 내일 공항에서 압사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게 좋을 거야.”
피디에 이어 에반까지 그리 말하자 시우는 살짝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시우였다. 친한 지인들에게 연락이 오고, SNS 엄청난 댓글을 보면서도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거기다 워낙 서치나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에 굳이 찾아보지도 않았다. 갑자기 인싸가 되어 버렸다지만, 외국에서 이렇게 한가하게 촬영 중이니 지금까지 시우의 삶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방금 거리에서 버스킹 할 때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에반은 등장과 동시에 주위를 술렁이게 했다. 그러니 이 상황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에반을 위한 일 같았다. 그렇다면 혼자 가면 되지 왜 굳이 날 같이?
“지금 바로 준비하고 출발해. 티켓은 변경해 뒀으니까 바로 출국 절차 밟고. 카메라 감독이나 작가도 안 붙을 거야. 셀프 캠 줄 테니까 둘이 적당히 좀 찍고.”
피디와 메인 작가에게 등 떠밀린 시우는 그길로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야 했다. 이 모든 정보를 들은 것인지 기획사 대표 태훈의 문자까지 와 있었다.
도착 시각에 맞춰서 밴을 보내겠다고? 우리 회사에 무슨 밴이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제 SUV 몰고 다녔는데, 그거 인천공항 주차장에 세워 놨거든요! 무려 8박 10일이라는 기간의 장기 주차라 주차 비용도 엄청 내야 해요.
* * *
“너 그러고 내리려고?”
카메라 감독님도 동행하지 않기에 시우는 최대한 편안한 복장을 선택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후드 티셔츠를 입고, 에반과 같이 산 노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왜?”
공항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려던 시우는 자신을 잡는 에반의 행동에 자신의 복장을 다시 보았다.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모자는? 마스크는?”
“그런 게 왜 필요해?”
그런 거 없이 강남 한복판을 걸어 다녀도 아무 일이 없던 시우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늦은 시각. 아마도 지금 그들이 타는 비행기가 오늘 뜨는 마지막 비행기일 것이 분명했다.
“김시우. 네가 아직 자각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누렸던 자유는 없을 거야.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후드 모자가 씌워지고, 에반이 건네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차에서 내릴 때까지도 시우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일정이 조금 바뀌어서 지금 저와 시우는 공항입니다. 밤 비행기를 탈 거예요.”
탑승 시간이 촉박했기에 에반은 셀프 캠을 들고 빠르게 걸으면서 짧은 녹화를 시작했다. 캠에 자신도 나오기에 시우는 손을 들어 손끝만 살짝 흔들며 인사를 했다.
“공항에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고 좋긴 하네요.”
“이 시간에 공항에 올 일이 잘 없긴 하죠.”
“누군가랑 이렇게 공항에 있는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시우의 솔직한 말에 에반이 네? 라고 반문했다.
“혼자 여행 다니는 게 익숙해서. 미성년자일 때는 가족과 다니긴 했는데, 성인 되고는 쭉 혼자 다녔어요.”
그게 뭐 큰일이라고, 시우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머니에 넣었던 티켓을 꺼내 게이트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오른쪽이라고 말하며 먼저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같이 해.”
“응? 빨리 와. 우리 시간 없어.”
바로 옆에 있던 에반이 없자 시우는 뒤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멈추는 거야. 어제도 갑자기 멈추더니.
“뭐든 다 같이 해.”
“알겠어. 같이 할 테니까 서둘러 주세요. 에반 님.”
시우는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대답하고는 앞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