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16)화 (116/122)

116 - Epilogue3

페란스의 말이 이어졌다.

“스물여섯 살이 아니라 열세 살의 네가. 나도 열여섯이 되어 있었고……. ……좀 미친 소리로 들릴 거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 하시시 때문에 생긴 환각이나 그런 건 아니니까. 억제제를 먹기 전에도 나는 스물아홉 살 때 죽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어.”

……스르륵.

손금에 고였던 식은땀이 살갗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숨을 쉬는 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행이었어. 네가 각인하기 전에 눈을 떠서. 가장 최악의 일은 피한 거잖아. 그래서 네가 나를……,”

말을 마치기 전 로젠게인이 페란스를 끌어안았다. 두 손이 땀투성이였다. 축축한 손으로 페란스를 안는 순간 자신이 그에게 얼룩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자신은 그에게 무엇일까.

그게 전부 사실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꿈이 아니라 전부 페란스가 겪은 일이었다.

로젠게인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이라 여길 때에도 페란스를 대하는 자신의 모습은 혐오스러웠다. 콜더스트가의 비극은 페란스의 잘못이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페란스를 잃을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멍청하게도 자신은 페란스가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재각인은 자업자득이었다. 더 고통스럽고 더 비참하게 죽었어도 부족했다.

“……? 갑자기 왜 이래? 숨 막혀.”

“…….”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경매장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게 반드시 결혼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반지의 생김새보다 감촉이 더 익숙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죽기 전에 두 개 모두 삼켰으니 제 배 속 어딘가를 굴러다니다 함께 관에 들어갔을 것이다.

“설마 내가 지금 심각하게 미친 사람처럼 보여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닙니다.”

“정말 아냐?”

“아닙니다.”

페란스가 미간을 찌푸리는 게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럼 놔 봐. 너, 지금 좀 이상해.”

“…….”

그건 무리였다.

로젠게인은 페란스가 죽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손을 힘껏 움켜쥐고 있는데도 페란스는 사라졌다. 제 손 안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온기는 아무리 애를 써도 쥐고 있을 수 없는 모래알 같았다.

“너…… 혹시 우는 건가?”

페란스가 버둥거리며 제 팔을 벗어나려고 했다. 로젠게인은 더 힘껏 그를 안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 울어도 못 본 척해 줄 테니까 놔 봐.”

“……못 놓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을 또다시 잃을까 봐.

“다시 말하지만 나는 멀쩡해. 카벨리카의 피를 걸고 하는 맹세야. 안 미쳤어.”

“네. 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 ……아니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페란스가 몸에 힘을 풀었다. 두 손이 잠시 방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제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싫어진 게 아니라면 됐어.”

……믿지 못하겠어.

어떻게 페란스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을 다 겪고 나서도.

“전하께서는. 제가 괜찮으십니까?”

페란스가 눈을 깜박대는 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중절약. 그렇게 해서라도 저를 벗어나고 싶으셨을 텐데. ……제가 정말 괜찮습니까?”

“나도 늘 같은 걸 묻고 싶었어. 너는 내가 괜찮나?”

“어째서…….”

로젠게인은 뒷말을 씹어 삼켰다.

어째서 당신은 이런 사람인 거야.

그 순간 로젠게인은 의문을 포기했다.

어차피 의미가 없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페란스 카벨리카를 원했을 것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곁에 있었을 것이다.

죄책감이니 후회니 하는 말은 사치였다.

그런 감정을 붙들고 페란스에게 용서를 구걸할 여유는 없었다. 그가 허락하면 허락하는 만큼 머무는 게 전부였다.

“각인하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붙들고만 있는 시간이 흐른 뒤 로젠게인이 작게 속삭였다.

“뭐? 미쳤어?”

페란스가 거칠게 몸을 떼어 내 저를 한 대 칠 것처럼 바라보았다. 격렬해진 눈빛이 몸을 어지럽게 했다.

어째서 당신은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걸까.

“전하께서 말리셔도 어차피 하게 될 겁니다.”

“하긴 뭘 해. 절대 안 돼.”

“이미 됐을지도 모르고.”

“뭐? 그건 무슨 개소리야? 대체 언제?”

언제라고 물으면서 페란스가 당황한 얼굴로 제 뒷목을 더듬었다. 각인의 흔적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각인을 시도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로젠게인은 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페란스의 뒤틀린 페로몬에 반응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을 테니까.

“재각인은 의외로 쉽습니다.”

“재각…… 뭐? ……아니, 너는 나한테 각인하지 않았잖아! 분명히 말렸는데…….”

페란스가 눈동자를 흔들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동요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저도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이라면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겁니다. 재각인을 피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결국은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각인은 정해진 일이었다. 열세 살이 스물여섯이 됐을 뿐이었다.

“재각인이 됐다면…… 너는 그럼…… 내가 죽었을 때…… 각인 상태였다는 거야?”

“그러니 말리셔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로젠게인이 다시 페란스를 끌어안았다. 페란스가 터트리듯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가 귀를 적셔 왔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그건 허락이었다.

* * *

“좋아. 해도 돼. 하지만 내 각인을 푸는 게 먼저야.”

허락이 말이 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반지가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페란스는 각인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좋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어차피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로젠게인은 평소처럼 페란스의 잠옷을 입혀 주며 대꾸했다.

궁에 머물면서 어지간한 일은 제 손을 거치게 됐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페란스도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아직도 적응을 못 하고 있는 건 시종장 키슬크 하나였다.

“왜 상관이 없는데?”

잠옷 밑단을 끌어 내려 주름을 가다듬으며 로젠게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페란스의 과수면은 차츰 제자리로 돌아와 이제는 저녁에 자면 정오가 되기 전에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야위었던 몸에도 계속 살이 붙는 중이었다.

“재각인이 언제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페란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 각인이 됐는데 설마 그걸 모르겠어?”

“제가 알기론 그랬습니다. 재각인이 쉽다는 말을 안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안 믿는 건 아닌데……. 그래도 덩치가 옆에 있으니 한 번쯤은 확인을 해 줬을 법도 하잖…… 아, 잠깐만.”

침대를 향해 걷던 페란스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제 어깨를 붙들었다.

“그게 그럼……?”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한테서 자꾸 덩치의 페로몬이 맡아지던 게 그래서 그런 거였어?”

“제게서 알레프의 향이 납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궁에 머문 뒤로 알레프와 단둘이 한곳에 있던 적은 없었다. 그가 페란스의 곁을 비우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사실 페란스는 그가 죽기 전의 일을 꺼내 들고 있었지만 로젠게인은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시작되던 꿈은 요 일주일 사이에 거짓말처럼 멈췄다.

“말해 봐. 사실 덩치를 좋아한 게 아니었지?”

페란스가 양손으로 어깨를 힘주어 눌렀다. 아마도 눈높이를 맞추고 싶은 모양이었다. 말로 하면 될 일에 굳이 힘을 쓰는 이유는 애매했지만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말씀드린 줄 압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미친 생각이라고.”

“좋아한 적 없었어.”

제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페란스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그게 그런 거였어. 미친, 나는 왜 그 생각을 이제야 했지?”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가 사고를 멎게 만들었다. 로젠게인이 입을 다물고 페란스의 표정을 뒤쫓았다.

돌연 페란스가 제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오늘 해.”

“……네, 전하?”

“각인. 오늘 하라고. 허락하겠다.”

“전,”

각인을 하라는 말은 그 전에 전하의 각인을 풀라는 말이 맞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페란스가 제 아랫입술을 혀로 핥고 있었다.

“몸을 회복하시는 게 먼저입니다.”

“네가 둔한 거야. 괜찮아진 지 꽤 됐어.”

“연금술사가 아직,”

“그 인간이 매일 내 몸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연금술사는 약을 만들 뿐이었다.

페란스가 입술을 빨며 팔 힘으로 제 목을 끌어당겼다.

“해, 오늘.”

“……제가 그간 어떤 마음으로 인내했는지 모르시면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 게 나을 텐데요.”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페란스가 입술 새로 혀를 넣어 입 안을 한차례 훑었다. 아주 맛있는 걸 먹었을 때처럼 눈가가 만족감으로 느슨해졌다.

“잠이 줄어드니까 제일 먼저 이 생각부터 났어.”

페란스가 한쪽 다리를 로젠게인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허벅지 윗부분이 성기 아랫부분을 뭉근히 눌러 왔다.

“네가 너무 아무 생각 없어 보여서 말을 못 꺼내고 있었지만.”

“그게……. ……하,”

로젠게인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회할 게 뻔합니다. 다시 생각하십시오. ……다리도 그만 치워 주시고.”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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