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에반,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해.”
“뭘?”
“브로맨스. 나한테 해 봐야 방송에 제대로 나오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피디님 의도 네가 더 잘 알잖아. 루이나 안에게 하는 게 맞지. 그게 아니라도 알파, 오메가와 너의 브로맨스를 보고 싶지, 평범한 베타와 그러는 건 보고 싶지 않을 거야.”
“왜?”
“당장 나라도 그러니까.”
시우는 구질구질하게 제가 느낀 것과 이 프로그램에서의 제 역할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없이 마구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에게 정확히 선을 그어 놓고 싶었다. 어차피 여기서 맺는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처음엔 조금 연락하는 듯하겠지만, 한두 달만 지나면 흔하디흔한 메신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에반의 전화번호는 수시로 바뀔 것이고, 에반의 연락처에서 시우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 뻔했다.
“싫은데?”
단호한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돌 그룹에 있을 때도 시우는 브로맨스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차갑다거나 시크하다 같은 단어였다. 하얀 피부에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것 같은 통통한 볼을 가지고 있지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도 그런 수식어에 한몫했다.
눈 화장이 과할 때면 눈꼬리가 더 올라가 예민해 보이기도 했다.
멤버들과 친했지만, 굳이 의도적으로 그들과 뒤엉키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대놓고 피했다가 착한 기획사 대표님께 불려 갔다. 이런 것도 비즈니스라고.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도 적당히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시우가 맺은 타협안은 다른 멤버들이 먼저 건드리는 건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브로맨스든 플러팅이든 다 너한테 할 건데.”
별빛이 쏟아질 것 같다고 칭하는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우가 어이없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 마.”
“왜?”
“싫어.”
“뭐가 싫어? 내가 너 쳐다보는 거 싫어? 내가 너 만지는 거 싫어? 그럼 이런 것 다 싫어?”
유치원생도 아니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투덕거림의 끝은 에반이 시우의 양 볼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반의 코끝과 시우의 코끝이 아슬하게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지금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끔뻑이던 시우는 자신의 얼굴을 잡은 에반의 손목을 잡았다.
“싫은 건 아니라는 거네. 코코. 앞으로 우리 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 프로그램 취지가 뭔지는 알지?”
아슬아슬하던 코끝이 결국 살짝 닿고서야 에반은 시우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공식적인 프로그램의 취지는 20대 청년 일곱 명의 자유로운 우정 여행이다. 비공식적으로는 브로맨스를 자극적으로 버무리는 거였고.
에반이 놓아주자마자 시우는 냉큼 택시 문 쪽으로 붙어 앉았다. 그리고 도착할 때까지 둘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 * *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평균 키가 190에 가까운 알파 네 명과 170대 초중반의 오메가, 베타는 서로 섞여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아니 그들은 바빴고, 시우는 조금 뒤에 떨어져서 그들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에반이 처음부터 편하게 이름과 호칭을 부르던 강예찬, 최현수, 루카는 사적인 친목으로도 유명했다.
공개적으로 친분을 공공연히 드러내던 자들이었고, 오메가 네 명으로 구성된 그룹 팬텀은 희귀성으로 어디에서나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성별이 모호한 느낌의 아름다움과 순결한 느낌까지 자아낸다는 것이 팬텀을 향한 평가였다.
거기서 우월을 가리기 힘들다는 이안과 이루이가 이곳에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일하다는 이란성 오메가 쌍둥이.
이란성답게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형제인지라 닮은 부분도 많았다. 구분하기 쉽게 이안은 핑크색으로, 이루이는 하늘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안이랑 루이 더 이뻐졌다.”
둘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으며 루카가 말하자 둘은 환하게 웃었다.
“형은 2주 전에 막콘 하고 휴식기 아니었어요? 그런데 촬영 온 거예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 피디님이 출연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 하던데, 하마터면 안이랑 루이 못 볼 뻔했네. 섭외 거절했으면 진짜 후회했겠다.”
왁자지껄 시끌시끌.
스태프들은 촬영 준비에 바빴고, 출연진들은 자신들끼리의 친목을 다지고 인사하느라 바빴다.
그들의 주위에 덩그러니 서 있던 시우는 거실의 커다란 창에 붙어 밖을 바라보았다.
이 피디는 참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가 만드는 프로그램은 늘 이슈가 되었고, 연이어 그 콘셉트를 커버한 프로그램들이 탄생했다.
처음엔 한 그룹원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을 기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든 해외든 알아보는 시선이 많아지면 자유로운 여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이런 조합을 만들었다고 한다.
카메라와 자신이 아는 그룹 멤버를 동시에 본다면 다른 멤버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팬들의 습성을 역이용한 것이다. 분명히 자신이 아는 멤버를 본 것 같은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모른다면? 잠시 제가 본 것이 맞는지 고민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다면 잘못 봤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비에 부치고 알아볼 팬이 적은 해외로 여행지를 정했다고 한다. 숙소 역시 많은 사람이 오가는 호텔이 아닌 풀 빌라 같은 곳들이었다.
시우가 이곳까지 오면서 보았던 강이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대저택의 거실에서 내려다보였다. 강 위로 오리인지 백조인지 알지 못할 새들이 둥둥 떠다녔다.
“코코.”
차가움이 느껴지는 창에 이마까지 대고 구경하고 있던 시우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호칭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별명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육성으로 제 별명을 불러 주는 사람은 에반이 처음이었다.
코코맘들과 라이브를 진행할 때면 텍스트로 보긴 했지만, 직접 이렇게 불리자 기분이 묘했다.
“여기는 김시우. 솔로 가수고 나랑 동갑. 별명은 코코인데, 다들 시우라고 불러. 코코는 나만 부를 수 있어.”
갑작스럽게 다가온 큰 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우의 손목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그의 힘에 딸려 온 시우의 어깨에 팔을 두른 에반이 다른 이들에게 그를 대신해 소개했다.
“시우 형. 우리 전에 대기실 복도에서 본 적 있죠? 제대로 인사 못 해서 아쉬웠는데, 우리 10일 동안 잘 지내요.”
에반에게 어깨가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우의 품에 루이가 안겨 왔다.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포옹이라니. 게다가 다정한 목소리까지. 시우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 에반 형, 진짜 너무한다.”
분명 제가 원해서 안겨 놓고는 재빨리 멀어지는 루이는 시우가 아닌 에반에게 투덜거렸다. 다들 잡담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시우만이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다.
“이제 촬영 시작할 거니까 뭐 굳이 서로 인사하는 그런 모습 필요 없고, 다들 간단하게 게임으로 방 정하고 지내는 동안 먹을 것들 사고. 오늘 저녁은 직접 만들어 먹는 거 알지? 차는 두 대 준비했으니까 두 팀으로 나눠서 이동. 차에 카메라 설치해 놔서 카메라 감독들은 같이 이동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운전도 직접 해야겠지? 누가 운전할 건지도 정해.”
넓은 거실의 가운데 있는 큰 소파를 기준으로 편하게 앉으라는 말에 시우는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의자에 냉큼 앉았다. 뛰어난 외모들 사이에 섞여 괜히 시청자들의 눈을 괴롭히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Journey’가 시작되었는데요. 드디어 우리 멤버 일곱 명이 다 모였습니다. 제일 먼저 이곳에서 머물 동안 방을 어떻게 나눠 쓸지 정해 보겠습니다. 일단 이곳의 방은 총 네 개이고요. 우리가 일곱 명이니 기본적으로 2인 1실이군요. 꽤 심각하게 고려해서 정해야겠지만, 저희가 배가 고픈 관계로 대충 정하고 나가겠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고 실제 라디오 DJ인 현수가 자연스럽게 오프닝을 시작했다. 시우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게임을 하든 누구와 같이 방을 쓰든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에반과 같이 쓰는 건 좀.
“응?”
작은 의자에 앉아 바깥쪽으로 다리를 꼬고 있던 시우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고개를 숙였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더니 언제 내려온 것인지 바닥에 앉은 에반이 시우가 앉은 의자에 기댄 것이었다. 그리고 편하게 한쪽 팔을 시우의 허벅지에 걸친 채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이 내려다보는 걸 알았는지 에반이 고개를 젖혔고 시선이 마주쳤다.
“왜?”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쪽 상황이야 어떻든 현수는 말을 잇고 있었기에 시우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현수를 바라보았다.
“뭘 거창하게 할 거 같더니 뒤집어라 엎어라, 한다고요?”
방을 정하기 전 차로 이동해야 하니 일단 차를 같이 탈 팀부터 정한다는 말에 루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 방부터 정한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이동할 팀을 짜자고?
다들 한 소리 하면서도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이런 것에 뭐 생각할 게 있나? 그냥 손바닥 가는 대로 하면 되지.
바닥에 앉아 있는 에반 때문에 시우는 그의 위로 상체를 숙인 채 팔을 내밀어야 했다.
“손등.”
다들 웅성거리면서 눈치 보는 이런 상황에서 들린 작은 소리에 시우는 피식 웃었다. 도대체 에반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보란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고, 당당하게 그와 다른 차를 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