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시우는 루이가 잠든 걸 보고는 슬쩍 손을 빼냈다.
“왜.”
손을 놓기 무섭게 에반이 말을 걸어왔다.
“루이 자.”
“그래서?”
“어떻게 계속 손을 잡고 있어. 서로 불편하잖아.”
“손수건 있어?”
시우는 따스함이 사라진 손을 괜히 쥐었다 펴는 걸 반복했다. 손수건은 왜? 시우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묶어.”
“응?”
“이 피디 쓸데없는 곳에서 집요해. 나중에 또 뭐라고 트집 잡을지 모르니까 손목이라도 묶어 놓자고. 자율 주행 모드 끝날 때 풀면 되잖아.”
에반의 제안에 시우는 설치된 카메라를 흘깃 보고 둘의 손목을 묶으려 했다.
김시우, 이번 삶에서는 정말 별걸 다 해 보는구나.
커다란 손수건을 대각선으로 접어 길쭉하게 만들고는 손목을 맞대었다. 그리고 한 손을 꼬물꼬물 움직였지만, 단단하게 매듭을 짓지는 못했다.
손수건으로 둘의 손목을 대충 감아 놓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둘의 손을 클로즈업한 카메라에 손목이 어설프게나마 묶여 있는 것이 비치니 괜찮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포기해 버린 시우의 시선이 차창 너머로 향했다.
“어제는…….”
“그럴 수도 있지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에반이 말을 꺼내자마자 시우는 얼른 대답했다. 적당히 묻고 가는 쪽으로 시우는 마음을 굳혔다. 굳이 상기시키면서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단지 시우가 걱정스러워하는 건 그의 팬덤이었다. 진짜 듣보잡 쩌리가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알파, 오메가와 같이 찍는다는 부분부터 말이 많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부분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기에 처음부터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에반과 엮이는 일이 많았다. 모두 우연이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도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데.
“방송 나가면 나 피쉬님들께 혼나겠다, 이런 생각을 좀 하긴 했지. 지금 이런 벌칙도 하는 중이잖아. 오션의 에반과 온종일 손잡고 있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방송 나가도 다들 카메라 앞에서만 잠시 했겠다, 이렇게 생각하겠지.”
시우는 창밖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오션의 팬클럽 이름은 피쉬였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님들.
방송 나가면 그때부터 잠수 탈 생각이었다. 집 안에 먹을 것 잔뜩 쟁여 놓고, 인터넷 접속은 하지 않고, 영화를 보거나 잠이나 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아니면 아예 인터넷이 안 되는 오지로 여행을 가 버릴까?
“일부러 그런 거 맞고. 피쉬는 음……. 좀 그렇긴 하겠네.”
건성으로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반을 보았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고? 아니면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라고?
느슨하게 손목만 묶여 있는 에반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커다란 손이 시우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얽혔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시우는 에반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으로 잘난 얼굴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의 장점만 모두 가졌다. 동양인에게 쉽게 볼 수 없는 높은 콧대라든지 짙은 음영이 드리운 깊은 눈. 길고 촘촘한 갈색빛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초록 눈동자는 또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3초라더니 그냥 보고만 있어도 푹 빠져들었다.
“코코. 전에도 물었는데 내 얼굴 마음에 들어?”
신호에 걸렸는지 부드럽게 차가 멈췄다. 그리고 눈길조차 주지 않던 얼굴이 시우를 향했다.
“…….”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 물론 과하게 마음에 들었다. 탐미적인 관점에서 제 이상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마음에 드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지고 계속해서 그것에 시선이 가는 건 당연했다.
아, 또 부정맥이 시작되었다. 이건 필시 회귀하지 못한 부작용 같았다. 저도 모르게 살짝 눈썹을 찌푸린 시우는 얽힌 손가락을 풀어내려고 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루이는 조금 떴던 눈을 급히 감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곤해서 잠시 졸았다. 잔잔하게 깔린 음악 사이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자, 촬영 중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들을 줄이야. 분명 저 두 사람은 자신이 깊게 잠든 것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카메라 따위는 그래, 방금 내용은 편집될 것이 분명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둘만의 대화였다.
자신이 들은 건 ‘어제는…….’ 이 부분부터였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고 딱히 깊고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그런데 이 몽글몽글하고 간질간질하고 막 뭐가 그렇고 저런 이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시선을 둘 곳 없던 루이의 눈에 두 사람의 손이 들어왔다.
뭐지? 왜 손깍지까지 끼고 있음. 여보세요. 진짜 이거 뭐냐고요. 미친! 나 왜 이 차 탔어? 예찬이 대신 내가 갔어야 했어.
에반과 시우는 더 말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루이는 휴식을 취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자는 척을 해야 했다.
한 시간 30분을 달린 후, 가진 휴식 시간.
“왜 손 놓고 있어. 잡아야지.”
차에서 내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시우는 메인 작가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벌칙이긴 하지만, 쉬는 시간도 있고 적당한 타협안이 있어야 했다.
“그럼 화장실은 어떡해요. 저 지금 화장실 갈 건데요.”
정말 보자마자 손부터 지적하는 작가님의 말에 불퉁한 말이 툭 나갔다. 방금까지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땀 차도록 잡고 있었다. 적당히 눈치 보다가 얽힌 손가락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알아챈 에반이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벗어날 수 없었다.
루이라도 깨어 있으면 장난치고 그러면서 얼렁뚱땅 넘어갔겠지만, 오히려 깊게 잠든 루이를 깨울까 봐 큰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어제 화장실도 같이, 라고 했잖아.”
“작가님. 만약에 시우가 오메가라면 우리 둘이 손잡고 화장실 가는 게 상상이 되세요?”
“시우는 오메가가 아니잖아.”
알파와 오메가에 대입해서 말했더니 대뜸 나오는 대답에 에반은 피식 웃었다.
“적당히 눈감아 주세요.”
에반은 큰 손을 들어 메인 작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휘적휘적 자리를 떠나 버렸다. 작가님과 둘만 남게 된 시우는 살짝 눈치를 보고는 얼른 에반의 뒤에 따라붙었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사람이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 확실했다. 자신에겐 어떤 말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에반에겐 달랐다.
“뭐야. 왜 둘이 손 안 잡고 있어?”
“차 탈 때 어떻게 잡아요. 차 안에서 잡을게요.”
짧은 자유 시간이 끝나고 편하게 있던 에반은 자신을 보자마자 지적하는 피디의 말을 가볍게 정리해 버렸다. 시우의 손을 잡는 건 그에겐 벌칙이 아니었다. 시우는 어떨까? 루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짧게 한숨을 쉰 에반은 손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한번 쓱 훔쳐 냈다. 지난밤 일은 사고이면서 사고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코코의 라이브를 방해한 것이 시작이었다.
다른 이들이 먼저 욕실을 쓰고 있었기에 비어 있는 코코 방의 욕실을 사용했다. 그가 라이브를 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루이, 안과 함께 보낸 오후 시간은 그에겐 참으로 힘들었다.
분홍색 머리와 파란색 머리. 절로 시선이 가는 오메가 둘과 알파 한 명의 조합은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다.
사춘기 시절부터 시작된 연습생 생활과 데뷔. 그리고 지금까지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이다 자유를 만난 둘을 차마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은 길거리의 작은 가게들은 다 구경해야 했고, 맛있어 보이는 간식거리는 맛이라도 봐야 했다. 사람들의 눈에 맞춰진 생활. 그리고 오메가에 대한 환상과 늘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루이와 안은 1년 365일 다이어트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것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는 순간 다시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하고, 틀에 박힌 삶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들에겐 ‘Journey’가 일탈과 다름없었다.
에반은 신나게 날뛰는 루이와 안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기분 좋게 돌아다니던 중 누군가가 버린 비닐 조각을 밟고 안이 미끄러지는 순간, 에반의 몸은 절로 움직였다.
안이 바닥을 나뒹구는 험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지만, 손가락을 살짝 삐고 말았다. 왼손이었기에 그리 큰 불편은 없었다. 그냥 둬도 괜찮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고정하는 게 좋겠다는 말에 붕대를 감아야 했다.
어쨌거나 얼른 씻고 쉴 생각이었다. 그러나 욕실에서 나오는 순간 시우를 보자 작은 욕심이 생겼다. 다른 손가락도 아니고 중지, 약지를 다쳤는데, 왜 단추를 못 끼운단 말인가. 하지만 시우는 별말 없이 자신의 옷 단추를 끼워 줬다.
좋아하는 색이 핑크색이라더니 그의 잠옷은 말 그대로 핑크 향연이었다. 저에게 잘 어울리는 귀여운 복장으로 제 옷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시우 역시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꼬물거리며 단추 끼우는 것에 집중한 시우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손가락을 다친 것이 오히려 행운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노트북 화면에 시우와 자신의 모습이 비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