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에반?”
“네. 빨리 가서 에반 형 불러와요. 참, 가셔서 예찬이한테 즉석밥도 몇 개 데워 오라고 전해 주시고요.”
꼬치를 더 만들려던 시우는 몇 가지를 동시에 부탁하는 안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가며 시우는 소매 끝에 다시 코를 묻었다. 들어오자마자 씻고 나왔기에 보송보송한 냄새가 났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뒷문을 통해 들어가자마자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만난 시우는 얼른 코끝에 대고 있던 손을 내렸다.
“다들 나오래.”
“그래? 맥주 찾았어. 소주는 없던데.”
“여기서 소주까지 먹게? 다들 가볍게 맥주만 마시는 거잖아.”
시우는 맥주캔 묶음을 들고 있는 에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 소맥 좋아한다며. 안 그렇게 생겼어도 은근 주당이잖아.”
이런 대화는 정말 적응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는 순간 훅 치고 들어왔다.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까지 알았다.
“진짜 모르는 게 없네.”
나눠 들어 주려 팔을 뻗었지만, 피식 웃으면서 뒤로 발을 빼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의 손은 허공에 멈추었다.
“추워질 거니까 위에 하나 더 걸치고 나와.”
“에반아.”
시우는 자신을 지나쳐 지나가는 그를 불러 세웠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멈춰 서서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에 시우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어서 말하라는 듯 그는 턱을 슬쩍 들었다 바로 했다.
“그……. 나 냄새나?”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들이 먼저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던 에반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평온하게 바뀌었다. 아이돌 5년 차.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는 그 누구보다 프로였다.
“왜?”
“들어오자마자 씻긴 했는데, 너희들이 말해 주지 않으면 난 계속 모르니까…….”
“괜찮아.”
시우는 질문과 다른 대답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지금 에반의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한테서 어떤 향이 나더라도 상관없다고. 대신 누군가 페로몬을 씌운다면 그건 바로 말해 줄게.”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분명 씻고 나면 페로몬은 지워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한지 알고 싶었다.
갑자기 다가온 에반을 피할 순 없었다. 그의 볼과 자신의 볼이 곧 닿을 것 같았다.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것인지 그에게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코코. 스물세 살 남자가 보디 제품을 베이비 파우더 향 쓰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귓가에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자신에겐 방금 사용한 샤워젤의 냄새가 강했지만, 그에게선 꽤 시원한 향이 풍겼다. 고개를 돌리지도, 몸을 뒤로 빼지도 못한 시우의 귓가에 작은 웃음소리가 머물렀다.
“난 마음에 든다고.”
에반이 뒷문을 통해 나갈 때까지도 시우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오메가라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시원하고 싸하다는 그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을 테고, 어쩌면 방금 그의 행동에 숨겨진 감정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하는 이 모든 행동이 단순한 브로맨스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조금은 감정을 담은 플러팅인지 구분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장난이면 좀 아프겠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우는 차마 밖으로 뱉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굳이 자신의 감정이 흘러가는 걸 막고 지낸 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빗장을 걸었어야 했다.
모든 사람을 3초 만에 홀린다는 유명한 사람의 거미줄에 어느새 시우도 엮였다. 그가 한 줄씩 던진 거미줄이 어느새 시우의 몸에 잔뜩 엉켜 붙었다. 어느 줄부터 가위로 끊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우는 정확히 알았다. 이 거미줄을 끊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줄을 끊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그였다. 그가 더 이상 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그라들다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질 줄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공항에서 헤어지고 나면 에반은 자신에게 줄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엔 연락이 오고 어쩌면 첫 방은 모두 모여서 같이 볼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엔? 접점이 없는 만남은 절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형. 저 좀 지나갈게요.”
시우는 예찬의 목소리에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카메라를 보았다. 이 모든 순간은 또 다 녹화되고 있다.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장면이라 모두 편집되겠지만, 갑자기 불편해졌다.
이 촬영을 허락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다. 예찬이 나가고 나서야 시우는 즉석밥을 떠올렸다. 누구를 불러서 시킬 만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 시우는 즉석밥을 찾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조리가 끝났다는 전자레인지의 완료음이 울리자,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무표정하던 시우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힘들고 아프고 지칠 때 밝고 경쾌한 모습을 보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카메라가 있어도 모두 자유를 즐겼다. 원하는 만큼 맥주를 마셨고, 알아서 걸러서 나갈 걸 알기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반에 피디는 간단한 질문을 던졌고, 모두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촬영진이 빠지고 나서도 술자리는 편하게 이어졌다.
“아, 맞다. 우리 저번에 오션 커버했잖아요. 진짜 오션 춤 개어려워. 형은 그걸 어떻게 다 춰요? 완전 폐 나가겠더만. 거기다 라이브잖아.”
메인 카메라도 꺼지고 다들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휴대전화를 만지던 예찬이 오션의 노래를 크게 틀었다. 그렇게 에반에게 두들겨 맞고 아프다고 징징대던 예찬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자 안과 루이까지 가세했다. 다들 적당히 술이 올라 제대로 춘다기보다 그냥 포인트 안무만 짚으면서 노는 것이다.
“맞아요. 우리는 이거 하다가 결국 중간에 변형 넣었잖아요.”
루이와 안까지 나가자 시우 역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우까지 잔디밭 위를 뛰어다녔다.
오션의 노래에 이어 팬텀, 피닉스, 루미너스의 곡이 연이어 나왔고, 시우는 정확히 포인트 안무를 짚어 냈다.
“대박. 시우 형, 다 알아! 어떻게 다 안대?”
다들 설렁설렁 추다가 앉았다가, 추고 싶으면 나오고 들어가며 분주한 와중에도 어쩌다 보니 시우만 계속 잔디밭에 서 있었다. 적당히 술기운도 오르고 몸을 움직이자 예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좁은 연습실에서 멤버들과 울고 웃으면서 연습하던 그 시절.
“아, 내가 안무를 좀 빨리 외워서.”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끔찍한 일을 당하지도 않고, 평범한 대학생으로 또는 다른 그룹의 멤버로 다들 평범하게 지냈다.
시우가 방송 활동을 많이 하지 않은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예전 멤버를 만나는 걸 꺼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랬더니 실제로 방송에 나갈 기회나 무대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혹시나 그들과 만났다가 그들이 자신의 이상한 삶에 휘둘릴까 무서웠다.
“시우, 이것도 그럼 외울 수 있어? 이거 우리 이번 건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루카가 뛰어나왔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곡을 틀어 놓고 춤을 추는 그를 보는 모두의 눈에서 빛이 났다. 다들 댄스 그룹이니 춤에는 자신 있었다.
“아니. 왜 우리가 이걸 하고 있냐고!”
루카는 시우에게 제안했지만, 움직이기 귀찮다는 에반과 현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루카의 뒤에 서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카의 움직임을 따라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미쳤다. 이걸 어떻게 라이브 하면서 해요. 난 못 해.”
제일 먼저 포기한 건 루이였다.
같은 곡이 몇 번 반복되고, 루카를 따라 움직이다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시우는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진짜 안무 팀 무슨 생각으로 이걸 우리한테 줬는지 모르겠어. 라이브 절대 불가 같지 않아?”
“그런데 노래 진짜 좋다. 우리한테 공개하면 어떡해요.”
다들 멈춰 서서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루카가 반복 설정을 해 놓은 곡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루카 형. 여기서 이거 오른쪽 발,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형이 보여 준 것처럼 하면 어색한데?”
곡이 다시 시작되자 가볍게 움직이던 시우는 루카가 버벅거리던 부분에서 정확히 멈췄다.
“어디?”
“여기. 이렇게 오른쪽으로 턴 하기 전에 형이 이렇게 보여 줬는데, 그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편할 것 같아요.”
시우는 힘을 싣거나 정확하게 동작을 짚어 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몸을 움직이다가 자신이 설명하는 부분에서만 깔끔한 동작을 선보였다.
“헐. 김시우. 너 지금 안무 다 외운 거야?”
쥐포를 뜯으면서 그들을 지켜보던 현수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같이 움직이는 멤버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멀리서 보던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보였다. 네다섯 번 반복되는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시우지만, 지금 그는 곡에 맞춰 정확히 안무를 소화했다.
“그게…… 다 외운 건 아니고. 여긴 포인트 부분이니까.”
갑자기 자신에게 모든 시선이 쏠리자, 시우는 손끝으로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이들에겐 엄청난 능력으로 보일지 몰라도 시우에겐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10년 정도 발레를 한 것을 떠나서 계속 반복된 생활에서 춤을 얼마나 췄는데, 반지하 연습실에 처박혀 있었던 시간에 빗댄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시우 형이 인기가 없는 건 아마도 본인의 의지로 강력하게 방송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안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만 그건 정말 정확한 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