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Epilogue9
“다 되었사옵니다, 전하.”
“어어, 그래…….”
옷시중을 마친 키슬크나 유례없이 근사한 예복 차림이 된 페란스나 둘 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라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특히나 키슬크는 지난 이틀 동안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포알 같았다.
가뜩이나 시종장과 페란스 1세의 약혼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번 혼인식을 계기로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겨났다는 게 궁인들의 평이었다.
이틀. 단 이틀이었다.
페란스 1세가 발정기를 마치고, 혼인식까지 주어진 시간이 이틀이었다.
그나마 원래 계획은 하루였는데 페란스가 하루를 넘게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억지로 하루가 늘어난 것이었다.
처음에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 남작으로부터 이틀 뒤 혼인식을 치르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키슬크는 그냥 웃었다.
이틀 안에 왕실, 그것도 훗날 위스타드의 역대 왕 중 가장 위대한 왕이라 불릴 페란스 1세의 혼인식을 치를 수 있는 가능성은 숫자 0으로밖에 표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래서 이 인간이 발정기를 한번 보내더니 미쳤구나 싶어서 헛웃음이나 지어 줬다.
그러다 오 분도 되지 않아 페란스가 그 말도 안 되는 혼인식을 허락했다는 얘기마저 들은 뒤로는, 영혼을 절반쯤 잃은 사람이 되어 알아듣지 못할 통곡을 해 댔다.
페란스는 혼인식 날 제 발로 걷기 위해 침대에 누워 근육통 약을 먹어 댔고, 키슬크는 울면서도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짧은 다리로 궁성 안을 부리나케 뛰어다녔던 이틀이었다.
이틀 안에 주요 귀족들을 전부 초대해 불러 모은다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혼인식은 제시간에 도착한 귀족들만 참석하는 것으로 하고 대신 피로연을 열흘간 열기로 했다.
세상에 그런 해괴한 왕실 혼인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페란스 1세의 혼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길이길이 얘깃거리로 남을 것이다.
“저언하…….”
마지막으로 페란스의 왼쪽 가슴에 붉은 백합 모양의 브로치와 새로 만든 블루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나란히 달아 준 키슬크가 떨리는 손을 떼어 냈다.
오늘 페란스는 눈이 부셨다.
도무지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콜더스트 남작의 안목이 좋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키슬크는 혼인식이 끝나기 전까지 화가를 고용해 혼인식 예복을 입은 이 모습을 반드시 초상화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왜 울고 그래.”
페란스가 손등으로 키슬크의 뺨을 툭 건드렸다.
키슬크가 화들짝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자칫 예복에 얼룩이 남을지도 모르옵니다.”
“아, 그런가.”
이런 날에도 제 모습에 별 생각이 없는 게 페란스다웠다.
“그럼 울질 말든가. 남 혼인식에서 왜 울고 그래.”
“신이 어찌……. ……크흐흡!”
안 울려고 했는데, 그만 반대로 눈물이 터져 버렸다.
당황한 페란스가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다. 손수건을 꺼내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혼인 예복에 주머니가 달려 있을 리 없었다.
키슬크가 오열하면서도 한사코 뒤로 물러섰다.
“신을 건드리지 마시옵소서! 얼룩이 집니다!”
“나 참. 그게 그렇게 비장하게 할 말이야? 알았어. 울든 말든 내버려 둘 테니까 가만히 있기나 해.”
“크흑, 저언하!”
키슬크는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나오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서럽고 억울하고 아쉽고 분통이 터지고 뭘 자꾸 뺏기는 것 같고 그랬다.
“아니, 제발. 울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까 좀 천천히 울어. 물이라도 마시겠어?”
“아니, 아니옵니다……. 크흐흡, 전하께서 드디어 혼인식을……. 그러나 이틀은 정말 너무하였사옵니다, 전하. 다른 이도 아니고 제가 시종장으로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어찌 그런 일이……. 크허어, 전하아…….”
페란스가 빙긋 웃었다.
“알아. 이틀간 고생했다는 거. 그런데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며.”
“아니, 준비라는 게 예복 예물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옵니다!”
“그것도 알아. 수고 많았어.”
“크흐흥…….”
이틀 만에 치러지는 혼인식도 문제였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냥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난해하고 섭섭한 감정을 대신해 키슬크는 그냥 울었다.
페란스가 기어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혼인식이 네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이 혼인식이 아주 엉망진창은 아닐 거야. 적어도 내 예복은 근사하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전하아…….”
그건 그랬다.
키슬크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발목을 배배 꼬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정신없는 혼인식을 치른다고 해서 나나 왕실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야. 내 이름은 여전히 페란스 1세고 내 집은 이곳이다. 네가 내 사람으로서 할 일도 달라지지 않아.”
“전……,”
키슬크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을 홱 들어 올렸다.
그 말로 다 하지 못했던 섭섭함이 페란스의 말에 눈처럼 사르륵 녹아 버렸다.
그래, 문제는 혼인식이 치러지는 방식이 아니라 혼인 그 자체였다.
페란스의 혼인이 어쩐지 그를 떠나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을 것이다.
“알, 알겠……나이다, 크릅.”
키슬크가 주책맞게 콧물 먹는 소리를 내며 팔을 가슴에 대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어쩌면 그것은 페란스 왕자와 그가 홀로 지내 왔던 시절에 하는 마지막 인사일 것이다.
그 시절의 페란스가 무엇을 버티고 어떻게 인내했는지, 키슬크는 알고 있었다. 페란스는 그 시절을 제 손으로 끝냈고 페란스 1세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니 이 마지막 인사는 그 시절에 보내는 안도이자 경외였다.
“신은 이 궁성에서 전하와 함께 죽겠나이다.”
그 말에 페란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아주 오래 살아야겠는데. 보기보다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네.”
“야심으로 여기셔도 되옵니다! 신은 기꺼이 야심가가 되겠나이다!”
“알았어, 알았어.”
페란스가 마지막으로 손에 낀 흰 장갑의 단추를 점검했다.
“그런데 아직도 시간이 안 됐나? 대예배당의 종이 치기 전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는데.”
“신이 가서 확인하고 오겠나이다.”
키슬크가 막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왜 그렇게 넋 빠진 몰골이야?”
“……네? 아, 네. 네, 전하.”
조금만 더 저렇게 있다간 턱뼈가 빠질 것 같았다. 페란스가 한심함을 감추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아도 메넌은 제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부터 다물어. 침 흐르겠다.”
“그, 원래 예복이란 게 그런 겁니까?”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네가 봐도 괜찮은 모양이지. 내 약혼자가 안목이 좋긴 해.”
“그래서 혼인식을 하는 모양입니다. ……예복을 입은 걸 보려고.”
메넌이 꽤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페란스가 혀를 찼다.
“예복이 아무리 괜찮아도 생긴 것까지 달라지겠어? 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거야.”
“아니,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저는 전하께서 오늘 제게 화동 역할을 지시하셨다는 말을 듣고 따지러 온 건데…….”
그런데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화동 일 같은 건 까맣게 잊었다. 그냥 정신이 멍해졌다.
“아, 그건 로젠이 열 좀 받으라고.”
페란스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입술을 실룩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틀은 너무하지. 일부러 잠결을 노려서. 야비했어.”
“단주님이 그런 개수작을……. 아, 그런데 왜 그러셨는지 모를 수가 없겠습니다.”
“내 앞에서 지금 로젠 편을 드는 건가?”
“네? 아니, 그럴 리가요.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합니까. 그냥 전하께서…… 왜 이렇게 좋은 향이……. 아! 각인을 푸신 겁니까?”
그 말에 외려 페란스가 놀랐다.
“뭐야. 아직도 몰랐어? 덩치도 네게 입을 열지 않았나?”
그 대답은 로젠게인이 했다.
“네.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어…….”
페란스는 메넌이 들어오며 열어 둔 문으로 나타난 로젠게인을 발견하고는 잠시 숨을 멈췄다.
“너 지금 왜…… 아니, 너도 예복을…… 응, 혼인식이니까. 그런데 왜…… 아, 입단속을 시켰다고?”
“네.”
로젠게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꼭 제 심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메넌이 방금 전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젠게인이 그린 듯한 제 취향인 건 아주 오래된 일이었고, 이제는 저 얼굴을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사라졌다.
왜 더 잘생겨졌지. 뭘 어떻게 했기에.
예복을 입어선가. ……옷 한 벌 다르게 입었다고 이래도 되는 건가.
물론 로젠게인이 고용한 재단사가 들으면 억울하다면서 키슬크 옆에서 같이 울 말이었다. 그냥 옷 한 벌이 아니었다. 시침질 한 땀 박음질 한 땀까지 콜더스트 남작의 몸에 맞춰 맵시를 살리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 역작이었다. 저 옷에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한 달 동안 고민했으며, 신발은 두 달 동안 고민했다. 가슴에 달릴 카벨리카의 펜던트를 가장 찬란하게 북돋울 다른 장신구를 고민한 건 석 달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한 쌍의 예복은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보며 새삼 반한 것처럼, 로젠게인도 페란스를 보며 숨을 눌렀다. 눈앞에 메넌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울었을지도 몰랐다.
“각인을 핑계로 그 전에 전하를 뵙겠다고 할지 몰라서.”
로젠게인의 말은 메넌이 각인을 푼 모습을 보겠다며 혼인 전 페란스를 만나러 왔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간과 쓸개를 뽑아 들고 미친 구애를 하려고 들었을지도 모르니 미리 견제를 해야 했었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는 혼인식 당일에도 페란스를 메넌에게 보여 주는 게 아까웠다. 그런 인간에게 제 혼인식 화동을 맡기다니, 환장할 일이었지만 페란스가 원한다니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들였다.
“뭐,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남의 속도 모르고 메넌에게 혼인식 화동을 시킨 페란스는 이런 데서는 관대했다. 페란스의 다정함은 가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냥 제 심장이 너무 불시에 놀라는 일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너는 가서 꽃을 뿌릴 준비를 해라. 다른 화동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로젠게인이 들어서고 나서야 조금 제정신을 차린 메넌이 투덜거렸다.
“아니, 제가 이 나이에 화동이라니, 말이 됩니까?”
“전하의 뜻에 토를 달지 마라.”
“아, 정말. 두 분 다 평범한 인성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십시오.”
메넌이 불손한 말을 내뱉고 후다닥 사라졌다. 키슬크가 뒤늦게 불경함을 지적했지만 페란스가 그냥 웃어넘기라고 했다.
“전하. 때가 됐습니다.”
로젠게인이 팔을 내밀었다. 페란스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혼인식이 있을 곳은 왕실의 대예배당이었다.
“위스타드의 예배당은 좀 구닥다린데…… 혼인식을 해도 될 만하게 꾸며 놨겠지?”
로젠게인의 걸음에 제 걸음을 맞추며 페란스가 놀리듯 물었다.
“네.”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짧았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하는 말이니 의심은 필요 없었다.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단 하나 필요한 건 전하입니다.”
“무슨 소리야. 너도 있어야지.”
그 말은 로젠게인에게 덜컥, 심장이 주저앉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제 팔 위에 얹힌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는 전부, 죽어서 남게 될 영혼까지 전하의 것입니다.”
페란스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로젠게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직도 입술을 대고 있기에 페란스의 눈에는 정수리만 보였다.
……정수리도 잘생겼네.
오늘 혼인식이 제 기대 이상이 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벌써 혼인 서약이라도 하려는 거야? 아직 예배당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매 순간 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곁에 있을 때.”
무슨 말로 받아야 할지 몰라서 잠시 난처해졌다. 그가 제게 쏟아붓는 애정이 너무 크고 무겁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게 싫지도, 버겁지도 않았다.
자신도 그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고개 들어.”
“……뜻대로.”
로젠게인이 허리를 폈다. 이번에는 페란스가 먼저 걸음을 시작했고, 로젠게인이 걸음을 맞췄다.
마침내 눈앞에 예배당이 드러났을 때 예배당의 대종탑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시작되었다.
혼인식을 단 한 걸음 남겨 두고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잊지 않았지? 오늘 밤에 할 일.”
“네, 전하.”
오늘 그가 제게 각인을 하기로 했다.
“나도 할 거야.”
“……, …….”
로젠게인이 숨을 훅 들이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러나 곧 연달아 터지는 종소리로 인해 그 작은 소리는 묻혀 버렸다.
“가자. 해치우러.”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꽉 붙잡았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혼인식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