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Epilogue7
“남작님.”
시간이 한차례 흐른 뒤 알레프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팔을 놓아주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로젠게인은 얼굴을 가린 손을 끝까지 치우지 못한 상태에서 연금술사의 팔꿈치를 놓아주었다.
저건 뭐지.
그걸 보는 페란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지금 로젠이 굉장히…… 이상하게 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이제 정말 하겠습니다. 크흠, 큼.”
덩달아 어색해진 연금술사가 괜한 헛기침 소리를 내며 다시 채혈기를 들이댔다.
“아!”
이번에는 페란스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채혈기는 살갗에 닿지도 않았고, 누가 봐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성의 없는 비명이었지만 로젠게인의 반응은 빨랐다.
아직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주제에 그가 방금 전처럼 연금술사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뭐야. 엄살을 내가 아니라 네가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페란스의 말에 로젠게인이 연금술사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로젠게인은 이제 자리를 피하려고 들었다.
“어딜 가는데.”
페란스가 잽싸게 손을 뻗어 로젠게인을 붙들었다. 등을 돌린 그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귓불과 목덜미가 달아올라 있었다.
“……놓아주십시오.”
“너 같으면 놓겠어?”
“지금 굉장히…… 부끄럽습니다.”
“어, 그건 알겠어. 그런데 왜?”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닐 텐데요.”
“아니, 정말 모르겠어.”
로젠게인의 반응은 무척 신선했고, 덕분에 짜증도 사라졌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 대신 엄살 좀 떤 게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데.
“…….”
로젠게인이 대답에 앞서 한숨을 먼저 흘렸다.
역시나 페란스는 각인이 풀렸다는 자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자신이 열세 살처럼 굳어 버린다는 것도, 굳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바보가 된다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로젠게인은 자신이 페란스에 관해서라면 심각하게 멍청해진 탓에 채혈하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페란스를 피하기 위해 끌어다 댄 온갖 핑계가 이제는 바닥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피해야 했다. 피 좀 뽑는다고 자신이 유난을 떨어 대면 페란스가 반드시 눈치챌 것 같았다.
눈치는 챘는데 여전히 이유를 모른다니, 그게 더 난처했다. 페란스는 눈치가 빠른 것 같으면서도 어떤 쪽으로는 정말 둔했다. 그리고 페란스가 유난히 둔해질 때는 주로 자신에 한해서였다.
“채혈을 다 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둔하지만 집요했다.
페란스는 어떻게 해서든 대답을 하게 만들 것이다. 채혈을 거부하거나 페로몬을 흘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페란스는 요새 저라는 개구리를 향해 크기별로 돌을 던져 대는 취미가 생긴 듯했다.
“그럼 말해. 다 했어.”
“……네?”
로젠게인이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며 홱 등을 돌렸다.
연금술사가 붉은색 피가 담긴 채혈기를 손에 들고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레프가 하얀 솜조각으로 페란스의 팔에 약을 발랐다. 자신이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프지 않았습니까?”
“할 만했어. 네가 있는데 체통 없이 굴 수도 없고.”
“그게……,”
채혈이 싫다고 페로몬까지 써먹던 게 누구였던 걸까.
“다 했으니까 이제 말해.”
“…….”
억울하다는 말은 소용이 없었다.
저런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매 순간 숨 쉬듯이 반하고 있었으니까.
“피가 아까워질 것 같았습니다.”
“……뭐?”
로젠게인은 필요도 없는 체면은 버리기로 했다.
지난 일주일간 어떻게든 바보로 낙인찍히는 것만은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글러먹은 일이었다.
그럴 바엔 그냥 바보가 되는 게 나을 것이다. 아랫것들도 자신이 손쓸 도리가 없어졌다는 걸 알면 알아서들 입을 다물지 않을까.
“그래서 제가 이런 헛소리를 참지 못하면 전하께서 놀리실 것도 같았고.”
“그게……?”
“부질없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음껏 놀리십시오. 원하시는 만큼.”
로젠게인은 알레프의 손에서 솜을 빼앗아 들었다.
“다 발랐습,”
그리고 이미 조처를 다 한 상처에 공연히 약을 더 발랐다.
흰 살갗에는 침 굵기만큼 붉은 자국이 남았다. 역시나 아파서 눈이 쓰렸다.
입술을 대자 쓴맛이 혀로 넘어왔다.
“으, 쓸 텐,”
아랫것들이 옆에서 뭐라고들 조잘댔다. 어차피 제가 바보가 됐다는 말들일 것이다.
“아프지 마십시오, 전하. 더는 전하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와…… 진짜 놀리고 싶은데.”
페란스가 제 얼굴을 향해 중얼거렸다.
각인이 풀린 다음부터 페란스에게서는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는 좋은 냄새가 났다. 어쩌면 각인 때문에 비틀린 페로몬이 사라지며 원래의 체향이 드러나는 건지도 몰랐다.
하여간 그래서 페란스는 이제 매사 타인과의 거리를 신경 써야 했다.
물론 본인은 조금도 자각이 없을 테니 신경을 쓰는 것은 제 몫이었다.
“되레 뻔뻔하게 나오니까 놀리지도 못하겠어.”
페란스가 제 스카프 끄트머리를 쥐고 당겼다. 스카프가 목줄이 되어 제 목을 그에게 가져다 바쳤다.
“말해 봐. 지난 일주일간은 왜 그랬어?”
이젠 숨길 것도 없었다.
“같은 이유였습니다.”
“웃기지 마. 그동안은 채혈 같은 일이 없었잖아. 그런데도 너는 나를 계속 피했단 말이야.”
“채혈을 이유로도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데, 다른 이유로는 더 쉽습니다.”
“다른 이유?”
“예. 지금 전하께서 제 목을 죄고 계신 이런 일 말입니다.”
“이게 왜?”
글쎄.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페란스여서일 것이다.
그가 거침없이 저를 잡아당기는 게 좋았다. 초록 눈이 가까워졌고 숨결이 선명했다. 그가 제 몸에 무슨 짓을 하든 좋을 것이다.
“강렬해서.”
“……이런 걸 좋아했나?”
그러면서 설핏 구겨지는 미간이 좋았다.
“그 말에 새삼 제 취향을 의심하시는 전하께서 귀엽기도 하고.”
“너는,”
페란스가 입술을 작게 비틀었다.
“안 하던 짓을 할 때도 너답네.”
“칭찬입니까?”
“딱히 그런 건 아냐.”
그렇다니 유감이었다.
로젠게인이 손을 뻗어 페란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은 내게 그 자체로 명제인데.
그의 감정이 제 것과 달라 아쉽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게 안타까웠다.
당신은 나밖에 갖지 못할 텐데. 하자가 있는 상품을 갖게 돼서 어쩌지.
“더 잘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말을 들으려던 게 아니고.”
페란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안 놀릴 테니까 피하지 마. 짜증나.”
“그건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전하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제가 가까이 있으면 좋을 게 없습니다.”
“왜? 각인 풀린 내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덤벼들까 봐?”
“알파 페로몬이 혹시라도 주기에 영향을 끼칠지 모릅니다.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발정기를 치르시려면 고되니까요.”
“저것도 알파라며.”
페란스가 턱으로 연금술사를 가리켰다. 연금술사가 거참 자존심 상하게 하신다는 얼굴로 코끝을 실룩댔다.
“저 정도 페로몬은 괜찮습니다.”
“아니, 단주님까지.”
연금술사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무슨 심정인지 아는 알레프가 연금술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 건 말을 해 주면 좋잖아.”
페란스가 여전히 툴툴대며 로젠게인의 입술을 핥았다.
“말 안 하고 감추는 게 이젠 아예 버릇이 된 것 같아. 십이 년이나 했으면 됐지, 더 해야겠어?”
“회복 기간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라면 말씀드렸습니다.”
입술을 핥아 오는 혀가 너무 부드러웠다. 삼켜서 입 속에 넣어 굴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말 안 했잖아.”
찬란한 외모에 가려져 늘 한 박자 늦게 깨닫는 일이었지만, 페란스는 목소리가 근사했다. 적당히 낮고 적당히 느린 목소리는 위스타드어를 가장 우아하게 발음했다.
로젠게인이 그가 하던 것과 똑같이 입술을 핥았다.
“방금 전까지 저는 죽을 만큼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게 갑자기 괜찮아져?”
“더는 감추지 못하게 됐잖습니까.”
“아아, 그래. 그게 짜증난다는 거야. 감출 수 있었으면 끝까지 감췄을 거라는 점.”
……나는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길게 나의 하자를 숨겨야 하니까.
“이런 성격이라 송구합니다.”
“짜증나.”
콧등을 찡그리던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입술을 덥석 물어 버렸다.
입술 새로 페로몬이 새어들어 왔다. 로젠게인은 간신히 페란스의 혀를 밀어낸 뒤 속삭였다.
“……아직, 채혈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닥쳐.”
페란스가 키스를 이었다.
혀가 얽히는 것처럼 각자의 페로몬이 얽혔다. 공교롭게도 알파와 오메가였던 두 아랫것들이 몹시 난처한 상태가 되었다.
“크흠, 저희들은 이만 나가 보겠,”
인사를 하는 연금술사를 알레프가 잡아당겼다. 잔말 말고 그냥 나가자는 뜻이었다.
……탁.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용히 문이 닫혔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입술을 물어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이젠 알레프가 날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여유가 많으시군요, 전하. 다른 사람 생각도 하시는 걸 보면.”
“무슨 소리야. 알레프는 오메가잖아.”
“지금부터는 오메가건 베타건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지의 단추가 풀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페란스는 옷을 전부 입은 상태에서 바지만 허벅지에 걸리는 조금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다리를 벌려야 했다. 로젠게인이 성기를 삼켜 빠는 동안 페란스는 헛손질을 해 가며 겨우 상의를 벗었다.
그것도 별로 싫지 않아 이상한 일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