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15)화 (115/122)

115 - Epilogue2

“아……,”

어느샌가 제 손은 페란스의 잠옷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잠옷을 걷고 속옷을 허벅지까지 끌어 내리던 중이었다.

“후우…….”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쉰 다음에야 손이 움직였다.

벗기던 속옷을 다시 입혀 준 뒤 잠옷을 도로 끌어 내리며 로젠게인이 페란스에게 이마를 마주 댔다.

“이렇게 곤란해집니다.”

“각인을 풀면 내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페란스가 싱겁게 웃으며 제 입술을 한 번 핥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당분간은 얌전히 있자고.”

저절로 눈썹이 찡그려지는 것을 로젠게인은 몰랐다.

“그런 분이 먼저 키스를 하는 건 경우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봐줘. 아쉬워서 그랬어.”

좀 전보다 열이 올라 발긋해진 뺨을 한 페란스가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는 것을 보니 그새 또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너도 더 자.”

각인 반응이 온다면서 페란스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이제는 정말로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회복되어 가고 있는 몸에 각인 반응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잠은 다 깼습니다.”

“아…… 그럼 붙잡아 두는 게 지루하려나. ……알았어. 깨어나거든 봐.”

“주무십시오.”

이마에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페란스가 눈을 감은 채 제 이마를 툭 건드렸다.

“가기 전에 키스해 주고 가.”

“……이상해.”

당신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일단 몸을 굽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페란스가 너무 말을 잘 듣지 말라고 중얼대며 웃었다.

페란스는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로젠게인은 각인 반응이 오지 않을 거리에 서서 숨을 죽인 채 페란스를 바라보았다.

페란스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만다리스가 내 부모를 죽였을 때의 나를 전부 겪고 난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한 짓을 알았다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싫을 텐데.

그럼 역시 아닌 걸까. 이건 그냥 오로지 나만을 위한 악몽인 걸까.

새벽이 아침이 되었다.

로젠게인은 쳇바퀴를 돌리는 작은 짐승처럼 내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 날 그가 주문한 결혼반지가 도착했다.

* * *

반지를 가져온 보석상은 기한을 맞추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앓는 소리를 해 댔다.

그가 보석함을 열어 페란스의 눈앞에 번쩍대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이댔을 때, 로젠게인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술렁대는 기분을 느꼈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을 만큼 훌륭한 다이아몬드라 했고, 그만큼 가격이 비쌌지만 페란스에게 그런 것을 신경 써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그랬다. 페란스의 손에 반지가 들리자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던 일이 비로소 이뤄졌을 때처럼 심장 위에 파문이 일었다.

“아, 생각은 했었지만 진짜 놀라운데.”

페란스가 싱긋 웃으며 반지를 들어 커다란 알을 안경처럼 눈에 대고 저를 향해 눈을 찡긋댔다.

“진짜로 이거였어.”

“놀랍다니요. 설마 전하께서는 이 신의 눈물이 전하의 결혼반지가 될 줄 모르고 계셨사옵니까?”

수선스러운 성격의 보석상이 과장을 보태 호들갑을 떨었다.

“신의 눈물?”

“이 블루 다이아몬드의 이름이옵니다, 전하. 이 광채며 결정이며 투명도를 보십시오. 신의 눈물이 아니고서는 이런 보석은 있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껏 대륙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 중 단연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최상의 물건이옵니다.”

“아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네. 원석을 봤을 때는 이런 빛깔이 나올 줄 몰랐는데.”

페란스는 반지가 마음에 드는 듯 이리저리 돌려보며 광택을 살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원석을…… 보셨다고요?”

보석상이 두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로젠게인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뒤 원석은 곧장 보석상에 보냈다. 그날 경매장에서 직접 원석을 들고 간 게 이자였다.

“전하께서도 경매장에 계셨사옵니까?”

“아…….”

페란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한 바퀴 굴렸다.

“꼭 그랬다는 건 아니고……. 원석을 본 적이야 많지. 반지가 잘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끼워 주겠어?”

페란스가 보석상의 어깨 너머로 로젠게인을 향해 반지를 내밀었다.

“…….”

로젠게인은 잠자코 반지를 받아 페란스의 손가락에 끼웠다. 반지는 살짝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치료를 마친 뒤 살이 붙을 걸 대비해 일부러 여유를 두었다.

“알이 너무 커서 그런지 무거워.”

반지를 낀 페란스가 웃으며 손등을 들어 보였다.

“매일은 못 끼고 있겠는데. 작은 걸로 하나 더 맞출까?”

“익숙해지시면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손끝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댔다.

입술 끝에 다이아몬드의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어쩐지 이 감촉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의 형태나 무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반지를 쥐고 수십, 수백 번 이렇게 생긴 손가락에 끼워 보는 상상을 했다는 것처럼.

그러다 끝내 삼켜 버렸던 것처럼.

“너도 껴 봐.”

페란스가 말을 하자 보석상이 재빨리 쌍으로 된 반지가 놓인 상자를 열어 두 손으로 고이 내밀었다.

그 반지를 집어 들어 로젠게인의 손가락에 끼우려던 페란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내 반지의 알이 더 크잖아. 네 것도 같은 크기로 하지 그랬……, 아니, 잠깐. 아무리 쪼갰다고 해도 이 정도면 너무 작지 않아? 나머지는 다 어디 간 거야?”

무언가가 심장을 때리는 듯했다.

페란스는 보지도 않은 보석의 원래 사이즈를 아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하나인 다이아몬드를 일부러 쪼개서 반지 두 개를 쌍으로 만들게 했다는 말은 물론 한 적이 없었다.

“매일 끼실 수 있도록 알은 너무 크지 않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사옵니다, 전하.”

그래서 다이아몬드는 두 개가 아닌 세 개로 쪼개졌다. 반지가 되지 않은 다른 한 조각은 그저 보석으로 남아 페란스의 새 왕관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아…… 그랬군. 그 말을 들으니 빨리 이 크기에 익숙해져야겠는데.”

페란스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었다.

적당한 치하를 받은 보석상이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자리를 떴고, 결혼식을 앞둔 커플은 똑같이 생긴 한 쌍의 반지를 낀 채 서로를 마주했다.

“……다이아몬드를 쪼갰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로젠게인이 물었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음? 그걸 왜 몰라? 빛깔이 완전히 같잖아.”

“원래 크기는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원석을 보신 적이 없습니다.”

“아…….”

페란스가 눈을 데구르륵 굴렸다.

“답해 주십시오, 전하.”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웠다. 손가락 사이에 반지의 단단한 테두리가 느껴졌다. 손가락을 풀면 페란스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처럼, 로젠게인은 힘주어 손가락을 얽었다.

“……나는 네가 일부러 이 다이아몬드를 구한 건 줄 알았는데.”

잠시 후 페란스가 한 겹 낮아진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은 걸 할 생각으로.”

“뭐가 같다는 말입니까?”

“반지.”

“그러니까, 무슨 반지와.”

“……. ……하, 젠장.”

시선을 피하던 페란스가 뜬금없이 욕설을 흘렸다.

“뭐야. 그땐 하도 태연하게 들어서 나는 너도 대강은 짐작하는 줄 알았는데. 반지에 쓸 보석을 예전과 같은 걸로 고르기도 했고.”

“뭐를 짐작한다는 말입니까.”

“……이 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페란스가 제 눈을 쳐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전하.”

로젠게인이 이에 물린 입술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냈다. 꽤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는 둘 다 익숙했다.

하지만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제 심장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전과 같다는 얘기가 그를 늪지에 세웠다. 아차 하는 순간 밑도 끝도 없는 곳에 삼켜질 것 같은 불안감이 번져 왔다.

신의 눈물이 등장한 건 포게논의 경매장이 처음이었다. 그 이전까지 누구도 그만한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가 존재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까 그들의 결혼반지 또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아만다리스가 콜더스트 가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이 페란스에게 각인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 같다는 말입니까.”

“그게……. ……내가 죽은 건 스물아홉이었어. 날짜로 따지면 한 달쯤 전이겠네.”

내내 망설이듯 입술을 질겅이던 페란스가 한숨을 내뱉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중절약이 잘못돼서……. 정말 죽은 건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눈을 떠 보니 네가 내 앞에 있었어.”

“…….”

쿵.

심장이 바위 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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