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운명과의 만남.>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세체니는 우진에게 라시에타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우진은 우진대로 그녀를 안심 시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중간에 끼어서 곤란할 일은 하지 않을 테니.”
“···감사합니다. 진.”
세체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진이 강제로 그녀를 안는다고 하면 그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우진이 기꺼히 그녀의 순결을 지켜준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 후 그녀는 우진의 뒷바라지를 극진하게 했다.
우진의 옷을 빨고 작지만 우진의 방을 청소하고 그가 돌아오면 사근사근하게 식사 시중을 들고는 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안마하면서 피로를 풀어주기도 하면서···.
실제로 우진은 라시에타와 섹스를 하고 있을 뿐.
세체니와 정다운 부부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체니는 우진에게 와인을 따르며서 말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시죠? 시합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래···. 무슨 시합인지 모르겠지만 주최자가 큰 돈을 지불한 모양이야. 나하고 디오클레이우스가 동시에 출전 하는 모양이야.”
“····설마 둘이서 싸우는 것은····.”
“그건 아니야. 나하고 디오클레이우스가 힘을 합쳐서 어딘가 다른 지역의 선수들과 싸운다고 하더군.”
우진의 말에 세체니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녀가 알기로 디오클에이우스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가 적이 아니고 한 편이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 둘이 손을 잡으면 주피터가 상대라도 문제 없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명령에 의한 수동적인 관계가 시작이었지만···. 이미 그녀에게 있어서 우진의 존재는 무척이나 커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남자로 말이다.
“카푸아?”
“그래···. 우리가 출장 시합을 가는 장소래.”
“카푸아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잖아?”
“아니야. 그렇게 말고 다른 의미로 기억하고 있는 장소야.”
우진은 디오클레이우스와 검을 마주하면서 카푸아라는 이름을 되새겼다.
뭔가···. 카푸아라는 이름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걸까?’
우진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은 들었지만 이내 신경 꺼 버렸다.
어차피 생각난다고 해서 뭔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검투사인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되었든 가서 이기는 것이니 말이다.
“2대2 매치라니 좀 특이하기는 하네···. 내 발목 잡지마라.”
“크크···. 걱정하지 마셔. 나 혼자 두 놈 다 상대 할테니 넌 편이 누워 자도 될 거다. 진.”
우진의 코치를 받아서 일취월장한 디오클레이우스는 최근에 로마 검투사들 중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로 불리면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확실히 난 놀아도 될 지도····.’
우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훈련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며칠 후··.
덜컹 거리는 마차의 창살 안에서 우진과 디오클레이우스는 서로 대화를 나눴다.
“원정 시합이라니···. 돈을 제법 많이 받았나봐?”
“그렇게 말이야. 요즘 거기 비가 안 온다고···. 기우제를 겸하는 의미로 시합을 하는 거래.”
“신에게 제사라···. 그럼 돈 좀 되겠군.”
로마인들··. 아니 로마인들에게 국한 할 것 없이 고대인 들은 미신을 무척 잘 믿었다.
현대인들의 잣대로 봤을 때는 미신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신앙이었다.
더구나 이 시대에는 아직 고대 그리스의 올림푸스 신들을 실제로 신봉하고는 했다.
그래서 그들은 검투사들의 장엄한 피를 바쳐서 비를 부르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놈의 마차는 승차감 좀 어떻게 못 하나? 카푸아에서 싸우기 전에 엉덩이에 불 나서 죽겠다.”
“편하게 마차를 타고 가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
우진의 말 대로였다.
지금 우진이 향하는 행렬에는 수십명의 가드들이 우진을 호위하듯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저 두 발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앞줄의 마차에 파르티스가 타고 있고, 그 옆으로는 말을 타고 있는 몇몇 가드들이 있고··.
그 외에 50여명에 달하는 나머지 가드들은 대부분 두 발로 묵묵하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따로 시중을 드는 목적을 가지고 온 노예들은 한 술 더 떠서 발에 족쇄를 차고 걸어야 했고 말이다.
하지만 우진과 디오클레이우스는 이번에 중요한 시합의 메인 이벤트 선수로 불려 나가는 귀한 몸이다.
컨디션을 망치면 안 되기에 이렇게 마차에서 편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디오클레이우스도 말은 투덜 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법 감사하고 있었다.
“진···. 고맙다.”
“뭐가?”
“그냥···. 네가 날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난 오늘까지 살아 있지도 않았을지 모르잖아?”
디오클레이우스의 말에 우진은 피식 웃으면서···.
“싱겁기는···. 그걸 뜬금없이 갑자기 말하기냐?”
“생각 났을 때 말해야 하지 않겠어?”
“그걸 두고 사람들은 사망 플레그라고 부르지.”
“··············?”
“네가 모르는 말이야. 신경쓰지 마.”
“넌 가끔 어려운 말을 해. 네 고향에서 쓰는 말인가보지.”
“그래···. 그런 셈이지····.”
우진은 눈을 감고 자신이 살아왔던 21세기의 지구를 떠올렸다.
그 시절에는 당연했던 그 수많은 문명의 해택들···.
장담컨대 대한민국 보통 서민이라고 해도 로마의 대귀족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
그런 당연했던 수많은 것들이 이제야 그리워 지는 우진이었다.
‘언젠가 돌아 갈 수 있을까?’
새삼 고향 생각을 하니 기분이 울쩍해 지는 우진이었다.
그리고 디오클레이우스는 그런 우진을 보고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가 눈치 없다고 해도 지금의 우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던 자신은 모르겠지만 자유롭게 살다가 로마군에 점령 당하고 노예로 잡혀온 자들은 종종 저런 슬픈 눈을 하고는 했다.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 하는 눈빛을 말이다.
카푸아는 나폴리에서 약간 떨어진 도시였다.
기본적으로 사연이 좀 많은 도시이기도 했다. 카푸아에는 세 가지가 유명했다.
장미, 도축, 그리고 검투사.
이 도시는 비대하고 부유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발언권이 거의 없는···. 마치 환관과도 같은 도시였다.
거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216년. 카르타고와의 전쟁인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푸아는 동맹인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의 편에 섰다.
한니발의 수완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로마와의 트러블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로마에게 이 카푸아는 제법 골칫 거리였다.
기원전 211년.
로마는 카푸아의 수복에 성공하고 그 도시의 자치정부를 없애 버리고 로마의 총독을 파견했다.
배신자들에게 대한 나름의 복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다시 일어선 카푸아는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역대 어느 시대 보다 더 큰 부유함을 자랑했다.
이 도시는 금속세공업과 직물업의 중심지였고, 로마의 약제와 향수 생산의 요충지였고 곡물 생산량도 풍부했다.
그리고 로마 수도에 공급되는 돼지고기 양고기등의 80%가 이 카푸아에서 생산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카푸아가 부유한 이유는 이 땅이 유럽 전체를 뒤져도 가장 축복받은 환경을 지니고 있는 땅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남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있었고 기후도 농사를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에는 초록이 무성하며 비가 내렸가 개는 것을 반복하고는 했다.
유럽인들은 이곳을 캄파니아 펠릭스 라고 했다.
번역하면 행운의 평야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 행운이라는 것은 노동력으로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관점을 배제한 의견이다.
로마시대의 대부분의 대도시가 그랬지만 이 카푸아를 지탱하는 노동층 역시 대부분 노예였다.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포함해서 유럽의 각지를 점령하고 얻어온 노예들이 이 카푸아에서 곡식을 만들고 일을 하며 이 도시를 살찌운 것이었다.
인간은 배가 부르면 그 다음으로는 즐거움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 카푸아에서 검투사가 발달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로마에서 200km떨어진 이 도시는 당시 가장 유명한 주도로였던 아피아 가도와 라티나 가도로 연결 되어 있었다.
덕분에 교통의 편리함을 이용해서 많은 로마인들이 이곳에 와서 검투를 즐기고는 했다.
어째서 로마에서 즐기지 않고 여기까지 오느냐 하면···. 신중한 로마인들이 검투사를 로마의 안에 대량으로 양성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우진과 디오클레이우스는 로마의 안에서 검투사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규모가 작은 양성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레마이오스 양성소의 인원은 총 30명도 되지 않았다.
카푸아에 비하면 그 규모가 무척 작았다.
이 도시의 양성소에는 많게는 100명부터 적게는 60~80명 까지 검투사를 양성하는 양성소가 수십개는 난립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은 여기서 운명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내가 그네우스 콘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라고 하오.”
“레마이오스 파르티스라고 하오.”
짤막하게 자기 소개를 줄이는 파르티스를 보고 바티아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하고 있었다.
“어디···. 저 창살안의 인물이 죽음의 그림자와 동방의 암살자요?”
동방의 암살자라는 호칭은 우진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우진 스스로는 별로 반기지 않았지만 그가 싸우는 모습이 워낙에 조용조용 하다 보니 로마인들이 멋대로 붙인 별명이었다.
“그렇소···. 그쪽의 선수는 누구요?”
“여기 데리고 왔소. 내 뒤편의 두 남자가 당신들의 검투사들을 장사지낼 인물이지.”
“훗···. 누가 누구를 죽일지는 가 봐야 아는 일이지.”
둘의 사이에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
기본적으로 검투사가 죽으면 주최자 측에서 나름 값을 치러주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검투사의 가치보다 훨씬 낮게 책정 되는게 보통이었다.
즉, 검투사의 죽음은 양성소의 주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바로 손해로 이어졌다.
그래서 승률이 좋고 생존률이 좋은 검투사가 많은 돈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생존률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번의 목적은 그저 시민들의 유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뭄이 든 카푸아에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신성한 의식에 가까웠다.
피를 바쳐서 비를 부른다는···.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이 멍청한 시대의 멍청한 인간들은 대부분 믿고 있는 진실을 위해서 어느 한쪽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었다.
“어디···.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카푸아의 챔피언들을 한 번 봅시다.”
프라티스의 말에 바티아투스는 의기양양하게 뒤편에 대고 말했다.
“크릭서스, 스파르타쿠스. 이리 와 봐라.”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이 들린 순간··.
우진은 눈을 번쩍 떴다.
스파르타쿠스.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로마시대에서 로마인이 아니면서도 어지간한 로마인들 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인물이다.
아마도 고대 로마에서 그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을 뽑으라면 시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네로 정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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