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 Epilogue5
세 번째로 정신을 잃기 전 페란스가 무슨 말을 중얼거리긴 했다. 하지만 곧장 몸에 경련이 일어났고, 코피가 터지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듣지 못했다. 코피에 이어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페란스를 눕혀 피를 뱉어 내게 한 다음 호흡을 확인하는 일로도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출혈이 멎자 호흡도 안정이 되어 몸을 닦고 잠옷을 입혔다. 한밤중에 불려온 키슬크와 궁정의들도 샛노래진 안색을 조금 되돌린 뒤 돌아갔다. 로젠게인은 페란스가 편안히 잠드는 것을 질리도록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그때가 새벽이 지난 시간이었을 것이다.
각인 반응을 생각하면 제 방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로젠게인은 페란스의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변명을 만들어 침실에 남았다.
섹스의 끝은 늘 비슷했다. 늘 각오를 했어도 죄책감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침대 옆에 바싹 붙인 의자에 앉아 선잠이 든 게 두어 시간 전이었을 것이다.
……뭐지.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좋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포근해졌다. 누군가 제 몸에 구름을 덮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던, 낙원에서나 날 것 같은 향이 구름에서 맡아졌다.
꿈인가. 끝내주는데.
로젠게인이 무의식중에 작게 웃으며 손을 뻗어 구름을 잡으려고 했다.
구름의 감촉은 의외로 평범했다. 궁에 머물 때 그가 페란스에게 종종 덮어 주던 양털 담요와 비슷했다.
“아, 움직이네. 일어난 거야?”
페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젠게인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순간 너무 눈이 부셨다. 로젠게인은 초점을 잡기 위해 눈매를 찡그렸다.
눈이 부신 건 페란스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페란스를 바라보던 로젠게인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전…… 하?”
페란스가 제 뺨을 만지작대며 말을 걸어 왔다.
“왜 여기서 잔 거야. 불편하게. 일어나. 침대에 누워.”
“다 잤습니다. 전하께서는 언제……,”
습관대로 등을 곧게 펴던 로젠게인이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이 다 깬 줄 알았다. 페란스가 먼저 눈을 떠 의자에서 잠든 자신에게 담요를 덮어 주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꿈인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페란스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보였으니까.
아아, 진짜 좋은 꿈인데.
로젠게인이 피식 웃으며 페란스의 어깨 너머로 날개를 찾았다. 지금 이 모습이라면 페란스의 등에는 나비 같은 날개가 달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페란스에게 말했다.
“전하. 좀 돌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날개를 구경하고 싶은데.”
“뭐? 날개?”
페란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제 이마를 툭 쳤다.
“잠이 덜 깼군. 어서 일어나라니까. 제대로 자.”
페란스가 움직이자 그 말도 못 하게 좋은 향이 뭉클 번져 왔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했다. 이대로 이 향에 잠겨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안 일어나는 건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페란스를 끌어안은 채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있었다.
“아……. 향이 너무 좋아서.”
처음에는 너무 좋아 그저 충격적이었는데, 이렇게 맡고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페란스의 페로몬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페란스에 관해서는 미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머리가 향 두 개를 섞어 버린 듯했다.
“아……. 네가 그러는 걸 보니 알겠어. 역시 달라진 모양이야.”
페란스가 제 머리칼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것도 이상했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페란스를 처음 보았던 열세 살 때처럼.
페란스가 물었다.
“내 향은 무슨 냄새야?”
“음……. 천국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 냄새라고 하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 놓고 보니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다.
“천국의 주인에게서 나는 냄새일 것도 같고. 아니, 그것도 좀……,”
“그만. 그만하면 됐어.”
페란스가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귓불이 발긋했다.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하는 페란스는 본 적이 없었다. 이런 향이 나는 페란스도 처음이었다. 방금 맡은 냄새를 사람으로 빚어 놓으면 그게 페란스일 것이다.
쑥스러운 듯 뒷목을 긁적이던 페란스가 이렇게 물었다.
“뭐, 좋다니 다행이네. 마음에 든다는 소리지?”
로젠게인이 턱을 갸웃거렸다.
“마음에 든다는 말을 쓸 단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더,”
“아니, 됐다니까. 안 들어도 될 것 같아.”
페란스가 또다시 입을 막았다. 로젠게인은 아무 생각 없이 몸이 시키는 대로 페란스의 손바닥을 핥았다.
“아니, 좀,”
페란스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손을 떼어 냈다. 로젠게인은 재빨리 멀어지는 손을 붙잡아 살갗을 핥았다.
“……이상한데.”
꿈이라 감각이 다 뒤섞였는지 살갗에서도 향이 났다. 기가 막힐 정도로 좋은 향이라 살이 맛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뇌리에 박혀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일어나. 이번에도 안 일어나면 화를 내겠어.”
“……전하께서 전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페란스를 몽롱하게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댄 로젠게인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사실 일어나면 꿈이 깨질 것 같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다행히 두 발로 일어섰는데도 꿈은 깨지지 않았다. 로젠게인이 다시 페란스를 끌어안았다.
“꿈처럼 아름답습니다.”
“흐음……. 그 정도야?”
페란스가 피식 웃으며 제 뺨을 툭툭 쳤다.
“그래서 네가 잠이 덜 깬 것처럼 구는 모양이네. 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이것도 신선한데. 평소에는 못 보던 모습이잖아. ……아, 그런데 기분 나빠 해야 할 일 같기도 하고.”
뺨을 두들기던 손짓이 좀 더 짓궂게 변했다. 페란스가 꼬집는 것처럼 볼을 잡아당겼다.
“각인을 깨기 전에는 네 눈에 내가 그저 그랬다는 건가?”
꿈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머리가 느리게 굴러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제 눈에 페란스가 그저 그렇게 보일 일은 없었다.
그가 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한 일이 그것이었다. 페란스가 더는 찬란하게 보이지 않는 일.
“그럴 수는 없고, 그럴 일도 없습니다.”
“그럼 지금과 비교해서 어땠다는 건데?”
“그 질문은 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꿈이니까…….”
“아, 지금이 꿈이야? 그래, 그렇다고 쳐. 그래서 지금하고 각인을 깨기 전은 어떻게 달랐는데?”
“각인을 깨기 전에는……. ……각인?”
로젠게인의 눈이 조금 느린 속도로 벌어졌다. 페란스는 그것마저 우습다는 듯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네가 이러니까 진짜 재미있는데. 좀 더 해 봐. 꿈이라서 뭐가 어떻다고?”
“……전하?”
두 손이 페란스의 얼굴을 붙잡았다. 더듬듯이 만지고 새기듯이 감촉을 확인했다. 페란스가 웃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만하면 안 되겠어? 이젠 좀 아파.”
“각인이…… 풀렸습니까? 그러니까, 어제?”
“나도 몰라. 갑자기 몸이 이상해져서…… 뭐라고 해야 되지. 몸이 확 찢기는…… 아니,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그랬는데 네 페로몬이 정신없이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했어.”
“그게……,”
“네 반응을 보니까 그게 맞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
“아……. ……하, 하아.”
긴장을 놓고 터져 나가던 한숨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로 바뀌었다.
“하, 하하…… 하아.”
온갖 감정이 뒤섞인 채 쏟아져 나왔다. 페란스가 제 목을 꽉 그러안은 채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속삭였다.
“응……. 이제 됐어. 이제 괜찮아.”
“…….”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로젠게인은 이를 꾹 물고 자칫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함을 참았다. 페란스가 자신을 미친 사람처럼 보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거짓말처럼 다 괜찮아졌어. ……네가 있어서.”
“…….”
그 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로젠게인이 무릎을 휘청이자 페란스가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둘이 함께 넘어졌다.
쿵!
의자 다리에 뒤통수가 부딪쳤다. 페란스가 제 몸 위로 넘어지도록 신경 쓰다 벌어진 사고였다.
“저런. 괜찮아? 안 다쳤어?”
페란스가 허둥지둥 로젠게인의 뒤통수를 살피려 들었다. 그가 페란스의 손을 잡아 그대로 제 몸에 바싹 끌어당겼다.
“괜찮습니다. 전부 다.”
“아……. 그래, 괜찮아.”
페란스가 웃었다. 각인을 벗어난 얼굴이 구름을 베어 먹는 것처럼 달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누운 채 키스를 했다.
둘 다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 바닥도, 이 자세도 모두 괜찮았으니까.
각인으로 시작된 모든 비극이, 각인이 풀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전부 괜찮아졌다.
남은 것은 성대한 혼인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