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
“…….”
마티바의 지하에서 침실로 되돌아오는 동안 로젠게인은 달리 말이 없었다.
페란스가 말을 기다리며 멀뚱히 쳐다볼 때도 시선은 피하지 않았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침실로 돌아와 그가 가운을 벗겨 줄 때, 결국 참다못한 페란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말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젠장,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 아만다리스를 봤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실제로 벌어졌다면 너무 끔찍했을 그 일 말입니까?”
“……그래.”
어쩐지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페란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입술을 질겅였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었다는 거야. 만약 아만다리스가,”
“압니다.”
로젠게인이 성큼 앞으로 다가와 기울어진 턱을 붙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자신이 꺼내 놓은 비밀을 남이 다시 제 눈앞에 들이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이 버릇 좀 고쳐. 갑자기 덥석덥석 붙들지 좀 말라고. 그리고 뭘 안다는 건데.”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한 번도 지적하신 적이 없으셔서.”
페란스가 콧등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야 괜찮긴 해. 그렇다고 매번 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야. 상황을 봐 가면서 하라고. 그리고 대답은 안 하나?”
“……알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로젠게인은 턱을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푸른 눈이 집요하게 시선을 얽었다.
“제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을 로젠게인이 전부 이해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인했다는 거짓말로 아만다리스를 말리고, 그를 블루와렌으로 보내고 약혼으로 묶어 두었던 이유가 모두 하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가 엄지로 느리게 살갗을 문질렀다. 작은 동작이었지만 말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페란스는 그가 저를 보며 한 번도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일찍 말씀하셨다면 더 일찍 믿었을 겁니다.”
“그게……. 그럼 내가 쓴 편지는…… 그게 빨간 머리한테 쓴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어?”
“네. ……아,”
갑자기 로젠게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절대 놓아줄 것 같지 않던 턱을 놓더니 고개를 옆으로 훌쩍 돌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다.
“왜 그래?”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일이라 낯설었다. 페란스가 고개를 낮춰 그의 시야 안으로 파고들며 표정을 살피려고 애를 썼다.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갑자기 열이 오르는 거 아냐? 아, 너도 다쳤지.”
오히려 페란스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아, 일단 누워.”
“괜찮, 습니다.”
“시끄러워. 닥치고 누워.”
“괜,”
“어서.”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침대 위로 떠밀었다. 오히려 그게 상처에 더 자극이 된 탓에 로젠게인이 이를 꾹 물고 신음을 삼켰다. 페란스가 오해하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그것 봐. 아픈 게 맞잖아.”
“……그런 걸로 하겠습니다.”
“고집이야, 자존심이야. 아프다는 말 정도는 해.”
“…….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묘하게 허탈해 보이는 로젠게인을 향해 페란스가 싱겁게 웃어 보였다.
“거기 꼼짝 말고 누워 있어. 사람을 부를 테니.”
그렇게 돌아서려는 페란스를, 로젠게인이 손을 뻗어 훌쩍 잡아당겼다.
“엇,”
다음 순간 페란스는 로젠게인에게 안긴 채 침대에 눕게 되었다.
시간이 잠시 흐른 뒤 페란스가 먼저 입을 뗐다.
“내가 사람을 부르러 간다고 한 말 못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지금은 이게 더 필요합니다.”
보일 듯 말 듯 페란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있으면 각인 반응이 올 텐데.”
페란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압니다.”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끌어안듯이 문지르며 답했다.
“언제 시작되는지도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생각해 보면 각인 반응을 자신보다 더 신경 쓰는 사람은 그였다. 페란스는 각인 반응을 이유로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늘 거슬렸다.
“……뭐, 그러든가.”
다행히 각인 반응이 시작될 기미는 아직 없었다. 정수리를 간질이는 숨결은 부드러웠고 조금 빠른 듯하지만 고른 심장 박동은 몸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인 것 같아.”
섹스를 한 적은 있어도 한 침대에서 이렇게 안겨 있던 적은 없었다.
“네……. 십삼 년이나 걸렸군요.”
“뭐가?”
“이러는 게.”
입술이 이마 위를 눌렀다.
“그때부터 이렇게 자고 싶었습니다.”
“아…….”
십삼 년 전에는 나란히 누워 몸 어딘가가 닿지 않도록 애를 쓰며 잠을 청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가 신경이 쓰여 새벽이 다 되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잠이 드는 건 그날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그 역시 같은 순간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각인을 풀면…… 매번 이러고 있어도 된다는 말이겠네.”
갑자기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비로소 모든 게 정리가 됐다는 게 느껴졌다. 그 어떤 오해도, 미움도 없었다. 사라질 것들은 사라졌고 자신은 결국 로젠게인 알란드를 손에 넣었다.
남은 것은 각인뿐이었다.
“그 전에 중독을 치료하셔야 합니다.”
이마에 붙어 있다시피 한 입술이 말을 할 때마다 살갗을 간질이는 게 좋았다.
“연금술사라는 작자가 나는 약발이 아주 잘 듣는다고 했어. 몰랐나?”
“그래도 아직 다 회복되신 건 아닙니다.”
“금방 회복되겠지.”
로젠게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네……. 그래야 각인을 푸는 일도 빨라질 테니.”
“방금 든 생각인데,”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가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했다.
“지금, 해도 될 것 같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안 됩니다.”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머리를 감싸 안아 다시 제 품에 파묻었다.
“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네가 안 되는 건가? 상처가 다시 터지려나?”
페란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로젠게인이 이를 꾹 물었다.
“네, 그럴 겁니다. 그러니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중독을 치료하기 전까진 안 됩니다.”
“아……. 아쉽네.”
페란스가 입맛을 다시다 상처 위로 붕대를 감아 놓은 곳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더듬었다.
“여기지? ……너도 빨리 나아야 해.”
“전하보다 빨리 나을 겁니다.”
“지금 하는 걸 보면 안 그럴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각인 반응은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이젠 슬슬 이 품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페란스는 놓아달라고 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내 각인 반응이야 언제나 네가 먼저 챙겼으니까. 이번에도 알아서 하겠지.
이대로 잠을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따스한 공기는 한없이 느슨했고, 로젠게인의 팔 안에 몸을 말고 있는 것 외에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있잖아.”
“말씀하십시오.”
“내가 만일 잠이 들면,”
“네.”
잠시 말을 끊은 페란스가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로젠게인의 상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전하,”
로젠게인이 몸을 뒤로 빼며 페란스의 손을 잡았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놔. 아래까지 벗겨서 빨고 싶다고 하기 전에.”
“……. 부상이 보기보다 심합니다. 사실 운신이 어려웠습니다.”
“잘됐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뿌리치며 상의를 마저 벗겼다. 칼에 찔린 곳은 옆구리를 조금 비켜난 곳이었다. 단단히 감아 놓은 붕대 끝을 페란스가 조금 뜯어내 손에 쥐었다.
“내가 잠들었다고 함부로 이 방을 떠날 생각은 마. 그럴 것 같으면 도로 찔러 버리겠어.”
“……그러려고 벗기신 겁니까?”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
이어서 로젠게인이 피식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는 상처에 페란스의 손이 닿거나 말거나 조금 전처럼 다시 페란스의 머리를 감싸 안아 끌어당겼다.
“너도 자려고?”
힐끔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눈을 감고 있었다.
“네. 잠이 오려는 것 같습니다.”
“몸이 회복되려고 그러는 거야. 그럴 땐 자야 해.”
로젠게인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페란스의 목덜미로 파고든 그가 입술을 뒷목에 댔다.
“전하도 주무십시오. 만일 제가 잠든 사이에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드신다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갑자기 왜.”
이어지는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각인 정도는 각오하십시오.”
“뭐라고? 미쳤어?”
각인이라는 말을 들은 페란스가 정색을 하고 로젠게인을 밀쳤다. 하지만 로젠게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고 계시라는 겁니다. 이제 전하께서 계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너는 좋은 말도 섬뜩하게 하는 버릇이 있어. 별로 좋은 거 아니니까 고쳐.”
페란스는 버둥대는 걸 멈추고 고개를 편히 기댄 채 중얼거렸다.
“계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좋은 말입니까?”
“뭐, 나쁜 말인 건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서.”
로젠게인이 그 순간 폭소를 터트렸다.
페란스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고, 그가 턱을 붙들더니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키스를 시작했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겁니까.”
“너, 흡, 으……음.”
뭐라고 해야 될 것 같았던 말이 뜨거운 타액에 녹아 버렸다.
아직 남아 있는 일들도, 미세한 걱정도, 이제는 조금도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앞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흘러가겠지.
지금은, 살아 있으니까.
페란스가 두 팔로 로젠게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뜨겁게 얽혀드는 혀가 설탕처럼 달았다. 고맙게도 각인 반응은 오늘따라 느렸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