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예찬이 머리…….”
사파리 투어 차에서 내린 모두의 시선은 예찬의 머리로 향했다. 사육사 성격인지, 다른 팀은 미리 기린에 대해 말하고 주의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랬으니 다들 단단히 대비해 살아남았지만, 조금의 조언도 듣지 못한 예찬만 엉망진창이었다.
“여러분, 기린이, 흑…… 기린이 내 머리, 이래 놨어요.”
카메라 앞으로 다가간 예찬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과장되게 징징거렸다.
“우리 근육 돼지. 형이 가서 기린 혼내 줄까?”
차마 다들 예찬의 머리를 만지지는 못하는 가운데 루카가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슬쩍 그의 머리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지금부터 자유 시간이니까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멤버들이 흩어지자 머쓱해진 시우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어. 저는 그러니까 뭘 할까요? 일단 군것질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걸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시우는 한 손에는 레모네이드와 다른 손엔 프레첼을 들고 느릿하게 주위를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 회전목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일정한 리듬으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말들과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가 부드러운 음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과 주위를 둘러싸고 선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부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 손으로 안전바를 잡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가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회전목마. 누구나 어린 시절 놀이공원을 떠올린다면 빠질 수 없는 장면. 어른이 되어서도 한 번쯤 발길이 머물게 되는 곳이었다.
“재밌겠는데, 회전목마를 타기엔 제가 나이가 많은 것 같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우는 그 앞에 멈춰 있었다. 프레첼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는 오물거리면서 먹다가 목이 메면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다른 곳으로 가 볼게요.”
한참을 서 있던 시우는 느리게 발걸음을 돌렸다. 솔직히 타고 싶었다. 그냥 어릴 적 추억 같은 것이다. 말을 혼자 타는 게 무서워서 호박 마차를 탔다. 누나가 겁쟁이라고 놀렸는데.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타지 못했다. 똑같은 자리를 맴도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돌고 돌고 아무리 돌아도 같은 자리.
“어! 저 이거 잘해요.”
돌아다니던 시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다트를 던져서 풍선 터트리기 게임을 하는 곳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풍선을 터트린 만큼 점수를 계산해서 상품을 선택하는 단순한 게임이다. 1등의 선물이 커다란 기린 인형인 걸 보자 욕심이 났다.
“제가 꼭 1등 해서 저 기린 인형을 타겠습니다. 그리고 예찬이에게 선물로 줘야겠어요. 예찬이가 오늘 기린과 엄청난 추억을 쌓았잖아요.”
소심한 복수였다. 오늘 자신을 난감하게 만든 페로몬 사건에 관한 복수. 지프에서 내린 예찬은 기린이 싫다고 울부짖었다. 두 번 다시 기린은 보러 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떠올리는 시우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아마 엄청나게 좋아할 거예요. 아시죠?”
윙크까지 한 시우는 게임비를 지급하고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다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 진짜 너무한다. 솔직히 이해는 하지만 다트 끝이 너무 뭉툭한 것 같아요. 풍선이 잘 터지지 않도록 유도한 것이겠지만, 저랑은 상관없는 이야기겠죠?”
손끝에 톡톡 두드려 봤지만 뭉툭한 끝은 큰 타격감을 주지 못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시우는 정말 무심하게 다트를 훅 던졌다.
팡―.
시원한 소리와 함께 풍선이 터졌다.
“오~ 생각보다 괜찮으니 이번엔 다다다닥 빨리해 볼게요.”
카메라를 향해 V를 그린 시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집중한 듯 눈빛이 바뀌고 도톰한 입술이 앞으로 쏘옥 나왔다.
왼손에 다트 다섯 개를 든 시우는 카메라를 한번 보고는 순식간에 다섯 개를 연이어 던졌다. 그리고 경쾌한 파열음이 이어졌다.
“헐.”
웬만해서 자신이 있음을 알리지 않는 카메라 감독님이시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입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감탄사가 터졌다.
“저 잘하죠.”
언제 부리를 내밀고 집중의 눈빛을 했냐는 듯 시우는 봄바람에 날리는 벚꽃잎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남은 네 개도 슈슈슝.”
정말 짧은 시간에 집중한 시우는 남은 풍선까지 완벽하게 전부 터트렸다. 카메라 감독님과 함께 예쁘장한 아이가 다트 게임을 하는 건 주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충분했다. 던지는 족족 맞혀 열 개 올킬에 성공하자 주위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엄마야.”
다트 게임에 집중한지라 사람이 모이는 걸 몰랐던 시우는 박수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놀란 것도 잠시 다트 게임을 하기 위해 머리 위에 걸쳐 놨던 선글라스를 얼른 내려 썼다.
“기린 주세요.”
스무 개를 올킬했을 경우, 커다란 기린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부담스러운 시우는 작은 기린을 안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저 진짜 잘했죠? 더 할 수 있는데 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분들 못 하시니까. 이제 예찬이 찾으러 가 볼까요? 선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궁금하네요.”
이제 카메라를 향해 혼잣말하는 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같이 하다 보니 익숙했다.
“예찬이에게 전화를 해 볼까요? 아마 놀이기구 타고 있을 것 같아요. 아! 맞다. 잠시만요.”
걸어가며 휴대전화를 꺼낸 시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계속 쓰고 있는 호랑이 머리띠를 바로 착용하고 기린 인형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저 괜찮죠? 뒤에 다트 풍선 게임장도 잘 나와요?”
오늘 숙제를 위한 셀카를 찍을 생각이었다.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기에 자연 햇살이 조명 효과를 내고 있었다. 괜찮냐는 시우의 질문에 카메라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몇 번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셀카를 찍은 시우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 손가락을 더 꼬물거렸다. SNS에 글을 올렸다.
[사진]
다트 풍선 터트리기 올킬 성공!
원래 성격이라면 이모티콘만 올렸겠지만, 성실하게 멘트도 달라고 했기에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예찬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전화를 거는 시우의 입에서 작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예찬이 컬러링. 피닉스 이번 곡이네요. 진짜 좋아요.”
컬러링을 따라 부르던 시우가 자리에 멈춰서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지금 함께하는 멤버가 속한 그룹의 대표곡과 춤은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일부러 외우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때그때 유명한 곡들은 챙겨 보았고, 자신의 댄스곡이 없었기에 심심할 때면 따라 췄다.
놀이기구를 타는 중인지 계속해서 컬러링이 흘러나오자 제대로 추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움직이면서 포인트 안무만 정확히 짚어 냈다.
“그리고 여기서 턴! 짜잔. 아, 놀이기구 타나? 전화 안 받아요. 한 번만 더 걸어 볼게요.”
컬러링이 끝나는 부분까지 추고 안내 음성으로 넘어가자 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컬러링이 들리자 계속해서 포인트 안무에 맞춰 춤을 추었다.
“시우!”
두 번이나 통화가 되지 않자 다른 멤버에게 전화해서 그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던 시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루카와 현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진][사진][사진]
즐거운 나날, 내 눈에는 모든 게 사랑스럽게 보인다.
에반은 SNS에 업데이트하고 자신이 올린 사진을 천천히 넘겨 보았다. 자유 시간이 되자 일부러 시우를 피했다. 사진 찍는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수많은 취미를 거쳐 몇 안 되는 길게 이어지는 취미였다. 놀이공원은 넓었고 각기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흩어졌기에 시우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 넓은 곳에서 다시 마주친다면 그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던 에반은 천천히 카메라를 내렸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 회전목마 앞이었다. 자신의 얼굴보다 큰 프레첼을 야무지게 먹는 모습에 그의 입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계속 이렇게 보고 있다가는 시우를 따라다닐 것만 같아 애써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다트 풍선 게임 앞에 서 있는 시우를 보았을 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그를 피했지만, 또 만났다. 차라리 다른 멤버를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게임에 집중한 그는 주위에 누가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이런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잠시 내렸던 카메라를 천천히 올렸다. 작은 프레임 안에서 시우는 행복했다.
혹여나 그가 자신을 볼까 봐 에반은 잠시 몸을 물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역광으로 시우의 모습이 옅게 잡히자 다시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찍던 에반은 시우의 게임이 끝나자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올망졸망하게 말하는 것이, 어디론가 향하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 모든 모습이 에반을 잡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려 보았다. 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부풀었던 가슴이 순식간에 바닥에 흉하게 나뒹굴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나풀거리는 그 모습에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프레임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그 모습을 담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시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또 전화를 걸었다. 단번에 받지 않는 그 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걸자 에반은 다시 그를 촬영했다.
에반의 카메라 감독님은 에반을 촬영했고, 에반은 시우를 카메라에 담았다.
SNS에 올린 건 겨우 세 장의 사진이었다.
행복한 모습이 가득한 회전목마 사진의 왼쪽 끝 건너편에 시우가 있었다.
다음으로 넓은 놀이공원의 거리였다. 양쪽으로 간이 게임을 하는 곳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사람이 다트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역광이었기에 그림자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노을이 만든 눈부신 조명을 받은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밝은 노란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