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예찬은 에반의 눈치를 보며 슬쩍 시우 쪽으로 붙었다.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안전 영상을 보고 있었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은 시우와 에반이었다. 오히려 둘은 편하게 이야기를 했고, 지금은 누가 어디 앉을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 가운데 시우의 몸에선 여전히 자신의 페로몬이 폴폴 풍기고 있었다.
“형.”
예찬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 에반에게 눈으로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분명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찬은 그 눈빛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예찬이 네가 앞에 탈래?”
“네.”
예찬은 시우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시우가 앞에 타고 뒷좌석에 에반과 같이 앉는다면 그 시각으로 이 세상과 이별을 할 것 같았다.
사파리용으로 개조한 지프에 탄 시우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번엔 참으로 다양한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혼자 여행도 다녔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시우의 시선이 옆에 앉은 에반에게 닿았다.
사진 찍는 게 취미라고 하더니 그는 카메라를 조작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돌아갈까? 이번엔 돌아간다고 해도 큰 후회를 할 것 같지 않다. 늘 화면에서 보고 동경하던 이와 여행도 하고 같이 밥도 먹고 추억도 많이 쌓았으니까.
카메라를 조작하는 큰 손을 보다가 물끄러미 제 손을 보았다. 이번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코코. 나는 그만 보고 밖의 동물들 봐.”
이마나 머리에도 눈이 달렸냐? 시우는 입술을 삐죽이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에서 사육사가 차를 운전하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그늘에 늘어져 쉬고 있는 동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의상 휴대전화를 꺼내 그늘에서 쉬고 있는 사자 무리를 찍었다.
“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갑자기 에반이 등 뒤에서 껴안지 않았다면 계속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 자네.”
바로 귀 옆에서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쪽으로 동물들을 다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우가 있는 쪽에서 동물이 더 잘 보였다.
시우는 자신을 완전히 감싼 에반 때문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하기엔 자신의 앞에 카메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커다란 카메라는 밖에 있는 동물을 찍었다. 꼭 이렇게 뒤에서 날 끌어안고 찍어야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좁은 지프 뒷자리에서 체격이 큰 에반이 움직이려면 제약이 많았다.
“이제 곰 보러 가네.”
또 귓가에서 에반의 목소리가 들리자, 결국 시우는 살짝 뒤로 움직이며 자신의 등으로 에반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야. 뒤로 좀 가.”
“뒤로 가면 그늘져서 사진이……. 아! 미안. 네가 불편하구나.”
에반은 카메라를 거두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생생한 동물들의 모습을 담으려 했을 뿐 그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창가에 붙은 그의 뒤로 다가갔다.
멍청한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게 시우와 얽히는 일이면 뭐든 그랬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열기와 인기척이 사라지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에반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리 와.”
어색하고 불편해서 조금 뒤로 가랬지, 그렇게 멀리 가 버리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잖아.
분명히 다시 오라고 불렀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시우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 짧은 시간 시우가 에반의 얼굴에서 읽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찰나의 시간 그는 평소와 같은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쩌면 시우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곰 먹이 준다니까 가까이서 찍으라고.”
한마디 툭 던진 시우는 몸을 완전히 창 쪽으로 돌리고 앉았다. 조금 전 있었던, 생각할수록 이상했던 감정의 흐름 이후로 무언가 이상했다.
“시우 형이 먹이 줄 거예요?”
예찬은 일부러 조금 오버하는 목소리로 말하며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 이 형들은 뭐지? 열심히 사육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지만, 계속 뒤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다.
“응. 내가 주려고. 에반이 무섭대.”
뒤를 돌아본 예찬은 차마 에반을 보지 못하고 시우를 쳐다보다 그의 대답에 절로 지어지는 어이없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저기 맹수 우리에 집어넣어도 다 패고 걸어 나올 것 같은 에반 형이 곰을 무서워한다고? 취미가 익스트림 스포츠인 사람이? 작년 겨울 스위스에서 헬기에서 뛰어내려 설산 정상에서 아래까지 내려오는 영상을 직접 찍은 사람이 뭐가 무섭다고요?
“그러게. 에반 재밌지? 롤러코스터도 별로래. 그래서 아까 롤러코스터 탈 때 손잡아 줬어.”
“형은 에반 형을 그렇게 몰라요?”
예찬은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래, 이 세계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까지는 다 알 수 없긴 했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써 에반은 코코맘 1기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지만, 반대로 시우는 그에 대해 조금도 모른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방금 짓궂은 장난으로 추후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맞아 죽을지도 모르지만, 예찬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가 묻혀 놓은 진득한 페로몬은 어쩌면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 베타와 오메가, 알파의 세상에서,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함께 여행 가고 싶은 남자 1위, 탐나는 사윗감 1위, 이상적인 남편 1위 같은 기록을 가진 에반이다.
그런 그가 지금 페로몬을 느끼지도 못하는 베타에게 심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그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은 전혀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
“에반이 뭐? 내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먹이 주기 체험을 한다고 차가 멈추는 바람에 예찬과 시우의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비록 그의 외모는 아무렇지 않게 바로 앞에 서 있는 흑곰을 두드려 팰 수 있을 것 같지만 속은 여릴 수도 있었다.
“조심해서 잡고 곰이 잡으면 바로 집게 놓아야 해.”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집게로 집어 창살 밖으로 내밀고는 시우는 곰이 잡기도 전에 놓쳐 버렸다. 바로 앞에서 철창을 그 두꺼운 손으로 턱 하니 잡는 순간 정말 파드득 몸이 튀었다.
“봤어? 봤어?”
비록 바닥에 고기를 떨어뜨려 곰이 몸을 숙이고 주워 먹어야 했지만, 시우는 몸을 홱 돌려 에반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나 더.”
눈은 반달로 접히고 광대뼈가 한껏 올라간 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우의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 그리고 에반이 ‘하나 더’라는 말을 하자, 얼른 사육사가 내미는 고기를 집게로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 집중의 부리를 내밀고는 조심스럽게 고기를 창살 밖으로 내밀었다.
“으아아아…….”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곰이 기다란 발톱이 있는 앞발로 고기를 낚아채자 또 얼른 뒤로 몸을 빼고는 혼자 알 수 없는 의성어를 내뱉었다.
“재밌어. 재밌어.”
다음 초식동물 쪽으로 넘어간다는 말과 함께 시우는 집게를 사육사에게 건네고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에서 찰칵거리는 연사 소리가 들렸다.
“형. 다음에 기린이래, 기린.”
곰 먹이 주는 것이 끝난 예찬 역시 호들갑을 떨었다.
“에반. 기린은 네가 줄래?”
에반은 고개를 흔들었다. 곰 먹이 주는 게 편했을 것이라는 말은 미리 해 주지 않았다. 이미 이런 프로그램을 팀원들과 많이 해 봤던 에반에겐 사파리 투어는 그다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간순간 변하는 시우를 지켜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언제 그렇게 슬프게 울었냐는 듯 시우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으아아악!”
곰에게 먹이를 주며 즐거워했던 시우의 입에서 결국 비명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황급히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에반의 품으로 날아들 듯 안겨 들었다.
“푸하하하.”
앞에서 예찬이 큰 소리로 웃는 소리가 지프 안을 가득 채웠다.
시우는 정말 몰랐다. 기린의 혀가 그렇게 긴지, 그렇게 시퍼러죽죽한 검보라색인지. 그리고 그렇게 힘이 센지.
처음에 자신이 들고 있던 풀을 낚아챌 때까지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풀을 다시 잡는 데 버벅거리는 바람에 그걸 기다리다 못한 기린의 혀가 먼저 나와 버렸다.
그리고 참하게 잘 있던 시우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핥은 것이었다. 그나마 운동신경이 좋았기에 급히 몸을 움직여서 머리카락 끝이 닿은 것이지, 멍하니 있었다면 그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반의 품에 거의 파고들다시피 한 시우는 고개만 살짝 돌려 여전히 앞에서 풀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린을 흘깃 보았다. 그 순간 기다란 혀가 한 번 더 허공을 슥 갈랐다.
“으아아악!”
혹시나 또 기린의 혀가 자신에게 닿을까 시우는 에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크크큽. 내 머리, 내 머리. 야, 내 머리!”
멀찍이 피할 곳이 없던 예찬은 기린의 혀에 머리카락을 맡긴 채 급하게 풀을 잔뜩 쥐고 내밀었다. 촬영이라고 아침에 정성 들여 손수 드라이했던 머리는 축축하게 젖은 채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다시 지프가 출발하자, 예찬은 차마 자신의 머리를 만지지 못하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