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달리다 일어난 사고로 시우의 두뇌는 오작동으로 인한 자동 로그아웃이 되어 버렸다. 주위에서 웃고 놀리고 장난쳐도 아무것도 그의 뇌에 도착하지 않았다.
“시우야?”
“우리 졌어요?”
이런 게임을 하다가 이런 실수가 일어난다면, 다들 팔짝 뛰면서 극단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전형적인 행동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에반이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서 있었다. 딱히 큰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면 시우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걸었던 현수는 돌아오는 대답에 멍해졌다.
“우리 내일 쫄쫄 굶어요?”
허망하게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물끄러미 보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피디를 바라보았다.
첫 키스.
수십 년 살아오면서 지금껏 본의 아니게 지켜 온 첫 뽀뽀를 이런 어이없는 게임에서 해 버렸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
“기본적인 건 제공합니다. 자, 벌칙 고르세요.”
“이거 뽑아요?”
멤버들 앞으로 두 개의 통이 내밀어지자, 얼른 두 개의 통을 받아 들고 온 안은 두 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일단 섞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하나는 벌칙 종류이고, 다른 통은 벌칙 할 멤버 이름이 들어 있는 통이니, 벌칙 통에서는 한 개, 멤버 이름이 들어 있는 통에서는 두 개 골라 주세요.”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제가 다 뽑겠습니다.”
안이 통을 안고 있자, 옆에 있던 예찬이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있는 에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나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하던 시우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아이돌의 삶은 만만찮은 것이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도 많았고, 귀찮아도 팬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꾸미는 것도 제법 있었다. 그런 것에 다 의미를 부여하고 신경을 쓰다 보면 머리만 아팠다.
“오! 벌칙은……. 아, 이거 벌칙이 맞나요?”
예찬이 뽑은 벌칙이 적힌 종이를 읽던 현수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종이를 돌려 카메라에 잘 잡히게 했다.
[하루 동안 손잡고 있기]
“여기서 하루라면 얼마의 시간을 말하는 겁니까?”
“눈떠서 잠들 때까지입니다.”
“화장실은요?”
안이 번쩍 손을 들고 물었다.
“당연히 손잡고 가야죠.”
“밥은요?”
“당연히 손잡고.”
“여기 다 오른손잡이잖아요.”
“먹여 주세요.”
안이 하나하나 물을 때마다 이미 그런 질문쯤은 다 간파했다는 듯 답이 툭툭 나왔다.
“와. 진짜 잔인하다!”
예찬은 오버해서 말하고는 냉큼 멤버 이름이 적혀 있는 통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냥 동시에 두 개 뽑을게요.”
통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는 신중하게 고르는 듯 움직이다 손을 빼낸 예찬은 두 개의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에는 [에반] [시우]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어떻게 뒷정리가 됐는지, 내일 벌칙이 어떻게 됐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카메라 불이 꺼지고, 스태프를 향해 꾸벅 인사한 시우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씻었고,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곧장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엎어졌다. 실수였다. 진짜 그건 사고였다. 그런데…….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폭주했다. 규칙적이지도 않았고 말 그대로 제멋대로 날뛰었다. 에반이 잡았던 목덜미가 뜨거운 것 같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초록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날뛰던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무래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정맥이 생기는 모양이다. 코끝에 알싸한 향이 맴돌았다. 시우는 검지로 코 아래를 마구 문질렀다. 익숙한 것 같으면서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수 없는 그런 향이었다.
코를 마구 킁킁거리자 방 안을 가득 채운 방향제 향이 느껴졌다. 부정맥과 함께 후각까지 미친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자는 것이 최고였다. 내일 받는 벌칙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입도 맞췄는데 손잡는 게 뭐가 대수라고.
한참을 뒤척거리던 시우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내 답답함에 이불을 확 걷어 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무 많은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내 라이브. 그렇게 허망하게 꺼 버린 라이브. 다시 라이브를 켜고 사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카메라를 켰다. 미안하니까 SNS에 사진이나 한 장 올릴 생각이었다.
후드 티셔츠의 후드를 끌어 쓰고 침대 옆 테이블에 둔, 토끼가 눈을 감은 모양의 분홍색 안대를 꺼내서 썼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셀카를 찍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은 시우의 얼굴 반절을 다 가려 버린 귀여운 안대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동글동글한 코끝과 입술이 전부였다.
방금까지 고민에 빠져 잘근거리고 입이 바짝 말라 혀로 적신, 그래서 붉고 도톰해진 아랫입술이 반짝이는 사진을 업데이트하였다.
그리고 아래에는 시우의 심리를 예측할 수 없는 술병 이모티콘이 달렸다.
* * *
“시우랑 에반 준비 끝났어?”
아침 일찍 일어나 다들 부지런히 움직여 이동 준비가 끝나자, 메인 작가는 시우와 에반을 불렀다. 이유는 단 하나 벌칙 수행.
나름 인생의 엄청난 사건. 예를 들어 지난밤의 급작스러운 게임으로 인한 불가피한 신체 접촉 같은 사건으로 잠을 설칠 줄 알았건만, 시우는 너무나도 편안한 단잠을 잤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둘은 다른 차에 배정되어 있었으니, 오늘 하루 얼굴 맞대고 있을 일이 별로 없었다.
“저희 차가 달라요.”
그랬기에 시우는 냉큼 말했다.
“너희 둘 다 렌터카 빌릴 때 등록했잖아.”
“네.”
시우는 옆에 서 있는 에반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어색한 상황 뒤로 둘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랬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둘이 번갈아 운전하면서 가자. 그럼 손잡고 있을 수 있겠네.”
“운전하라면서요.”
“PPL 제대로 보여 줘야 해. 알지? 자율 주행. 이번에 오션이 자동차 광고도 찍었다며. 가는 길에 중간중간 자율 주행 기능 보여 줘야 해. 계속 잡고 있기보다 자율 주행 하는 거 설명 넣고 벌칙 수행 계속해야지, 멘트하면서 자율 주행 켰을 때만 손잡아. 시우 짐 승용차에 실어. 예찬이랑 바꿔 타면 돼. 예찬에게는 좀 전에 말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거 시우 짐이지? 옮길 필요 없었네. 어서 싣고 출발하자.”
시우가 말을 하는 동안 에반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서 있었다. 이윽고 할 말을 마친 작가가 먼저 떠나 버리자, 시우는 자신의 짐 가방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직 어색한데. 일부러 피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 좀 그랬다.
“가자.”
시우는 갑자기 자신의 손을 덥석 잡고 다른 손으로 제 캐리어를 들고 먼저 걷는 에반의 등을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시우의 시선은 맞잡고 있는 둘의 손에 닿았다. 작은 자신의 하얀 손은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진 큰 손에 꼭 잡혀 있었다.
벌칙이 시작되었다. 손을 놓을 생각이던 시우는 같이 움직이는 카메라를 보고 한숨을 삼켰다. 이 프로그램은 눈뜨는 순간부터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방에 설치된 개인 캠은 각자가 알아서 자기 전에 끄고 눈뜨면 켜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어수선하게 준비하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쉼 없이 돌아갔다.
그래도 차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로는 손을 잡았는지 어쨌는지 그런 것까지 잡히지는 않았기에 그때까지만 손을 잡고 있으면 될 줄 알았다. 차에 타고 적당히 놓고 있으려고 했는데, 기어 근처에 있는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손.”
짐도 실어야 했고, 에반은 운전석에, 시우는 조수석에 앉아야 했기에 잠시 손을 놓았다.
운전석에서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킨 에반은 한적한 길에 오르자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 운전 중이야.”
시우는 작가님이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얼른 대답했다.
“자율 주행 모드잖아. 봐.”
양손을 핸들에서 떼고 액셀 위에 올려놓은 발까지 치우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는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자본주의 미소, 지금 그것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와. 진짜?”
“좋은 기능이 있는데 사용해야지. 이제 손.”
작가님이 시킨 대로 성실하게 PPL을 소개한 에반은 한 손을 핸들에 올려 두고 다시 시우에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시우는 군소리 없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빌어먹을 자율 주행 기능, 최첨단 시스템. 꼼짝없이 온종일 손을 잡고 지내야 했다.
“독하다, 독해. 진짜 그 위치에까지 카메라 달아 놓을 줄이야. 손에 땀 차겠어요.”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우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맞잡고 있는 손을 들어 루이가 더 잘 볼 수 있게 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자율 주행 PPL을 위해 이런 벌칙까지 생각해 낸 게 존경스러워.”
루이의 말에 대답하며 정말 손바닥이 축축한 것 같아 시우는 그의 손안에서 제 손을 살살 돌렸다. 그렇게 손바닥을 맞잡는 것이 아닌 에반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등이 닿게 했다.
“맞다. 오늘 이동 말고 저녁에 뭐 없다고 했잖아요. 없긴 뭐가 없어. 솔직히 우리 다 그룹이고 댄스 가수인데 그냥 넘어가겠어요?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 준비 팀 뽑는 거 하는데, 그거 노래 시킬 거래요. 말이 저녁 준비 팀 뽑는 거지 대놓고 끼 부리고 놀라는 거지 뭐겠어요. 참, 점수는 작가님이 노래방 마이크 갖고 오셨대요.”
“하―. 이 피디님 진짜.”
짜증 섞인 에반의 중얼거림에 시우는 말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춤이랑 노래라? 어떤 곡을 선택해야 할까? 자신의 곡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일단 대중성이 있어야 하고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곡이 적당했다.
딱히 누군가가 대화를 주도하지 않자 시우는 음악을 틀었다. 음악만 가득한 차 안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곡이 떠오르지 않자, 시우는 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아예 확 망가질까?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당장 손을 잡고 옆에 앉아 있는 에반부터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