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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웨딩 (114)화 (114/122)

114 - Epilogue1

“……흣!”

로젠게인이 짤막한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어둠 위에 흩뿌려졌다.

“하아…….”

그가 땀으로 젖은 이마를 쓸어 올렸다. 살갗은 식어 차가웠지만 머릿속은 지끈 열이 올랐다.

악몽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아니, 더 심해진 듯했다.

페란스가 말했던, 실제로 벌어졌다면 너무 끔찍했을 그 일이 제 꿈이 되었다. 페란스가 죽고 난 뒤 혼자 겪었던 고통은 차라리 봐 줄 만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이전의 일들은 전부 악몽이라는 말이 모자랐다. 방금 전 꿈은 아만다리스가 페란스를 키사드 성에서 납치해 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미친…….”

별일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은 전부 계산이 된 행동이었으며 멀지 않은 거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페란스는 페로몬 쇼크가 왔을 뿐 무사했고, 그는 약간의 모험으로 알아내고자 했던 정보를 얻었다.

그런데도 이 악몽이 이토록이나 두렵고 끔찍한 건 그저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탓이었다.

“…….”

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주 깊은 마음 바닥의 반영이라 했다. 페란스가 들려주었던 그 엄청난 얘기가 제 마음을 파고들어 악몽이라는 잔상을 연거푸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한 가지 말이 안 되는 게 있었다.

페란스는 대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정인 것처럼 말했지만 가정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페란스에게 각인하고 아만다리스가 그 사실을 더럽게 이용해 먹었다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머릿속에 지옥이 들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결과를 지어 낼 일은 없지 않을까.

가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페란스에게는 그랬다.

가정이 아니라면 대체 뭘까.

거기서 생각이 턱 막혔다.

생각을 가로막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가정이 아니라면. 페란스가 겪은 일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제 꿈도 사실이라는 얘기가 됐다.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겠다며 페란스에게 했던 모든 짓이.

“……!”

갑자기 심장 끄트머리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로젠게인이 벌떡 일어나 침실 문을 열었다. 가운데 방을 지나면 그 옆이 페란스의 침실이었다.

끼이익.

근위대를 지나친 로젠게인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침실 문을 열었다.

페란스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페란스가 거기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질리도록 확인했다. 조용히 들려오는 숨소리가 심장을 식혀 주었다.

……잠은 글렀겠군.

한참 뒤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로젠게인은 커튼 틈새로 푸른 새벽빛이 번져 오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 페란스의 침대로 다가갔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앉아 침대에 턱을 얹고 페란스가 자는 얼굴을 지켜보았다.

요새 페란스는 잠이 늘었다.

중독 치료를 시작한 뒤 한두 번은 금단현상을 겪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졌다. 대신 잠을 잤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잠이 들어 다음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어난 적도 있었다. 연금술사의 말로는 몸이 빠르게 회복되는 과정일 것이라고 했다. 연금술사는 반쯤 미치광이 같은 인간이라 다는 신뢰할 수 없었지만, 제 눈에도 페란스의 얼굴에 뽀얗게 살이 차는 게 보여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료가 끝나면 그때 혼인식을 올리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혼인식을 해치운 다음 키사드 성에서 각인을 풀겠다는 계획이었다. 반지를 제외한 모든 준비가 이미 끝나 있었다. 페란스가 병적인 과수면 상태를 벗어나면 언제라도 혼인식을 치를 수 있었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 악몽은 그저 악몽 취급을 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누군가는 비겁하다 하겠지만 로젠게인은 제 악몽을 그대로 파묻어 버릴 생각이었다. 이 악몽이 불길한 망령이 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원치 않았다.

“……으음, 어?”

그사이 페란스가 눈을 떴다.

어제 낮부터 자기 시작했으니 한 번은 깰 만도 한 시간이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잠시 자는 모습을 뵈려고 들렀습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닙니다. 그저 뵙고 싶어서.”

로젠게인이 잠든 페란스를 확인하러 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이런 일을 페란스가 모르길 바랐다.

“이 시간에?”

“네.”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눈을 감겼다.

“더 주무십시오.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아……. 내가 요새 너무 많이 자서 그런 건가?”

“몸이 회복되는 중이라니 더 많이 주무십시오.”

“아니, 그건 그런데…….”

뭐라고 웅얼대던 페란스가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로젠게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라고 ……는 건 아니야.”

“네?”

작은 목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라고 너하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건 아니라고.”

아주 약간 커진 목소리를 낸 페란스가 헛기침을 했다. 쑥스러워하는 듯했다.

“하여간, 누워.”

페란스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옆자리를 비웠다.

“너도 더 자. 아직 아침이 이르다며.”

“……저는 다 잤습니다.”

유혹적이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잠이 들면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악몽이 걱정이었다. 페란스에게는 없는 일로 만들고 싶었다.

“시끄러워. 누워.”

페란스가 눈을 감긴 제 손을 치우고 입술을 비죽였다.

“너만 보면 다야? 나도 봐야 될 거 아냐.”

페란스가 걷잡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말을 했다.

“……그럼, 잠시만.”

로젠게인은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페란스의 옆자리에 누웠다. 페란스가 몸을 옆으로 돌려 제 얼굴을 마주했다.

“요새 좀, 미친 것 같아.”

뽀얗게 살이 오른 얼굴이 너무 예뻤다. 거세지는 심장 박동을 감추기 위해 로젠게인이 손을 들어 페란스의 머리칼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뭐가 말입니까?”

“과하게 자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막상 눈을 떠 보면 그렇게 오래 잔 것 같지도 않아. 새벽인 걸 보니 또 하루 종일 잔 것 같은데 느낌으로는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아.”

“몸이 더 자라는 말을 하는 것 같군요.”

“그런 건가……. 뭐,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널 일부러 안 찾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잤는지 감이 안 와서 그래.”

“제가 찾으니 괜찮습니다.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페란스가 눈가를 시무룩하게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평생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던 페란스가 별안간 팔을 들어 올렸다.

“이리 와.”

“네?”

“안아 줄게.”

“……이유가 있는 겁니까?”

“이유가 있어야 되는 이유는 또 뭐야. 내가 널 안고 있겠다는데.”

“…….”

오늘따라 페란스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사랑스럽게 굴 이유가 없는데.

로젠게인이 고개를 갸웃대며 페란스가 내미는 팔 아래로 몸을 집어넣었다. 페란스는 정말로 제 몸에 팔을 꼭 둘렀다.

“네가 말을 잘 들으니까 좋은데.”

벌써 반쯤 조는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렇군요. 염두에 두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내내 이렇게만 굴면 내가 더……. ……아니, 생각해 보니까 당분간은 이전처럼 네 멋대로 구는 게 낫겠어.”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대꾸했다.

“그러다 전하께서 화를 내시면 제 손해입니다.”

“당분간이라고 했잖아. 내가 좀, 적응을 할 때까지.”

“어떤 면에서 적응이 필요한 겁니까?”

“네가 너무 귀엽게 굴면 좀 그래.”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약간 밀어냈다. 로젠게인이 보란 듯 힘을 주고 버텼다.

“좀 그렇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냥 좀, 곤란하다고.”

페란스는 로젠게인을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그의 등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뭐든 과한 건 안 좋잖아. 나는 지금도 네가 좋은데 더 좋아질 필요도 없고. ……그런 건 가끔씩 해.”

“……이상한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페란스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가 팔을 움직여 페란스를 붙들고는 몸을 홱 돌렸다.

“읏, 뭐 하는 거야?”

자세가 바뀌었다. 옆으로 누워 안겨 있던 그가 페란스를 제 몸 위에 올려 단단히 밀착시키고 있었다.

두 손이 페란스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제가 해야 할 말입니다, 그건.”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안아 주겠다는 말 같은 걸 하시면 저도 곤란합니다.”

“아니, 나는…….”

몸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이렇게나 편리했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입술이 맞닿았다. 페란스가 피하지 못하도록 얼굴을 단단히 잡은 그가 불안을 놓고 아랫입술을 빨아 당겼다.

며칠 만의 키스였다. 이상할 정도로 빨리 정신이 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달았고 이상할 정도로 갈증이 났다.

“자, 잠깐,”

페란스가 말리려 드는 것을 무시했다.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신없이 혀를 얽어 입 속을 탐했다. 페란스가 제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희미하게 페란스의 페로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페란스가 아닌 누구에게서도 맡아 본 적이 없는 향은 그에게 각인과 다를 바 없었다. 향의 호불호를 떠나 제 몸을 부추기는 건 이 페로몬이 유일했다.

입술을 겹친 채 숨을 훅 들이쉬자 페란스가 조금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만.”

“전하,”

“각인 반응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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