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우진이 자리를 비우고 나서도 디오클레이우스와 옥타비아는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옥타비아는 현숙하고 자애로운 여인이었다.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는 디오클레이우스에게는 처음부터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우진의 아내로 정략혼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눈치가 있어서 우진이 일부로 자리를 비운 것의 의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략혼이라고 해도 굳이 왕이 직접 할 필요는 없다.
나라의 중요한 요직에 있는 사람을 대신 내세워서 정략혼을 추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이 그 대상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상 거의 정답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옥타비아님. 어째서 그날 이렇다 할 호위도 없이 야밤의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겁니까? 저희 파라디소스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 가도 그런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디오클레이우스의 말 대로였다.
고래부터 대부분의 범죄는 밤에 이뤄진다.
아무리 치안을 잘 지키려고 해도 태양이 지고 나면 범죄자들은 기회를 노리기 시작한다.
21세기에 어떤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일이 뭐냐고 물으니까 대답한 것이 밤이 늦은 시각에도 홀로 다니는 여성들이 많은 것이 가장 놀랍다.
라는 말을 했다.
자신의 고국에서는 여성이 그 시간에 돌아다니면 무슨 짓을 당해도 별 말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현대에서도 여성이 밤을 돌아 다니는게 위험한 나라들이 즐비하다.
고대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오죽 할까?
밤에는 가능하면 안 돌아다니는게 보통이고 만약에 돌아다닌다고 하면 엄중한 경비나 보호자와 함께 행동해야 했다.
여성 혼자서 야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 크게 위험한 행동이었다.
“음···, 사실 사절단에 앞서서 저는 먼저 시라쿠사에 상단과 동행하여 도착해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랬죠?”
“·······앞으로 제가 살 나라를 한 번 제 눈으로 차분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제 동생에게 제가 무리한 부탁을 했던 것이죠.”
“···········.”
디오클레이우스는 어떤 의미로는 이 여자도 꽤 대담한 짓을 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파라디소스에 관해서 이런저런 설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로마와는 적대적이지만···. 그래도 영웅왕 진 전하의 일화와 그분을 보필한 전설적인 인물들은 많이 알고 있죠.”
디오클레이우스는 저절로 가슴이 쫙 펴졌다.
우진을 보필한 전설. 이라는 말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디오클레이우스는 문자 그대로 초창기에 로마를 탈출 할 때부터 함께 했던 초기 멤버였다.
이 파라디소스에서 영웅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유일하게 반말을 하는게 허용되는 어떤 의미로는 치외 법권 적인 존재.
그게 디오클레이우스였다.
마음에 든 여자가 자신에 대해서 호의적은 얘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기분 좋았던 그였다.
사실···. 로마와 파라디소스의 관계를 생각할 때 파라디소스의 영웅담이라는 것은 대부분 로마로서는 반갑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인간들 대부분은 영웅담에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비록 자신들이 패자나 악역으로 등장하는 영웅담이라고 해도 그 영웅 자체에게 동경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영웅왕 전하를 직접 보고는 제법 놀랐답니다. 저희 나라에서는 발을 한 번 구르면 땅이 진동하고 갈라질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지니신 분이라고 했는데···. 저렇게 평번한 분인지 몰랐죠.”
우진의 체격은 지극히 평범했다.
키는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근육이 우락부락한 다른 전사들과 달리 우진의 경우는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 근육질이라고 할 만한 몸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분들 소문도 많이 들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님은 원래 영웅왕 전하와 대등한 위치였지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고결한 영웅이라고 했고, 그리고 이미 전사했지만 굴족의 영웅이라고 불린 크릭서스님이나, 그리고 영웅왕의 오른팔이라고 불려서 지금은 이집트에 있다는 마시르님···. 연약한 여자인 저로서는 모두 동경의 대상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나요? 그···. 굉장히 오래 전부터 영웅왕 전하와 함께 한···.”
“음···. 다른 사람은··. 아!!”
“···········.”
“이 나라의 왕비이신 세체니님도 영웅왕 전하와 함께 고락을 같이 하고 역경을 넘어온 분이시죠. 같은 여자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나요?”
그냥 자기 이름을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옥타비아의 입에서 듣고 싶은 모양이다.
“다른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디오클레이우스라는 남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예. 그 남자···.”
“전 그 사람만큼은 정말 싫습니다”
“··············.”
“왜? 왜? 너만 싫다는데?”
디오클레이우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우진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로마인들이 파라디소스의 인물을 다 싫어한다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다.
아니 딱 잘라서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우진 본인만 싫어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어째서 디오클레이우스만 꼭 집어서 싫다고 한단 말인가?
우진의 물음에 디오클레이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내가 물어봤지.”
“어째서 그··. 디오클레이우스라는 사람만 싫다는 건가요?”
디오클레이우스의 물음에 옥타비아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듣기로 그 사람은 못 말리는 난봉꾼에 항상 입에 술을 달고 다니는 주정뱅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뭔가가 뜨끔 하는 디오클레이우스였다.
“얼마나 여자를 많이 밝히는지 그 사람에게 하룻밤 노리개로 전락하고 눈물로 밤을 지새운 여자들이 파라디소스의 여자들 중에 반은 된다고 할 정도더군요.”
“하하하···. 그건 제가 알기로 좀 과장 같은데요···. 그런데 그 소문 근원지는 혹시 아시나요?”
“음····, 다소 과장이 붙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역시 어느 정도는 본인에게 원인 제공이 있는게 아닐까요?”
“·············.”
양심에 털이 수북하게 나도 거기에 아니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디오클레이우스였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 그러고 보니 아직 자기 소개가·····.”
디오클레이우스는 인생 최대의 핀치에 몰렸다.
거기까지 디오클레이우스의 설명을 들은 우진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런이런···. 완전 끝났군. 그래서 거기서 도망 치기라도 한 거야?”
우진의 말에 디오클레이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진, 난 절대로 어디서도 도망가지 않아.”
“전쟁터 아니면 믿기 힘든 말이지만··. 뭐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난·······.”
위기의 핀치 속에서 디오클레이우스는 옥타비아를 향해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스파르타쿠스라고 합니다.”
“어머 당신이? 반갑습니다. 스파르타쿠스님.”
“··············.”
“··············.”
무겁게 침묵하는 둘 중에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우진이었다.
“야 이 병신아!!!!! 거기서 스파르타쿠스 이름이 왜 나와!!?”
“왜? 왜? 왜? 그럼 나보고 거기서 뭘 어쩔까?”
“잘은 몰라도 스파르타쿠스 이름 대는건 최악이지.”
“난 패닉에 빠졌었다고?”
“잘 하는 짓이다!!!”
결국 우진과 디오클레이우스는 거하게 한 판 붙었다.
잠시후.
한참을 투닥 거리던 둘은 일단 진정한 후에 우진이 말했다.
“어쩔 거야? 너 시작부터 관계를 거짓말로 시작하면 어떻게 해?”
“나도 몰라!! 그러니 지금 여기서 너 기다리고 있잖아?”
“나? 날 기다려서 뭘 어쩌게?”
“넌 왕이잖아. 내가 곤란하면 어떻게 좀 해줘.”
“그거 명백하게 내 업무 권위 밖이거든.”
“큭, 무능한 왕 같으니라고·····.”
“········생각 같아서는 한 판 더 붙고 싶지만 일단 참는다.”
“·····좋은 생각이 있다.”
“그게 뭔데?”
“스파르타쿠스 공작한테 연락해서 나하고 이름 바꾸자고 하는 거야. 그럼···.”
“첫째, 그게 통한다고 생각하면 넌 상 또라이야. 둘째, 스파르타쿠스도 화나면 무섭다.”
“···········제길.”
“이제 난 몰라. 할 수 있는건 다 했으니까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
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디오클레이우스가 우진의 다리를 분잡고 말했다.
“안 돼. 넌 나 도와야 해.”
“웃기지마. 여기까지 했는데 뭘 도와!!?”
“한 번만!!! 한 번만 좀 도와 주라.”
“싫다니까?”
“한 번만!!”
“싫다고 했잖아!!!”
둘이서 그꼴로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끼어든 사람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알려진 여인.
바로 클레오파트라였다.
“·····진, 당신 여자를 더 들이지 않겠다는 말은 했지만, 설마하니 남자를 들이려는 것은 아니겠죠?”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
하필이면 우진과 디오클레이우스의 타이밍도 딱 맞아 떨어져서 클레오파트라의 눈만 가늘어 지고 있었다.
“그럼 디오클레이우스 공작이 제 남편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이라고 연발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래요?”
클레오파트라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우진과 디오클레이우스는 자신들이 얼마나 오해의 소지가 막연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둘은 일단 떨어진 후에 어쩌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설명했다.
둘의 설명을 다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냥 진 당신이 여자에게 명령하면 되잖아요? 디오클레이우스 님하고 결혼하라고.”
“그건 좀····.”
“당신은 여자에게 너무 무뎌요.”
“클레파트라 전하···. 음, 저도 그렇게는 좀 내키지 않습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여자니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와·····.”
“계집애들····.”
클레오파트라의 한 마디가 지중해 최강 클래스 두명의 심장을 깊숙하게 꿰뚫었다.
“어쩔 수 없죠. 저한테 맡겨요.”
클레오파트라가 전면에 나서주자 디오클레이우스는 죽은 부모라도 되살아 난 것처럼 기쁜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저한테 맡겨요.”
그녀는 그렇게 당당하게 단언했다. 뭐 어떻게 하려는 건지 우진은 약간 불안해했지만 디오클레이우스는 마냥 좋다고 싱글벙글 하고 있다.
‘뭐,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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