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
페란스가 숨을 훅 들이쉬었다.
“네가 거래라는 말로 포장한 그 미친 짓들이…… 그게 그냥 돌아오기 위해서였다고? 그냥 그저…… 나와 혼인하는 것만이 목적이었어?”
“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해가 가면서도 가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는데 믿을 수밖에 없었고 믿는 와중에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빨간 머리는 뭐야? 왜 데려다 놓은 건데? 앞뒤가 안 맞잖아.”
“그것도 답을 드렸습니다. 전하께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뭘?”
“제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전하의 곁으로 돌아오길 원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히 전하께서 살아 계시길 바랍니다. 제가 싫다는 이유로 제 제안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약속하신 대로 중독을 치료하고 각인을 푸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나머지 거래는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너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로젠게인이 잠시 눈을 감았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무언가를 연상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아 계십시오. 돌아오겠다는 제 바람이 전하를 해친다면 그런 바람은 버리겠습니다.”
“너……,”
꿈같았다.
꿈속에서 마르스티엘은 이름을 되찾는 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죽지 마십시오.
그 하나만 바라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자신도 간절히 살고 싶어졌다.
말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이유, 자신을 죽음에서 되돌려 다시 숨을 불어넣은 그들의 진짜 계약을.
페란스가 혼란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로젠게인의 어깨에 묻었다. 그대로 가만히 숨을 쉬고 있자 제각각으로 뛰던 심장 소리가 하나가 되었다.
거짓말처럼 혼란이 녹아내렸다.
페란스가 그에게 닿은 채 작게 속삭였다.
“그게 정말 네 바람이라면, 나는 기꺼이 너와 혼인하겠다. 대신 조건이 있어.”
로젠게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너는 무조건 믿어야 해. 그게 어떤 말이라고 해도.”
“믿는다는 걸 어떻게 보여 드려야 합니까.”
“보여 줄 필요는 없어. 믿으면 알아서 보일 테니까.”
페란스가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 네게 보여 줄 게 있다.”
“…….”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손을 잡았다. 몸을 일으키는 사이 그가 늘 목에 걸고 있는 열쇠가 찰랑, 존재감을 드러냈다.
* * *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차림새로 마티바 탑을 찾은 페란스를 맞이하는 간수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페란스의 옷차림에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근위대와 로젠게인뿐인 듯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죄수는?”
“아무 일 없습니다. 전하께서 오시지 않는 동안 끼니를 걸러야 했지만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군.”
철컹.
지하 2층, 가장 구석진 방 앞에서 페란스가 열쇠를 꺼내 들었다. 수십 번은 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넣어 돌리는 페란스를 보며 로젠게인은 또 한 번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설마 열쇠가 하나인 겁니까.”
“그래. 나만 가지고 있다.”
“…….”
그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나뿐인 열쇠를 페란스는 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강박적으로 숨겨야 하는 비밀의 존재를 로젠게인은 이제껏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철컥…… 끼이익.
철로 테를 만든 두꺼운 나무문이 힘겹게 열렸다. 그 틈새로 이제껏 맡아 본 적이 없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살아 있는 몸이 썩는 냄새가 지하의 습기를 품고 고여 있으면 이곳이 지옥일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들 만한 냄새가 만들어졌다.
“코를 막는 게 나을지도 몰라. 처음에는 나도 그랬어.”
“언제부터였습니까?”
“십이 년 전부터. 네가 나를 떠난 그날이겠군.”
“…….”
저벅저벅.
냄새에 발소리가 섞여들어 갔다. 페란스는 몸을 거의 로젠게인에게 맡긴 채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실 칼을 맞고 회복 중인 사람은 로젠게인이었지만 허리를 단단히 받친 팔에서는 조금도 그런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페란스도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어둑해서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감옥 안에는 사람보다 더 큰 십자가가 있었다. 가시관이라 불리는 고문대였다.
죄수는 가시관에 묶여 있었다.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있던 죄수는 발소리가 들리자 눈을 번쩍 뜨고는 우우, 꽉 막힌 소리를 내질렀다.
로젠게인은 죄수의 눈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여전히 팔팔하네.”
페란스가 인사를 하듯 철구에 눌려 있는 팔을 툭 쳤다. 죄수가 신음인지 욕설인지 알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로젠게인은 죄수가 혀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내 약혼자를 소개해 주려고.”
페란스는 경쾌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비틀려 보였다.
“누군지는 알아보겠어? 마르스티엘이다.”
죄수가 하나 남은 눈을 부릅뜨고 로젠게인을 쳐다보았다. 벌써 십이 년째 저 꼴로 갇혀 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날 선 증오가 그 눈을 희번덕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신기하지 않나? 네가 콜더스트 가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우지 않았어도, 그가 내게 각인하지 않았어도 또다시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는 게.”
“……전하?”
로젠게인이 저도 모르게 페란스를 불렀다.
페란스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의 손을 한 번 꾹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또다시 나의 약혼자가 되었다는 것도.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다는 소리겠지. 네가 선대 콜더스트 남작 부부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내가 애를 썼던 것과는 상관없이 남작 부부가 사고로 세상을 뜬 것처럼.”
“우…… 우!”
“십이 년 전 로젠이 사라졌을 때는 나도 믿지 않았어. 그러나 정확히 십이 년 뒤, 같은 날짜에 같은 이름으로 다시 만나면 믿을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우우!”
“네가 똑같이 한쪽 눈을 잃고 사지를 못 쓰게 된 것도 운명일 거야. 뭐, 지금은 마비가 된 건 아니라지만 일단 못 쓰는 건 맞으니까.”
“우우우!”
페란스가 다시 한번 로젠게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사이 식은땀이 났는지 손바닥이 차가웠다. 로젠게인이 죄수에게서 눈을 돌려 페란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죄수에게 하는 말은 사실 자신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달라진 손바닥의 온도는 페란스가 말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같은 방식으로는 죽지 않겠다며 버둥거렸지만 그게 정해진 길이라면 따라가겠다.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를 사랑해서 죽게 되는 게 내 운명이라 한다면 기꺼이 죽겠다. 그게 네게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이다.”
“우우!”
철컥, 철컥!
죄수가 몸을 흔들자 몸을 구속한 장치가 비틀리며 핏방울이 튀었다.
페란스는 그걸 보며 조용히 웃었다.
“혼인을 기념해 관에서는 꺼내 주지. 자비에 감사하도록.”
웃음을 지운 페란스가 비로소 몸을 돌려 로젠게인을 마주했다. 잡았던 손을 놓고 목에 건 열쇠를 벗은 페란스가 그걸 사슬째 로젠게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네게 주겠다. 첫 번째 혼인 선물이야. 이제 네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해.”
로젠게인은 목에 걸리는 섬뜩한 금속의 무게를 손으로 쥐었다.
“제게 주시는 걸 보니 누군지 알 것 같군요. 혹시 아만다리스입니까?”
페란스가 희미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아. 이렇게 빨리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죽이시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죗값을 치러야 했으니까. 이전에는 너무 가벼웠거든.”
“…….”
로젠게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전이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란스가 그를 한참 바라보다 손을 뻗어 눈가를 매만졌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아만다리스가 나를 속여 제게 각인하게 만들었다. 그걸 열세 살인 네가 알게 됐어. 아만다리스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콜더스트 가문에 누명을 씌우려고 했지. 여기까진 너도 아는 일이지?”
“네.”
“그런데 만약, 그 뒤의 일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해 봐. 아만다리스가 제 뜻대로 콜더스트 가문에 죄를 뒤집어씌웠으면 어떻게 됐을지. 남작 부부는 처형당하고 너는 추방당해 이름을 잃고 노예가 됐을 거야. 하나 더 보태서 네가 나한테 각인까지 했다고 치자고. 그럼 너와 나는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로젠게인이 제 눈을 만지는 페란스의 손을 쥐었다. 눈가가 단단히 굳어 이상해 보이리라는 것은 뻔했다.
“왜 그런 가정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성 안에 틀어박혀 그저 내 불행이나 저주하다 네 이름과 얼굴도 전부 잊어버렸다면. 그러다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으로 신년 연회에 나타난 너와 마주하게 됐다면. 그럼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
“…….”
꿈틀대던 눈매가 아예 굳는 게 손끝에서 느껴졌다.
“나는 너를 처음 본다고 생각했고, 사랑에 빠졌어.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도 모르는 채.”
“그게……,”
“결과가 좋을 리 없었지. 너는 내게 복수를 해야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네가 복수할 수단을 없애기 위해 중절약을 먹었어. 그리고 죽었다. ……어때.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면 너무 끔찍한 일이지 않아?”
페란스는 체온으로 철을 녹이려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로젠게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치자고. 너라면 아만다리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했을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꼴은 너무 과한가?”
“……아닙니다.”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손을 끌어와 입술을 댔다. 키스를 마친 뒤에는 손가락을 얽어 손바닥이 마주 닿게 만들었다.
“이것도 부족하다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선물로 주는 거야. 부족하면 더 하라고.”
로젠게인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되는군. 살려 두느라 애쓴 보람이 있었어.”
아만다리스를 죽이지 않은 건 각인 탓도 있었지만 로젠게인 때문이기도 했다. 아만다리스를 죽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로젠게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였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건 차차 생각하고. 일단 나가자.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감기에 걸리기 쉬워.”
그런 곳에 사람을 십이 년이나 가둬 둔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페란스는 진심이었다. 로젠게인이 여기에 왔다는 이유로 감기에 걸린다면 몹시 화가 날 것 같았다.
“저도 동의합니다.”
두 사람이 들어왔을 때처럼 나란히 감옥을 나섰다.
우…… 우우!
아만다리스가 들리지 않을 고함을 질렀다.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