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피디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이세요?”
시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로퍼 앞코를 장난스럽게 톡톡 부딪쳤다. 역시나 에반은 특별 대우를 받는 슈퍼스타였다. 목적지까지 알아서 찾아오라고 하면서 막내 작가와 막내 카메라 감독님이 붙었던 시우와 시작부터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 그도 작가님 한 분, 카메라 감독님 한 분이 같이 있었다. 하지만 현지 공항엔 메인 피디님과 많은 카메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내가 지금 농담하겠어? 다른 출연진들이랑도 다 이야기된 거니까. 참, 시우도 알겠지? 적당히 스킨십도 하고.”
“알파 오메가 붙여 놓고 브로맨스라고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잠시 시선을 돌렸지만, 자신을 콕 찍어서 말하는 감독님의 말에 시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브로맨스. 왜 모르겠는가?
지금은 비록 솔로 가수지만, 아이돌 그룹만 세 번 했던 그였다.
베타들과의 브로맨스라면 가능하겠지만 알파, 오메가가 있는 그룹에서 자신이 무슨 브로맨스.
“나랑 한두 번 방송한 것도 아니고 잘 부탁해. 그리고 이미 둘은 비행기 안에서 만난 걸 에피소드에라도 넣을 테니까 숙소까지 둘이서 같이 찾아가는 것으로 하자.”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에반의 팔뚝을 툭 치는 피디의 행동엔 친근함이 묻어 있었다. 자신에겐 선택권 따윈 없었기에 시우는 흘러내리는 백팩의 끈을 잡고 끌어 올렸다.
“피디님이 분명 브로맨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에반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이 피디에게 다짐을 받듯 말했다.
“그래. 편집은 우리가 하니까 다들 친하게, 알겠어? 거기다 너나 루카, 현수, 예찬은 개인적으로 친한 것으로도 유명하잖아. 루이랑 안이 잘 챙겨야 하는 것도 명심하고.”
시우는 여전히 신발 앞코를 톡톡 부딪치며 서 있다가 둘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코코. 여기 온 적 있어?”
“아니.”
시우는 제 한쪽 어깨에 걸쳐져 있던 백팩을 가져가며 다정하게 말을 거는 에반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세 번째 온 거니까, 나 잘 따라다녀.”
“세 번이나 왔었어?”
“두 번은 콘서트, 한 번은 여행. 여기 날씨도 좋고, 특히 밤이 괜찮아.”
여러 명의 카메라맨에 둘러싸인 자신들에게 향하는 시선이 하나둘 늘어났다. 뭘 촬영하지? 하는 호기심과 누굴까 하는 관심이 섞인 시선이었다.
에반이 검은색 볼캡을 더 눌러쓰며 발걸음을 빨리하자 시우 역시 그를 따라가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갑자기 대화도 멈추고 빠르게 걷는 그를 따르는 시우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의 어깨에 걸쳐진 자신의 백팩으로 향했다. 저걸 받아 와야 하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져가 버려서 달라고 할 타이밍을 놓쳤다.
노트북에 이것저것 들어 제법 묵직했기에 더 신경 쓰였다. 공항 밖으로 나온 시우는 눈을 반짝이며 항공 점퍼를 벗었다. 날씨가 평온하고 좋다더니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날씨는 더웠다. 그러니 점퍼를 벗어서 가방에 넣는다는 핑계가 좋을 것 같았다.
“버스 타고 가면 되겠지?”
자연스럽게 말을 걸면서 그의 어깨에 걸린 제 백팩을 가져오자 에반이 발걸음을 멈췄다.
“나 기다려 주는 거야? 고마워.”
캐리어 위에 백팩을 올려놓고 점퍼를 정리해서 넣는 동안 기다리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는 싱긋 웃으며 듣기 좋은 말을 던졌다.
“버스 타지 말자. 날도 덥고 짐도 있고 귀찮은데 그냥 택시 타.”
자신의 항공 점퍼까지 들어가 부풀어 오른 백팩을 어느새 낚아채고는 어깨에 걸친 에반이 먼저 걸어갔다.
“야! 내 가방 내놔.”
제 백팩을 자연스럽게 가져오기 위해 날씨 핑계 대며 점퍼까지 벗었는데, 더 묵직해진 가방이 그에게 가 버렸다.
“됐어. 빨리 오기나 해.”
“근데 택시 타는 건 반칙 아니야?”
“뭐가 반칙이야? 너 받은 종이에 이용해야 하는 교통편 적혀 있어? 그냥 주소 있고 오후 2시까지 찾아오라는 거였잖아.”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거리에서 같이 움직이는 피디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에반은 어느새 택시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있었다.
“그래도 보통은 대중교통 타고.”
말로는 그를 말렸지만, 조금 늦게 그의 옆에 선 시우는 에반이 자신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어 버리는 것을 저지하지 않았다.
“진짜 이렇게 편하게 가도 될까?”
조수석에 타신 카메라 감독님이 뒤로 돌아 자신들을 찍고 있었지만, 시우는 작은 목소리로 에반에게 물었다.
“공항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꼼짝 못 하는 것보다 몰리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먼저야. 휩쓸리면 골치만 아프지. 그리고 마음대로 해도 돼. 정말 안 되는 일이면, 내가 택시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어떻게든 안 된다는 의사를 밝혔을 거고.”
틀린 말은 없었기에 시우는 입술을 삐죽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시로 검색창 최상위에 노출되는 그의 입출국 사진이 떠올랐다.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그곳을 벗어나던 모습에 비해 조금 전엔 누군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흘깃거리는 몇 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지금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면, 아마도 자신은 떨거지가 되어 뒤에 남을 것이다. 슈퍼스타 에반이 중요하지, 이름을 밝혀도 누군지 모르고 한참을 생각해도 몰라보는 자신이 중요할 리가 없었다.
방송까지 마음대로 하라는 에반의 조언이 떠오르자 시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게 가능한 거야? 이 바닥에서 제법 긴 시간 굴렀지만, 에반이 말한 경우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과한 시선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방송을 마음대로 해 본 적도 없다. 꼭두각시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방송에서 액젓을 희석한 음료를 먹으라고 할 때도 도로 뱉을지언정 입에 머금고 있어야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도 뛰어내려야 했고, 무서워서 소리 지르며 주저앉으면서도 끝까지 가야 했다.
“예쁘다.”
복잡한 서울의 한강과는 전혀 다른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지자, 시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하고 걱정이 가득했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차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렸다.
시우는 밤을 좋아했다. 자정을 넘기면 정신없이 돌아가던 세상은 점차 조용해졌다. 그리고 끊임없이 어두워지던 밤은 새벽을 기점으로 어스름하게 밝아 왔다.
그 어둠과 미명의 사이 아주 짧은 찰나의 그 시간을 좋아했다.
늦여름 밤.
동트기 직전의 그 어두움과 고요, 서늘함이 좋았다.
이곳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그 분위기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혼자라도 다시 오고 싶다.
고요하게 흐르는 강을 따라 유유자적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 옆으로 흔들리는 낮은 풀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고풍스러운 다리는 이렇게 스쳐 지나가며 보는 것이 아닌 그 위를 두 발로 걷고 싶었다.
“에반. 여기는 밤이 더 이쁠 것 같아. 저 다리에 불도 들어오겠지?”
자신의 질문에 돌아온 건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찰칵거리는 사진 찍는 소리였다.
“나중에 보러 가자.”
몇 번 더 사진 찍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러 가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우는 차창을 닫고 제멋대로 날린 머리를 정리하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 방송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안정감을 주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정하게 말했다.
처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부터 너무 달콤했다. 환한 미소도 그렇고, 지금도 착각을 일으킬 만큼 말 그대로 꿀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될까?”
진짜 3초맨 아니랄까 봐.
오메가였다면 순식간에 엄청난 착각이나 사랑에 빠졌겠지만, 시우는 지극히 평범한 베타였다.
“안 되면 다음에 같이 오면 되지.”
시우는 순간적으로 ‘내가 왜?’라는 말을 할 뻔했다. 하지만 그 말 대신 숨 쉬는 것이 꼬여 잔기침만 뱉어 냈다.
“오늘 일정 알아?”
난감하거나 좀 그런 상황엔 가장 대중적인 말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게 눈칫밥을 먹으며 이 세계를 기웃거린 시우가 배운 것이었다.
“도착 장소가 숙소 같으니까 다 같이 인사하고 방 정하면 저녁이겠네. 그리고 밤엔 뭐 친목 다지기 이러면서 게임 시키겠지? 이 피디님 방송 대부분 그러니까. 그나저나 코코는 요리 잘해?”
시우에게 부담을 주던 그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원한 대로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혼자 산 세월이 얼마인데, 열여덟 살부터 자취를 했던 시우였다. 그룹으로 멤버들과 같이 살기도 했고, 지금처럼 혼자 살기도 했다. 어쨌거나 혼자 산 시간만큼 일취월장한 것 중 하나가 요리였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순 있어.”
어디서든 튀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다. 함부로 잘한다는 말을 하는 것 또한 좋지 않다. 시우가 이번 촬영에서 세운 목표는 단 하나였다. 튀지 않고 눈 밖에도 나지 않고. 그저 화려한 알파, 오메가를 보필하며 무사히 촬영을 끝내는 것이었다.
“도와줘.”
“응?”
“나 요리 못하거든. 멤버들이 부엌에만 들어가도 쫓아내서. 그러니까 혹시 내가 밥 당번 되면 네가 좀 도와줘.”
“넌 여기 세 번째잖아. 어딜 다시 가고 싶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시우는 정말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피했다.
“너랑 가면 어디든 좋을 거 같아.”
시우는 여전히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흘깃 보고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