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자자. 그만 놀고. 다들 집중. 지금까지는 ‘Journey’가 모두 비공개였는데, 오늘부터 조금씩 정보 흘려야 하니까 잘 따라 주도록.”
이 피디가 입을 열자, 다들 언제 장난쳤냐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대화가 끝나고 침실로 돌아온 시우는 방금 들은 사항을 되뇌었다. 각자 공항에서 출국하는 모습은 팬들에게 찍혔다. 거기다 단체로 마켓에서 장 보는 것도 현지 팬들에 의해서 SNS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신 마켓 사진은 다들 자신이 찍은 사람이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맞는지 확인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하루에 최소 한 장 이상 개인 SNS에 지금 여기 있는 멤버와 함께 있는 사진을 업로드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미션이었다. 대신 일곱 명이 함께 찍은 사진은 금지되었다. 팬들이 출연 멤버를 유추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쪽에서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셀카라도 다른 멤버 뒷모습이 어설프게 걸린 것 같은 것을 추천했다. 단, 루이와 안은 둘이 같이 찍은 셀카라면 상관없다고 했다.
개인 방송을 하는 경우 지금 여행 중이고 촬영 중인 것까지만 밝히라고 했다.
몇 가지 사항을 되뇌던 시우는 내일 오후 시간이 남는다면 개인 방송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줌의 우리 코코맘들에게 여행 중이라고 자랑해야지.
괜한 흔적을 남기기 싫어 시우는 항상 라이브만 진행했다. 그랬기에 ‘코코는 유령이다’가 시우가 하는 방송 제목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하고 싶을 때 공지도 없이 켜서 혼자 주절거리다 끄는 게 전부였으니까.
길게는 30분도 하지만 어쩔 땐 정말 ‘안녕.’ 하고 3초 만에 방송을 끝내기도 했다.
침대에 누운 시우는 은은한 침대 옆 조명을 빌려, 민낯 셀카를 찍어서 업로드할 생각이었다. 늘 그렇듯 멘트는 쓸 생각이 없었기에 상황을 설명할 이모티콘을 찾기 시작했다.
주황빛 조명 아래 뽀얗고 포동포동한 볼을 자랑하며 베개를 베고 누운 시우의 눈 감은 사진이 비행기 이모티콘과 함께 올라갔다.
* * *
에반은 싱글 침대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루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 에반과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은 루이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 중 하나가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성이었다. 둘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무조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둘 중 하나가 러트나 히트일 경우, 둘의 러트와 히트가 겹칠 경우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알파나 오메가도 제 취향이 확실히 있는데.
“왜?”
“시우 형요.”
“페로몬?”
에반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루이를 보고 피식 웃어 버렸다. 자신이 해 놓은 일이니까.
“시우 형 베타잖아요.”
“그래서?”
“형이 아무리 그렇게 침 발라 놔도 시우 형은 알지도 못하는데, 왜 그래요?”
“알파, 오메가는 확실히 알잖아.”
에반은 자신의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 갤러리를 뒤적이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라면서요.”
“나 코코 팬인데?”
“네?”
정말 예상치 못한 에반의 대답에 루이가 안고 있던 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천하의 에반이 누군가의 팬이라고?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원픽이 듣보잡에 가까운 솔로 가수?
아니 그래도 타인에게 그런 페로몬을 묻히는 건 실례였다. 거기다 베타인 시우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만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시우를 끌어안았던 루이는 순간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페로몬만 맡았다면 시우를 에반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독한 에반의 페로몬이 시우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페로몬은 평범하거나 실수로 묻혔다고 보기 어려운 무언의 경고가 짙게 서려 있었다.
소유욕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했고, 타인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았다.
“대답 됐어? 불 끈다.”
루이는 몇 가지 더 묻고 싶었지만, 단호한 에반의 말투와 온종일 쌓인 피로감에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호기심은 많지만 남의 일에 깊게 관여하지 않는 루이는 앞으로 그들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루이가 자신을 등지고 눕는 걸 본 에반은 불을 끄고 제 침대에 편히 누웠다. 그의 휴대전화 갤러리엔 오늘 찍은 시우의 모습이 가득했다.
지겨운 일상의 연속.
계속 반복되는 시간.
달라지지 않는 현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 자신을 버티게 한 것은 시우였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으니까.
시우를 본 건 우연이었다. 여느 날처럼 다들 연습실에 모여 연습하다가 지쳐 잠시 쉬는 시간, 그 역시 시원한 연습실 바닥에 누웠다. 멤버 한 명이 TV 채널을 돌리다 리모컨을 던져 놓고 나가 버렸다. 굳이 리모컨을 찾아 돌릴 생각이 없었기에 나오는 방송을 보고 있었다.
음악 방송이었다. 무심하게 보고 있던 에반은 한 남자가 무대를 채우는 순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현혹된다. 빠져든다.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인 듯했다.
메인곡은 발라드였다. 익숙한 멜로디에 양산형 발라드였지만, 목소리가 달랐다.
맑은 고음이었다. 묘하게 끝 음을 흐리는 그 창법에 애절한 발라드곡이 야하게 들렸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곡은 댄스였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런 춤은 처음 보았다. 강한 것 같았지만, 한순간 부드러운 물로 변했다. 두 곡으로 이루어진 김시우의 데뷔 무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약 7분에 가까운 데뷔 무대로 에반은 김시우의 팬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었고, 그의 춤을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기를 얻지 못한 시우는 방송에서 보기 힘들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몇 없는 방송 영상을 되돌려 보는 것이었다.
시우의 팬클럽인 코코맘에 익명으로 가입했지만, 활동하지 않는 가수에 대한 정보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우는 가끔 라이브를 했지만, 정말 예고도 하지 않고 밤낮 가리지 않고 제가 내키는 시간에 뜬금없이 나타나곤 했다.
덕분에 에반은 단 한 번도 그의 라이브를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코코맘들 중 그의 라이브를 전부 본 사람이 없다고 할까.
예상치 못한 시간에 시작해 3초 만에 끝난 라이브를 본 사람이 과연 있긴 한 것일까?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 충분히 그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에반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지치고 힘들 때 그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으니까. 굳이 그 사람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이 가진 환상을 깨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시우를 본 순간 에반은 자신의 멍청함을 욕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그를 찾아갔을 것이었다.
그가 지금껏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절대 놓쳐서도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다가온 운명의 시간 12시.
반복되는 저주가 깨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가 시간을 물어보기 전까지 에반은 운명의 시간을 넘긴 걸 알지 못했다. 반복되는 저주가 깨진 것보다, 에반은 그를 찾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이었다.
또다시 삶이 반복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누군지 알았으니까, 반복되는 만큼 그만큼 그를 찾으면 된다.
한참 갤러리를 보던 에반은 자신의 SNS에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좁은 택시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한 남자의 작은 머리였다.
그리고 그 아래는 ‘found’라는 단어가 적혔다.
그날 밤.
코코맘들은 우리 아기 또 혼자 훌쩍 여행 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만간 라이브가 열릴 걸 예상하며, 부디 자신이 그 라이브를 볼 수 있기를 기도했다.
혼자 여행할 때 유독 라이브를 많이 했으니까, 자신이 다닌 풍경과 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우였다.
반면 에반의 팬들은 꽤 깊은 토론에 빠졌다.
사진 속 남자는 오션 멤버가 아니다. 현재 오션 멤버 중 자연색에 가까운 검은 머리카락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밤톨같이 동글동글한 작은 머리나 가는 목선과 그리 넓지 않은 부드러운 어깨는 아무리 봐도 알파가 아니다.
지금껏 스캔들 한번 없던 우리 에반의 근처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오메가일까? 설마 진짜 오메가?
그리고 ‘found’라는 단어에 다양한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 * *
최대한 자연스럽고 편안한 여행을 보여 줄 거라더니, 이 프로그램엔 휴식이 가득했다. 정해진 기상 시간도 없었기에 각자 일어나는 대로 알아서 움직였다. 오늘 일정이라고는 점심때쯤 단체로 나가서 식사 후, 팀별로 관광하는 것이 전부였다.
넓은 킹사이즈 침대를 뒹굴뒹굴하던 시우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 반쯤 감긴 눈으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긴 시간 해 온 대로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실제 발레를 배운 기간은 10년 남짓. 연습생으로 지내면서 춤 연습 전엔 다양한 방법으로 스트레칭을 해 봤지만, 발레 때 배운 것이 자신에게 제일 잘 맞았다.
그랬기에 아침마다 하던 것이 버릇되어 하루를 시작하는 건 늘 스트레칭이었다.
온몸을 나른하게 늘이면서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점차 잠에서도 깨어났다.
“응?”
완전히 깬 상태라면 3분 정도면 되겠지만, 느리게 움직이다 보니 10분을 넘겨서야 스트레칭을 끝낸 시우는 눈을 껌벅였다.
“형 엄청 유연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에 앉아 있는 루이의 말에 시우는 천천히 일어났다.
“언제 왔어?”
“다들 아침 먹자고 해서 형 깨우러 왔는데, 스트레칭 중이라 기다린 거예요. 다 됐으면 밥 먹으러 가요. 안이 라면 끓인대요.”
아침부터 라면이라고?
아침은 커피인 시우는 라면을 아침으로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 아침은 커피면 돼. 넌 얼른 가서 먹어. 준비하고 갈게.”
“저 그냥 가면 혼나요.”
“응?”
“에반 형이 형 꼭 데리고 오래요.”
루이의 입에서 에반의 이름이 나오자 욕실로 향하던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짜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가볍게 무시해 버리기엔 과한 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