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네? 지금 뭐라고요?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제 귀가 잘못된 건가요?
시우의 눈이 더없이 동그래져서 에반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남의 일이라고 뒤에서 좋다고 웃어 댔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에반이랑 시우 둘이서 한다고?”
에반의 발언에 놀란 건 시우만이 아니었다. 다들 바닥을 기면서 웃던 것을 멈추고 에반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멍하니 넋을 놓고 서 있는 시우에게로 시선이 옮겨 갔다.
“도전해 보죠, 뭐.”
시우뿐 아니라 스태프까지 당황하게 만든 에반은 태연했다.
내 의견은? 내 생각은? 그 게임 너 혼자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시우는 눈만 끔벅거렸다.
“이야! 에반, 난 널 믿는다. 역시 도전 정신 강한 우리 에반이!”
루카가 에반을 덥석 안고 총대를 멘 그를 칭찬하는 와중에도 시우는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피디와 작가님을 번갈아 보았다.
이 피디는 오늘만큼 당황해 본 적이 없었다. 에반과 처음 방송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에반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먼저 나서서 하거나 의견을 제안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시키는 건 원하는 만큼 제대로 분량을 뽑아 주었다.
이게 전체적인 케미를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두 명만 해도 분량은 충분했다. 문제는 에반이 선택한 사람이 시우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시우는 스페어로 생각하고 넣었다.
적당히 중립이고 어떻게 엮어도 무탈한 베타 김시우. 사전 인터뷰에서 에반이 시우의 팬이라고 무심코 언급했었다. 호기심에 김시우를 찾은 이 피디는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알려진 바가 없는 무명 가수. 하지만 톱스타 에반이 좋아하는 무명 가수.
기획안을 확정하고 출연 멤버를 섭외하던 이 피디는 큰 결정을 내렸다. 회사 대표와 친분도 있고 알파와 오메가의 뒤치다꺼리를 하기에 만만한 역할에 어쩌면 에반과 어떤 그림을 엮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맞아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 대놓고 김시우와 에반을 묶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 루카와 에반이 하든지. 둘이 오늘 커플 잠옷도 입었으니 화면에 잘 들어오네.”
피디의 말에 방금까지 에반을 웃으면서 끌어안고 있던 루카의 행동이 뚝 멈췄다. 반대로 불안감이 가득했던 시우의 굳어 있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이게 뭐라고 말 하나에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아이참. 피디님, 농담도 잘하셔라. 멀대 같은 알파 둘이서 해 봐야 뭐가 재밌다고요. 거참.”
행동에도 소리가 있다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같이 굳은 채 에반에게서 멀어지는 루카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그건 저도 곤란한데요.”
아니 방금 대놓고 한 명 콕 집어서 일대일로 클리어하겠다던 에반까지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야. 이거 생각해 보니 열받네! 내가 뭐, 내가 뭐가 문제야. 어? 내가 루미너스에서 비주얼 담당이라고. 시우는 되고 난 왜 곤란한데!”
“형 댄스 담당이잖아요. 무슨 비주얼이야.”
뒤로 물러서던 루카가 장난스럽게 오버하면서 던진 농담에 에반은 아무렇지 않게 팩폭을 날렸다.
“우와! 우와. 너 너랑 나랑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배신 쩐다. 그럼 나는 안 되고 시우는 왜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안건을 가지고 진지한 에반과 루카의 뒤에서 예찬과 루이, 안은 눈물까지 닦으면서 웃고 있었다. 이건 필시 아까 페로몬 뿜뿜, 했다고 루카한테 한 소리 들은 에반의 반격 같았다.
이 상황이 어떻게 풀릴지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스태프들과 다르게 시우 혼자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핑크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있는 헐렁한 잠옷 바지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핑크색 오버사이즈 후드 티셔츠 가슴에는 귀여운 토끼 한 마리가 발라당 누워 있었다.
긴 소매에 발간 손끝만 살짝 삐져나온 것이 보이고 다른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있으니, 보이는 거라고는 댕글댕글 굴러다니는 커다란 눈이 전부였다.
“우리 코코는 귀엽잖아요.”
헉!
갑자기 확 잡아당기는 손길에 훅 딸려 간 시우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당긴 에반의 목소리엔 큰 변화가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에반은 진지했다.
“어? 어…….”
에반의 한 품에 쏙 안긴 채, 여전히 손으로 막고서 커다란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시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루카는 긍정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 빠질 리가 없는 카메라가 확 다가오자 시우는 파드득거렸지만, 자신의 어깨를 감싼 에반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신 입가를 가린 손을 꼬물꼬물 올려 얼굴을 가렸다.
이런 굴욕은 첨이야. 대놓고 얼굴 평가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야! 귀여우면 다냐!”
결국 루카가 유명한 말을 날리고 말았다.
“당연하죠. 귀여우면 다지. 뭐가 문제야. 그럼 아까 말한 대로 나랑 시우랑 할게요.”
기승전 시우와 에반의 종이 옮기기 게임이었나요?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할까. 시우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손을 들어 재빨리 흔들었다.
전 아니에요. 전 찬성하지 않아요. 전 귀엽지 않습니다. 전 그저 지나가는 쩌리입니다. 집중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에반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 다네.”
아니 루카 형, 그러고 제자리로 돌아가면 어떡해요.
“야. 시우 가까이서 보니 진짜 귀엽긴 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루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벌인 모든 일은 착실하게 녹화 중이었다.
“자자, 다들 흥분하지 말고. 룰은 룰대로. 이미 두 번 실패했으니, 마지막 기회인 거 확인하고. 현수부터 시작!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실패할 경우 벌칙 수행으로 가자. 시우랑 에반이 들어가.”
그러게 처음부터 제시한 대로 하면 될 일인데, 갑자기 뒤에 왜 벌칙 수행이 붙을까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방금 그냥 성공하면 내일 왕처럼 지낼 수 있게 해 주신다면서요.”
파격적인 에반의 말을 무시하고 오히려 벌칙까지 거는 피디의 말에 다들 기겁하며 날뛰었다. 방송 경력을 무시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지금 장면들이 본방에는 나가지 못하더라도 에피소드로 웹에 푸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뭘 또 더 하시려고 벌칙까지 붙여 버리는 파렴치한 피디의 말에 뒤에서 구경만 하던 안까지 앞으로 나서서 항의했다.
“전체 벌칙 할까? 아니면 개별 벌칙 할래? 이런 식이면 전체 벌칙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지?”
짧게 상황을 정리하고 사악한 미소를 짓는 피디의 말에 항의하러 앞으로 나갔던 안이 터덜거리며 들어갔다.
“대신 종이 바꿔 주세요! 우리 제안도 하나는 들어주셔야죠.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이깁니다. 다들 피디님 말 잘 들었지?”
루카의 말에 다들 얼굴에 비장미까지 서렸다. 이게 뭐라고. 단순한 20대 초반 청년들의 승리욕에 불이 붙어 버렸다.
이제 남의 입술이 닿고 내 입술이 닿고, 뭐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투명한 의도를 보이던 종이는 페이스 기름종이로 변경되었다.
피디의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스톱워치의 버튼이 눌러졌다.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던 시우는 제 목덜미를 확 잡고 종이를 조심히 넘기는 에반의 행동에 그의 어깨를 잡고 종이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작은 접시에 종이를 후, 하고 떨어뜨렸다. 진짜 다들 피도 눈물도 없는 피디에게 이를 갈았는지 종이는 무사했다. 그걸 확인하던 중 어깨가 잡혀 휙 돌려진 시우는 허겁지겁 에반이 넘기는 종이를 또 받았다.
자신의 실수로 이 게임에 진다면 멤버들의 원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에반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것은 나중에 그와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예민한 개인감정 따위는 날려 버렸다. 일단 이기고 보자, 이기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됐다, 됐다. 마지막 종이가 돌기 시작하고 무사히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 멤버들은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자 극도의 흥분 상태에 몰입했다.
제일 처음 종이를 넘긴 현수는 종이를 따라 움직이며 성공을 기원했다.
“10초.”
피디의 말과 함께 시우는 에반이 몸을 자신 쪽으로 돌리기만을 기다렸다.
“9.”
게임 시작 후 계속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시우는 이제 에반이 자신의 목덜미를 잡는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8.”
에반의 얼굴이 훅 다가오자 시우는 얼른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종이. 어서어서. 기필코 이겨서 내일 피디님을 벗겨 먹으리라. 벌칙, 그런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에겐 오직 승리만이 있을 것이다.
“7.”
종이 내놔. 에반이 다가오는 걸 기다릴 시간이 없어 시우는 그의 멱살까지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확 당기며 까치발을 들었다.
“헐.”
미끈거리는 종이 대신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주위에서 기괴한 함성이 울렸다.
놀란 시우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숙이자, 힘없이 팔랑이는 종이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땡!”
맑고 경쾌한 피디의 한마디가 시우의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