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안 들어가?”
시우는 뒷정리가 끝난 마당을 둘러보다 여전히 맥주캔을 들고 있는 에반에게 말을 걸었다.
“좀 더 마시고.”
더 마신다는 말에 시우는 맥주캔 하나를 들고 그의 옆에 앉았다. 에반의 손이 다가와 맥주캔을 따고는 다시 멀어졌다. 시우는 피식 웃어 버렸다. 진짜 훅 치고 들어오는 것엔 프로네.
“아! 진짜 이 3초맨 문제네.”
시우는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에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조금 낀 하늘은 며칠 전 그날 밤과 다르지 않았다. 다들 아직 잠들지 않은 시각이라 정원 곳곳을 밝힌 은은한 조명이 아름다웠다.
“갑자기 무슨 3초맨이야.”
시우의 웃음에 전염됐는지 에반 역시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거. 그런 것도 연습하나 싶고 네 팬들을 좋겠다, 이런 생각도 드네.”
“나 코코 팬인데. 팬 서비스 안 해 줘?”
“네가 해 줘.”
차가운 바람이 불자 시우는 살짝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뭐래. 너 내 팬 아니잖아.”
퉁명스럽게 말하는 내용과 다르게 시우의 어깨 위로 에반의 재킷이 걸쳐졌다.
“미치겠다, 에반. 이게 팬 서비스라고. 이런 거! 이런 거에 다 반하잖아. 아주 몸에 뱄어. 사람 꼬시는 게.”
시우는 푸스스 웃으면서 그가 벗어 준 옷을 마다하지 않고 조금 더 당겨 여몄다. 괜찮으니까 벗어 줬겠지. 그를 배려하는 생각까지 하기엔 적당히 올라온 술기운이 시우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했어?”
맥주를 마시면서 하는 말이라 에반의 발음이 뭉개졌다.
“반하긴 뭘 반해.”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맥주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잘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가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누구나 홀릴 테니까.
남자, 여자, 베타, 오메가, 알파 이런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착각하게 만들기 쉬운 그 눈빛이나 목소리는 모두에게 똑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이건 자신의 감정이 문제가 아닌 에반이 잘나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했다.
“팬 서비스 그런 거 아니야.”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바람이 한 줄기 불면서 시우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에반은 자신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지 않고 앞을 보는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자 짜증이 났는지 슬쩍 눈가가 찌푸려지고 작은 손이 움직이더니 후드를 뒤집어썼다. 덕분에 그의 옆모습을 가려 버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여운 코끝이 전부였다.
“어떡하면 믿을래?”
“뭘?”
어느새 반 넘게 먹어 버렸기에 시우는 고개를 조금 젖히고 남은 맥주를 마셨다. 슬슬 추워지는 것이 계속 에반의 옷을 빌려 입고 있기도 미안해서 얼른 마시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혹시 네 진심을 담은 말이라든가 비밀 같은 거? 그런 거야?”
조금 전부터 미적거리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는 먼저 말을 꺼냈다. 술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시우는 술에 취하면 늘 말하고 싶었다. 조금 전 모두가 보고 놀랐던 안무 습득이 빠른 이유 같은 것들.
이제는 몇 번 회귀했는지 세지 않았다. 이렇게 술을 마시는 중간에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불안했다. 이렇게 우정을 쌓은 사람들이 한순간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남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감정도, 옆에 있는 에반도 시우에겐 헛것과 다름없었다.
돌아가는 순간 모두 없던 일이 되니까.
실체는 있지만 없는 것. 모두 자신의 가슴에 묻고 자신만 아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도.”
돌아오는 에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시우의 귓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그럼 하지 마. 하면 후회할 거야. 먼저 들어갈게.”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덮고 있던 재킷을 벗어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실내로 들어갔다.
타인의 감정. 무엇보다 자신을 홀려 버린 한 남자의 감정까지 품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홀로 남겨진 에반의 손에서 빈 맥주캔이 힘없이 구겨졌다.
시우가 벗어 놓은 재킷을 가져와 다시 입었다. 짧은 시간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재킷에 시우의 향이 배어 있었다.
* * *
시우는 기타를 품에 안고 줄을 가볍게 튕겨 보았다. 꼭 한번 해 보고 싶던 일을 여기서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준비됐어?”
“아뇨.”
헤헷,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8박 10일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 오전까지도 다 같이 하는 스케줄이었지만, 오후는 개인 시간이었다.
모두 자신에게 맞는 휴식을 선택했다.
현수는 혼자 숙소에서 음악 작업을 하며 쉬는 것을 선택했다.
안과 루이는 쇼핑과 맛집 투어를 떠났다. 루카와 예찬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마을 축제를 구경하러 갔다.
에반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언덕으로 출사 간다고 했다.
그리고 시우는 마을 광장에 있었다.
“준비가 안 되면 어떡해. 앞 팀 이번 곡과 다음 꼭 끝나면 네 차례야.”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버스킹 좀 해 볼 걸 그랬어요.”
“부담 갖고 말고 평소대로만 하면 되지. 널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니까 부담도 없고.”
작가님의 말에 시우는 파이팅의 의미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선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유럽인들 사이에 그는 그저 그런 평범한 동양인이었다. 늘 버스킹이 이루어지는 곳이었기에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마을 가운데의 작은 분수대 앞. 주위를 둘러싼 카페와 음식점 앞 노상 자리엔 많은 사람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주황빛 은은한 불빛이 가득했다. 화려한 조명도 없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는 같이 나온 막내 카메라 감독님과 작가님이 전부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미 카메라 세팅까지 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카메라 감독님을 보자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실수하면 어떡하죠?”
“실수하는 게 어때서? 음이 조금 틀리거나 가사를 틀린다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앞 팀이 자리를 비켜 주자 시우는 기타를 들고 어색한 발걸음으로 버스킹 장소에 들어갔다.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품에 안았다. 작가님의 말대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은 옆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몇은 포장해 온 음식을 먹고 있었다.
주위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한 커플이 가볍게 입 맞추는 것까지 본 시우는 손끝을 가볍게 튕겼다. 기타를 만지지 않은 지 3년은 된 것 같은데, 역시 몸으로 익힌 것이었기에 원하는 음이 흘러나왔다.
코드를 가볍게 짚어 손을 푼 시우는 앞에 있는 상체를 살짝 숙여 마이크를 조절했다.
“Hello.”
어색함을 없애려 인사를 하자 몇몇이 시우를 바라봐 주었다. 준비된 MR 따위는 없다.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기타와 자신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날리고 옷 끝이 살랑였지만, 시우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시우가 첫 곡으로 선택한 것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잔잔한 팝송이었다. 분수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 사람들의 낮은 이야기 소리 사이로 시우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1절이 끝나 갈 무렵부터 시우의 눈에 주위 상황이 들어왔다.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로 앞에 있는 작가님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달콤한 가사와 함께 시우의 두 눈이 예쁜 반달이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시우에게 닿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꿈일까? 이게 정말 나에게 일어난 일이 맞을까?
가슴이 뛰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행복했다.
한때는 이 모든 것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 느낌 때문에 이 기분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청난 인기를 끄는 그런 톱스타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첫 곡이 끝나고 시우는 배시시 웃으며 박수 치는 사람들을 향해 한 손을 살짝 흔들었다. 옆에 뒀던 물병을 들고 물을 조금 마셨다.
두 번째 곡 1절이 끝나 갈 무렵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들렸다. 조금 달라진 분위기에 시우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지만, 노래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작가님 옆에 앉는 한 남자를 보는 순간 작은 소동의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한 손에 카메라를 든 에반이 바닥에 편하게 앉은 채,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출사에서 돌아가는 길에 들른 모양이다. 시우는 에반에게 윙크를 하며 알은척하고는 다시 편안하게 노래를 이었다.
자신의 윙크를 알아본 에반이 머리를 슬쩍 흔들더니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찍자 시우는 그의 카메라를 보며 남은 노래를 불렀다.
“에반. 이리 와.”
두 번째 곡이 끝나고 시우는 앞에 앉은 에반을 불러냈다.
“나?”
“그래, 너. 빨리 와.”
정말 자신을 부르는 것이 맞냐고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에반을 향해 시우는 손짓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물거품처럼 사라질, 혼자 간직해야 할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에반이 시우의 옆으로 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어디선가 에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소녀들의 꺅꺅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Hi.”
앞으로 나온 에반이 인사를 건네자 작은 환호성이 들렸다.
“역시 글로벌 스타는 다르네. 마지막 곡은 ‘everyday’인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