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같이 부르자고?”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타를 안고 있는 자신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여분의 의자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에반은 자신의 옆 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역시 방송을 많이 해 본 사람은 달랐다. 앞을 보고 나란히 앉은 것이 아닌 조금 떨어져 앉은 그는 아래에서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준비된 것인지 에반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 시작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에반은 시우가 부르는 걸 잠시 듣고 있었다. 에반이 부르지 않기에 시우는 곁눈질로 그를 보았다. 혹시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제멋대로 그를 불러내고 노래를 시켰던 것이다.
지금 이 일에 그의 의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시우는 음을 놓치고 말았다. 시우가 놓쳐 버린 그 부분에 자연스럽게 에반의 목소리가 녹아들었다.
그의 노래에 화음을 넣으며 시우는 슬쩍 고개를 숙여 에반을 내려다보았다.
하, 진짜. 사람 착각하게 만드는 걸 즐기는 3초맨은 지금도 그 매력을 발산 중이었다.
앞을 보고 앉은 게 아닌 아예 자신을 향해 몸을 틀고 앉아서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그의 엄청난 매력 발산에 시우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처음 두 곡을 부를 때와 달리 사람들은 모두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 중이다. 언제 또 이런 호응을 받아 볼까.
이제 자신이 예약한 무대가 곧 끝날 것이다. 시우는 잠시 노래를 멈춘 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자신이 부르지 않아도 에반이 곡을 끌고 가기에 걱정은 없었다.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왜 다 끝이라고 여겨지는 것인지.
이 모든 게 특수한 상황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감정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회귀가 반복되면서 점차 무뎌졌다. 지정된 날짜에 회귀하지 못해서 생긴 부작용.
시우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모든 공간이 에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지금 입을 열어 소리를 내면 목소리가 떨릴 것이 분명했다. 울음이 섞여 들 것 같아서 결국 마지막 곡은 에반의 곡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박수에 시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일어났다. 에반과 나란히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올 때까지 시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자유 시간은 9시까지. 모두 9시에 모여 남은 밤을 함께 보내는 스케줄이 있었다.
“미안.”
조용한 밤거리를 걸으며 복잡한 감정을 정리한 시우는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뭐가 미안해? 난 좋았는데?”
갑자기 불러내서 버스킹 하자고 한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하려던 시우의 말문이 막혔다.
“고마워.”
에반의 말에 사과의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뭐가 고마워. 난 영광이었는데. 내 최애님과 같이 노래 부를 수 있어서.”
“아, 진짜! 에반, 그만하라고. 네가 하는 말 계속 들으면 네가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맞아. 나 너 좋아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대답하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알겠어. 나도 너 좋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어찌 모진 말을 하고 화를 낼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온몸으로 깨닫는 중이다.
“코코. 왜 웃어? 나 너 좋아한다니까.”
“알겠어. 나도 너 좋아해.”
정색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에반과 다르게 시우는 계속 웃고 있었다.
“코코. 장난 아니고 진심으로 내가 널 좋아한다고.”
나란히 걷던 에반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하자, 몇 발자국 더 앞으로 간 시우의 발걸음도 멈췄다. 그리고 시우는 뒤돌아보았다.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그를 보자 또 웃음이 터져 나와 웃음을 참으려 손을 올리고 입가를 가렸다.
오르막길이었기에 조금 더 위에 서 있는 시우는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반의 잘생긴 얼굴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필 또 서 있는 곳이 조명 아래냐.
“이번 프로그램에서 널 만난 거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 적응 못 할까 봐 많이 도와줘서 진심으로 감사해. 에반, 사랑해.”
진심을 담아 말하고 시우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만들었다. 이제 숙소로 들어가면 이런 솔직한 말을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엔 눈뜨자마자 준비해서 공항으로 가야 했다. 장거리 비행을 거치고 나면 남은 건 익숙한 이별이다.
“미치겠다.”
에반은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려 버렸다. 애교 없기로 유명한 코코였다.
그런데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곱게 웃고 머리 위로 하트까지 그리면서 ‘사랑해’라는 단어까지 덧붙이는 건 반칙이다.
매일매일 자신의 한계를 넘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제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한 사랑해, 라는 단어의 뜻이 자신이 원하는 그런 뜻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팔만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아, 사람 무안하게. ‘사랑해’는 아니라는 거지. 알겠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던 팔을 슬며시 내리고 시우는 좋아해, 라는 단어를 랩 하듯이 빠르게 읊었다. 아무래도 에반은 사랑해보다 좋아해, 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그만.”
가슴 앞으로 손 하트까지 그리고 열심히 좋아해, 라고 말하던 시우는 에반의 낮은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반이 큰 손으로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가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갔다.
“늦었다. 가자.”
에반은 시우의 옆을 지나쳐 앞서 걸었다. 그렇게 앞서 걷는 에반은 뒤따르는 시우의 입술이 삐죽거리는 건 미처 보지 못했다. 시우를 잠시나마 눈앞에서 보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음을, 손을 멈출 수 있으니까.
앞서가는 에반이 더는 말을 걸지 않았기에 시우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고, 어느새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 * *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제작진이 내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촬영 준비에 들어간 시우는 인형부터 챙겼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만지고 내려가기 전 시우는 자신의 방에 있는 캠 앞에 섰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에요. 내일이 있긴 한데, 비행시간이 촉박해서 아마 뭘 하기보다 일어나는 대로 준비하고 공항으로 가야 해서 공식적 마지막 촬영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실은 프로그램 시작할 때 마니또가 있었거든요. 지금까지 쭉 보셨으면 아실지 모르겠는데, 제 마니또는 모르실 것 같아요. 제가 잘 못 챙겨 줘서.”
품에 안은 기린 인형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끝낸 시우는 기린의 앞발을 들어 인사를 하듯 흔들고 방을 나섰다.
“형! 형이 왜 기린 인형을 들고 나와요?”
거실에서 촬영 준비 중이던 예찬이 시우의 기린을 보자마자 과장되게 반응하여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마니또에게 줄 내 마음.”
“설마 그 마니또 나 아니죠?”
정색하며 물러서는 예찬의 팔뚝을 장난스럽게 치고 시우는 소파 끝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사운드가 어지럽게 맞물렸다.
“오! 시우 형의 기린 인형을 누가 받을 것인가? 진짜 예찬이면 대박 재밌겠다.”
다들 시우가 품에 안고 있는 인형을 보고 한마디씩 던졌다.
“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죠? 오늘이 저희가 함께하는 마지막 밤입니다. 다들 자유 시간에 뭐 하셨습니까?”
“안이랑 쇼핑했어요. 이거 진짜 예쁘죠.”
루이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부터 자랑했다.
“저희는 마을 축제 가서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 하고 왔습니다.”
“다들 동시에 말하지 마시고, 궁금하신 분들은 방송 보셨으면 아실 겁니다. 저희가 이렇게 다 모인 이유는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다들 지령을 받았어요. 뭐 좀 촌스럽고 유치할 순 있는데, 다들 마니또 정하셨죠?”
“예이! 소리 질러!”
“자자!! 저부터 저부터 하겠습니다. 제 마니또는 누군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현수의 말에 다들 루이를 쳐다보았다. 루이가 물건 잃어버릴 때마다 그걸 찾아 준 것이 현수였으니, 나중엔 이동 시마다 루이의 짐을 다 챙긴 그였다.
“형. 나야?”
루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루이를 위해서! 이걸 샀습니다.”
시우는 기린을 품에 꼭 안은 채 현수를 바라보다 그의 손에 들린 어린이용 하늘색 손가방을 보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깜찍하고 우리 루이에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일부러 머리카락 색에 맞춰서 하늘색으로 구했습니다. 제발 지갑이나 휴대전화 좀 잘 챙겨요.”
“크크크큽.”
소파에 앉아 있다가 바닥까지 내려와 웃는 루카의 앞에서 루이는 직접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는 런웨이를 걷듯 유유히 그들의 앞을 걸어 다녔다.
다들 분주히 마니또를 공개하고 시우의 차례가 되자, 시우는 새초롬하게 웃으며 기린 인형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기린 인형은 예찬이 겁니다. 혹시 아니라고 해도 그냥 예찬이 겁니다.”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우가 들고 있는 기린 인형을 낚아채 예찬에게 툭 던졌다.
“악! 형, 아니라고 해 줘요. 기린은 아니야. 아니라고요.”
기린 인형을 받은 예찬이 무슨 뜨거운 감자를 받은 것처럼 기린을 위로 휙휙 던졌다 받았다.
“예찬아. 내 마음이야.”
“헙.”
시우는 엄지와 검지로 손 하트를 보냈다.
“진짜 저예요? 우와, 나 진짜 몰랐는데. 혹시 아셨던 분?”
“모르긴 뭘 몰라. 네가 친 그 장난 그렇게 넘어가 준 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정말 시우의 마니또가 자신인 줄 몰랐던 예찬이 어리둥절해하자 루카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다들 시우가 그렇게 쉽게 넘어간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둘의 일이라 관여하지 않았다.
“아, 그러네.”
당황하던 예찬은 너무나도 쉽게 수긍해 버렸다. 그 대가로 그날 저녁, 맥주를 핑계로 에반에게 맞은 것까지 차마 말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