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19)화 (119/122)

119- Epilogue6

“그럼 하겠습니다.”

“아, 잠깐 잠깐!”

오만상을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페란스는 하겠다는 말에 의자를 홱 뒤로 밀었다.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조심하십시오.”

알레프가 등 뒤에서 의자 등받이를 홱 붙들었다.

페란스가 입술을 실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넘어질 건 아니었는데.”

“그랬을 겁니다.”

“너야 내가 넘어져서 뒹구는 걸 보는 게 더 좋지 않아? 안 잡아 줘도 된다는 뜻이다.”

“좋을 건 없습니다. 무엇보다 남작님께서 마음 쓰실 테고.”

“거짓말.”

페란스가 입술을 실룩였다.

“너는 나를 싫어하잖아.”

“아닙니다. 벌써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아냐. 싫어하는 게 맞아. 적어도 십 년 이상 쌓아 둔 증오가 그리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고.”

“그럼 전하께서도 저를 싫어하시겠군요.”

“나? 음……. 나는 그게……,”

탁탁!

페란스의 말을 끊은 것은 뭔지 모를 물건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였다.

“거참, 말이 참 많습니다. 네가 좋네 싫네 연애 놀음은 나중에들 하시고 팔이나 내미세요.”

페란스가 인상 쓴 얼굴을 칼을 쥐고 있는 인물을 향해 돌렸다.

“연애 놀음이라니. 그 말 당장 취소해. 내 약혼자가 듣기 전에.”

왕 앞에서 칼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히 평범한 인물일 리는 없었고, 지금 페란스가 쳐다보는 인물도 딱 그랬다. 턱수염을 길게 길러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꼴을 보면 한 이백 살쯤 먹은 마법사 같았는데, 의외로 얼굴은 잔주름 없이 팽팽했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네네, 취소할 테니 팔이나 이리 내미세요. 제가 그 말을 언제부터 한 줄 아십니까?”

“어이가 없군. 블루와렌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왕족에 대한 예의를 배우지 못했나?”

코웃음을 친 페란스가 알레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너도 뭐라고 한마디 해. 너와 나를 가지고 연애 놀음이라는데 모욕적이지 않아? 내가 알파래도 너 같은 오메가는 사양이다. 내 눈은 높다고.”

“제 눈은 뭐 낮은 줄……,”

발끈하려는 알레프를 팽팽한 마법사 같은 인물이 말렸다.

“그만.”

“……?”

“정신 좀 차리지? 너까지 휩쓸려서 어쩌자는 거야.”

“아……,”

알레프가 그때야 제 실수를 깨닫고 나직하게 혀를 찼다.

“저를 잘도 이용하셨군요. 팔을 잡겠습니다, 전하.”

알레프를 끌어들여 일부러 말을 늘린 건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수작을 들킨 페란스가 피식 웃다가 정색을 했다.

“안 돼. 불허한다.”

“해야 합니다.”

“왕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마라.”

“시끄럽습니다.”

알레프는 더 이상 같은 수작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가 소매를 걷어 올린 페란스의 왼쪽 팔뚝을 꾹 눌러 잡더니 팽팽한 마법사 앞으로 갖다 놓았다.

“옳지.”

팽팽한 마법사는 블루와렌의 새 약제사였다. 본인은 연금술사라는 명칭을 더 선호했는데, 그에 걸맞게 온갖 희한한 물건들을 만들어 댔다.

오늘 들고 나온 것은 채혈기였다.

원통 모양의 유리관 앞에 뾰족한 침이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저 물건을 제 팔뚝에 꽂아 피를 뽑겠다는 말을 들은 이후 페란스는 안간힘을 써서 저항하는 중이었다.

“아니, 잠깐, 좀……. 차라리 다른 걸로 하면 안 될까? 그래, 칼로 하자.”

끔찍한 굵기의 침을 보며 페란스가 이번에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레프가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작작 좀 하시라는 의미였지만 페란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연금술사가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칼보다 이게 낫습니다. 상처도 적게 나고요.”

“아니, 그 말을 누가 믿어. 침이 저렇게 굵은데.”

“지금 제 채혈기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하는 건 아니고……. 뭐 필요한 건 없나? 연금술을 연구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돈 필요하지 않아?”

“돈이야 단주님이 많이 주시긴 하는데…….”

연금술사가 은근슬쩍 끝말을 흐렸다.

페란스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내가 더 주지. 얼마면 되겠어?”

그러자 연금술사가 휙 뒷걸음질을 했다.

“아이고, 좀. 조심하십시오, 전하. 저도 알파란 말입니다.”

“아, 그랬어?”

연금술사의 실수였다.

페란스가 씩 웃으며 붙들리지 않은 오른손으로 연금술사의 옷자락을 잡았다.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그리고 스르륵,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레프가 펄쩍 뛰었다.

“전하, 좀! 체통을 지키십시오! 지금 채혈이 무서워서 페로몬을 이용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러고 있는데.”

“그렇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도 마시고요. 이 꼴을 남작님께서 보시기라도 한다면……,”

이미 늦었다.

“좋을 리 없지.”

어느샌가 로젠게인이 문틀에 기대선 자세로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엇, 남작님, 소리도 없이…….”

가장 눈치가 빠른 알레프가 연금술사의 팔을 홱 잡아당겨 페란스와 거리를 벌렸다.

페란스가 입술을 실룩였다.

“이제야 나타나네. 어디서 뭐 하다가?”

“옆방에 있었습니다. 알고 계실 거라 여겼습니다만.”

“알긴 뭘 알아. 코끝도 안 보이는데 뭘 알겠어.”

분위기가 묘했다.

페란스나 로젠게인이나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표시는 있는 대로 다 났지만, 둘 다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자 시선을 애매한 곳에 두고 있었다.

가운데 낀 알레프가 괜히 손으로 공기를 휘저으며 작게 물었다.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아니, 하던 걸 마저 해.”

“그게……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작게 속삭여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페란스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 그래. 그럼 되겠네. 네가 없으면 나도 채혈 안 해.”

연금술사가 입을 벌렸다.

“무슨 애도 아니고……,”

황당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로젠게인은 몹시 곤란했다.

“필요한 일입니다, 전하.”

“누가 몰라. 그래서 무서워 죽을 것 같아도 억지로 참아 보려고 하는 중이었잖아. 그런데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옆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데?”

말이 거친 이유는 페란스의 심기가 그만큼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각인을 풀고 난 지 일주일.

페란스는 정말로 많이 회복이 되었다. 하시시의 독성을 치료하는 일도 진전이 빨라 지금은 마지막 채혈 단계에 있었다. 피에서 독성이 보이지 않으면 연금술사는 이제 더 이상 해독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이나 좀 찌우는 일만 남았다.

당연히 페란스는 아침부터 들뜬 상태였고, 로젠게인도 그러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로젠게인은 지난 일주일 동안 그랬던 것처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일주일 전 정사가 꿈처럼 가물가물했다. 로젠게인이 대는 핑계는 이해했다. 몸이 회복되는 시기고, 괜히 무리하게 만들어서 회복 기간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말도 동의했다.

그렇다고 기를 쓰고 피할 것까지 있나.

그게 페란스의 불만이었다.

내가 무슨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눈만 마주치면 덮칠 것 같냐고. ……뭐, 발정기가 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야 근래 들어 몸 상태는 내내 괜찮았고, 덩달아 기분도 몹시 좋았고, 무엇보다 각인이 풀려 사실상 일주일 내내 발정기나 다름없이 성욕이 들끓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과 로젠게인이 눈치를 주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아니, 그리고. 그러면 뭐 어때서.

한때는 로젠게인도 각인 반응을 아랑곳없이 덤벼들던 때가 있었다. 한두 번이긴 한 것 같지만, 어쨌든.

각인만 풀리면 사람을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 것처럼 굴던 인간이 일주일 내내 금욕을 강요하는 이중성에 화가 났다.

각인이 풀리던 날에는 그렇게 귀엽게 굴었으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어쩌다 마주치면 애새끼처럼 귓불이 벌게졌으면서.

페란스가 다시 생각해도 짜증난다는 얼굴로 로젠게인을 노려보았다.

“대답 안 해?”

“……화가 나셨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채혈은 잠깐입니다.”

“잠깐이니까 너도 참으라고. 와서 앉아. 진짜 화내기 전에.”

“…….”

로젠게인은 머리가 지끈대는 것처럼 이마를 짚어 대다가 결국 몸을 틀어 페란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거,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연금술사가 채혈기를 들고 물었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에게 시선을 둔 채 답했다.

“해.”

“이번에도 막…… 이상한 수를 쓰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페로몬을 풀었던 게 꽤나 곤혹스러웠는지 연금술사가 이런 말을 덧붙이며 채혈기를 페란스의 팔뚝에 가져다 댔다.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침이 막 살갗을 찌르려던 시점이었다.

“아니, 잠깐.”

“……?”

“…….”

“……. ……?”

연금술사와 페란스와 알레프가 비슷한 표정이 되어 로젠게인을 쳐다보았다.

로젠게인이 눈가를 찌푸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옆으로 드러난 살갗이 붉었다.

방금 전, 페란스에게 채혈기를 찌르려던 연금술사의 팔꿈치를 붙든 것은 로젠게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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