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좋아.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밑에서 마구 물을 뿌려 댔지만, 예찬은 깔깔거리며 요리조리 신나게 피했다.
“아! 나 맞았어.”
엉뚱하게 옆을 지나가던 안이 그 물을 다 뒤집어썼다. 하지만 물을 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다들 깔깔거렸다.
물놀이할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협찬이라고 나눠 준 하얀 티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상의를 입지 않은 예찬과 현수를 본 시우는 물속을 휘적거리며 걸어 올라가 앉았다.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티셔츠를 벗어 버릴 생각이다. 다른 색이면 좀 더 입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얇은 흰 티셔츠에 피부색이 비치면서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앗싸! 시우 형 이쪽으로 왔으니까 우리 편.”
래시가드를 입은 안이 웃으며 하는 말에 반대편에 있던 루카가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버럭 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날 불러들였으니 다들 각오하세요.”
시우는 양손으로 티셔츠 밑단을 잡고 훌렁 벗어서 던졌다. 그러곤 젖은 머리를 대충 손으로 털었다.
“수구를 한다고? 지금 준비하고 나가야 하는데?”
각자 놀던 촬영 멤버가 모였다는 소식에 피디가 눈을 빛내면서 나왔다. 피디의 말과 다르게 카메라가 풀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팅되었다.
“조금만 놀다가 가요!”
“편은 어떻게 나눴어?”
“그냥 물에 들어온 순서대로 했는데요. 이기는 편 뭐 있어요?”
손으로 혼자 공을 튕기며 예찬은 피디와 딜을 시작했다.
“뭐 받고 싶은데?”
“팀별 투어 할 때 용돈 많이 주세요.”
“투어 팀은 세 팀인데 지금 게임은 두 팀이잖아.”
“어. 그러네.”
어리숙한 예찬의 말에 루카는 그의 등을 툭툭 치며 예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오늘 저녁 비싼 거 먹으러 가자고 그래.”
“이기는 팀은 먹고 싶은 거 다 사 주기!”
역시나 단순하고 활달한 예찬이 번쩍 손을 들고 크게 말하자, 피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로라하는 스타에 귀하다는 알파들의 꿈이 이렇게 소박해서야.
“야! 비싼 거 먹자고 했지. 이기는 팀만 다 먹으면 뭐가 좋아! 우리가 지면 어떡할 건데!”
자신의 조언과 다른 말을 내뱉은 예찬을 장난스럽게 계속 툭툭 치며 타박하는 루카의 말에 시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다들 피디님과 최소 한 번씩은 같이 일해 봤다더니, 괜히 그 모습이 부러웠다.
상의를 벗고 머리를 털며 멍하니 그들을 구경하던 시우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훅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일에 화들짝 놀란 시우는 조금 뒷걸음질 쳤다. 이내 그것이 카메라인 걸 확인하고는 머리를 털던 손을 내려 살짝 흔들었다.
쉽게 뒤로 빠지지 않는 카메라에 손 하트도 날리고 손 뽀뽀도 했다.
카메라 앞에서 나름 예쁜 표정을 지으며 장난치던 시우의 머리 위로 난데없이 무언가가 뒤집어 씌워졌다.
“미쳤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있던 시우의 귀에 험한 말까지 들렸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눈을 가렸던 것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카메라가 있던 자리엔 잘 그을린 맨가슴이 있었다.
“안 입고 뭐 해? 입혀 줘야 해?”
시우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여전히 카메라 감독님이 계셨다. 그리고 루카 형과 예찬, 루이는 공을 튕기며 놀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무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에반이 보였다.
“이걸 왜?”
시우는 자신의 몸에 씌워진 짙은 파란색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침에 에반이 이 색의 티셔츠를 받았던 것이 기억났다. 카메라를 향해 손 하트와 손 뽀뽀를 보낸 게 잘못된 행동인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겁도 없이 어디서 훌떡훌떡 벗냐고. 래시가드 없어?”
하지만 이어진 에반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상의를 벗고 있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래시가드? 당연히 없었다. 물놀이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래시가드를 입고 있는 루이와 안이 이상한 것이다. 예찬이도 루카 형도, 현수 형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풀장 옆에 서서 티셔츠를 벗어 옆으로 툭 던지고 물속으로 들어갔었다.
“래시가드가 왜 있어.”
갑자기 불퉁한 마음이 쑥 올라왔다.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한다. 자신의 몸은 지금 앞에서 돌아다니는 알파들만큼 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 다듬어진 조각 같은 근육도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춤을 췄기에 군살은 없었다. 원체 근육이 잘 생기는 몸이 아니라 눈에 확 드러나는 식스팩은 없지만 못 볼 만큼 엉망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옷 입고 들어와. 벗을 생각 하지 말고.”
명령 같은 말과 함께 시우의 머리 위로 챙이 넓은 모자가 하나 씌워졌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고, 자신에게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에반은 웃으면서 루카 형이 보낸 공을 멋들어지게 쳐서 넘겼다.
괜한 분란 만들지 말자.
시우는 에반을 바라보다 군소리 없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티셔츠를 입었다. 자신이 벗은 모습이 보기 싫었나 보지. 그렇다고 그렇게 정색하고 말했어야 했나? 체격 차이를 보여 주는 듯 헐렁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복수하려면 상대편이어야 하는데 왜 같은 편일까?
“우와. 현수 형! 지금 루이만 노리는 거예요? 루이야, 기다려. 내가 복수해 줄게.”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구멍을 노려야 하는 법. 아무래도 뛰어난 운동신경을 타고난 알파들보다 오메가를 공략하는 것이 빠르긴 했다. 벌써 세 번째 루이는 공을 받으려 파닥거리다 혼자 입수하기를 반복했다.
“진짜 너무해요. 예찬아, 루카 형. 혼내 주세요!”
머리를 푸르르 떨며 하는 루이의 말과 함께 공이 날아왔다. 예찬이 자신만만하게 보낸 공은 보기 좋게 시우의 머리 위를 튕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푸하하하.”
제대로 진행이 될 수 없는 경기였다. 맨땅에서 축구나 농구를 시켰으면 신나게 했겠지만, 다들 수구는 처음이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1순위였고, 온몸을 날려 공을 받아 내면 이어지는 건 잠수였다. 공은 방향을 잃고 어딘가로 허망하게 날아가기 일쑤였다.
“예찬이. 전쟁이다! 에반 형이랑 현수 형은 뭐 해요. 나랑 시우 형 지켜 줘야지!”
공에 맞은 머리가 아프진 않았지만, 웃기기도 하고 황당한 상황에 시우는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새 시우의 옆으로 온 안이 시우의 머리를 만져 주며 하는 말에 겨우 수습될 뻔하던 웃음이 다시 번졌다.
“안. 나는 안 지켜 줘도 되는데?”
“알파가 둘이나 있는데 왜 형이 힘을 빼요.”
“나도 체력 좋은데?”
“네.”
이 대화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까? 안이 환하게 웃으며 내놓은 긍정의 대답은 오히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기필코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 비록 알파가 잘났다고 하지만, 노력하는 베타도 만만치 않다고. 평소 잘 불타오르지 않는 시우였지만, 괜한 오기가 생겼다.
수영도 곧잘 했으니, 공을 따라다니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야 다들 허둥거리고 엉망이었지만, 이내 조금씩 몸으로 익히면서 공을 주고받는 횟수가 늘어났다.
모처럼의 기회. 자신을 향해 곧게 날아오는 공을 보고 시우는 힘껏 뛰어올랐다. 그리고 정확히 멋지게 공을 받아 냈지만, 몸의 균형을 잃었기에 물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푸르르하며 물속에 들어가면서도 환호성을 들은 걸 보아 자신이 점수를 낸 것이 분명했다.
“아싸!”
물에서 올라와 손으로 얼굴을 훑기도 전 자신을 안아 오는 힘에 시우는 휘청거렸다. 다행히 잡아 주고 있었기에 다시 빠지지는 않았지만, 마구 잡고 흔드는 그 힘에 팔랑이는 나뭇잎이 된 기분이었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현수 형이 이렇게 힘이 좋았나? 빨리 게임 하자고 루카가 소리 지르기 전까지 시우는 현수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넘어오는 공을 제대로 받아 낼 때마다 점수가 오르니 간만에 신이 난 시우는 몸을 바쳐 날아다녔다.
“적당히 해.”
또 점수를 내고 헥헥거리며 물속에서 일어난 시우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힘에 비틀거렸다.
“응?”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뭘 열심히 하지 마? 갑작스러운 에반의 말에 시우는 멀뚱거리며 그를 보았다.
“이겨서 뭐 하게.”
이겨서 뭐 하긴, 저녁에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것도 있지만 모처럼 신나게 웃으면서 놀던 중이었다.
“재밌잖아.”
“너 지금 몇 번이나 빠졌는지 알아? 이게 재밌어?”
이게 재밌지, 그럼. 넌 뭐가 재밌는데?
한창 하다 말고 둘만의 대화에 빠져 있자, 세차게 날아온 공이 보기 좋게 에반의 머리를 강타하고 튕겨 나갔다.
“아. 너무 힘들어. 이거 누가 하자 그랬어? 예찬이지?”
놀 때는 좋았지, 준비되어 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현수는 아직도 풀장에 혼자 남아 공을 튕기며 놀고 있는 예찬을 바라보았다.
“재밌잖아요.”
“재미는 있지. 힘든 게 문제고. 그래도 우리 시우 덕분에 이겼다.”
풀장에서 벗어나 물이 뚝뚝 떨어지는 티셔츠의 끝을 잡고 물을 짜고 있던 시우는 또 현수의 품으로 들어갔다. 원래 알파라는 족속들이 스킨십을 좋아했던가?
그룹으로 꽤 긴 시간을 보낸 시우는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며 허수아비처럼 서서 그가 놓아주길 기다렸다.
“자, 시간 없다. 다들 빨리 준비하고 나와. 점심 먹으면서 오후 투어 팀 정하고. 원래 계획은 투어 마치고 돌아와서 같이 저녁 먹어야 하는데. 그냥 정해진 팀으로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는 걸로.”
아직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풀장 주변을 돌아다니는 멤버를 실내로 밀어 넣으며 재촉하는 피디의 말에 다들 군말 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오후 팀 어떻게 나눠요?”
호기심 많은 루이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