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메넌도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댔다.
“단주님이 그러셨습니까?”
고개를 휙 돌려 주변을 살핀 페란스가 물병을 발견했다.
“물을 드시려고요?”
메넌이 눈치 빠르게 시선을 읽고는 물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잔을 받아 든 페란스가 그걸 그대로 확 던져 버렸다.
퍽!
“아니, 말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하마터면 맞을 뻔했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메넌이 목소리를 높였다.
“맞지 그랬나. 그러라고 던졌는데.”
“네?”
“그럼 내가 지금 얼마나 어이없어 하는지 알았을 거 아냐.”
역시나 메넌은 눈치가 빨랐다.
“그건 단주님께 하시는 말씀입니까?”
“닥치고 나가서 로젠을 데려와. 오지 않겠다고 하면 목이라도 잘라 와.”
“네?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수호자를 수호하는 몸입니다, 전하.”
“그래서 못 하겠다면 때려치워. 왕실 근위대장직을 주겠다.”
“전하……?”
“뭐 하고 있는데! 가서 잡아 오라니까!”
로젠게인 알란드는 십이 년씩이나 멀어질 수도 있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나 버리면 또다시 얼마나 되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끼익…… 탁.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찾으셨습니까?”
로젠게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옆방에 있었다.
“너……. 아니, 일단 나가.”
서로 엉킨 말을 메넌이 용케도 알아듣고 방금 전 로젠게인이 열었던 문을 냉큼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단둘만 있는 상황이 되었다. 페란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침대에 앉은 채로도 어지러울 수 있다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일단 가까이 와. 내 손이 닿는 데까지. 그래야 널 후려치고 싶을 때 드는 수고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뜻대로.”
로젠게인이 군말 없이 곁으로 다가와 침대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신발을 벗어. 양쪽 다. 양말도 벗어.”
“맨발이라고 해서 달아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히 신발을 벗으며 로젠게인이 이따위 말을 했다.
“그럼 다 벗든가. 속옷까지 싹 다.”
“그런 명령은 가급적 밤에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발로 떠날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로젠게인은 맨발이 되었다. 정말로 속옷까지 벗겨 놔야 하나 싶었는데, 얌전히 맨발이 된 걸 보니 제 말대로 당장은 사라질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긴 했다.
비로소 열이 한 겹 식었다.
페란스는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내게 해명해야 될 게 아주 많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지금부터 해. 거짓말로 얼버무리거나 거래가 어쩌고 하면서 입을 다물면 그때마다 후려치겠어.”
“……뜻대로 하십시오.”
대답은 고분고분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건 마르스티엘과 똑같았다.
너는 정말이지 빌어먹을 인간이야.
티로안까지 찾아갔을 땐 제법 반가운 척하더니 또 왜…….
“……제기랄.”
일단 욕설을 먼저 뱉어 낸 페란스가 제 머리칼을 잡아 뜯을 것처럼 움켜쥐었다. 죽었다가 되살아나도 자신은 그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좀벌레 같았다. 몸이건 머릿속이건 스멀스멀 갉아 먹히고 있었다.
“일단 이것부터. 빨간 머리는 왜 불러다 놨어?”
“선물이었습니다.”
“미쳤어? 그게 왜 선물이야.”
“보면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약속대로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 드리고 싶었고.”
“그러니까 내가 왜 빨간 머리를 보고 좋아해야 되냐고.”
로젠게인의 눈가가 찌푸려지는 것처럼 살짝 가늘어졌다. 그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페란스의 손이 머리칼을 놓게 만들었다.
“제 생각만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걸 방금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잘 믿기지 않긴 합니다.”
탓!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쳐 냈다.
“그렇게 얼버무리지 말라는 소리야. 너는 아직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어. 다시 대답해. 내가 빨간 머리를 보면 좋아할 줄 알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단순히 병문안이나 하라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자니 기분 나쁠 정도로 의미심장했다. 눈을 뜨자마자 봤다는 건 빨간 머리가 내내 제 침실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제 입으로 보지 말라던 인간을 데려와 침실에 단둘이 놔뒀다는 건 결코 단순한 병문안일 수가 없었다.
“저는 내내 이 약혼이 진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를 사랑한 적이 없으셨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로젠게인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난 다음에야 천천히 답을 시작했다.
“……. 대체 왜?”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대체 뭐가?”
“전하께서 제게 하신 모든 일이.”
페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왜?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기억하십니까? 제게 언제 처음 청혼하셨는지?”
로젠게인이 페란스가 뿌리친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기억한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아니요. 못 하실 겁니다.”
“기억하고 있어.”
“제가 전하를 호이엔 홀의 사냥용 오두막에서 발견한 그날 처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처음 만난 그날에…….”
로젠게인이 맞았다. 그를 처음 본 그날 꿈이라 생각해 청혼했던 기억을 페란스는 지금껏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요. 처음 만난 날이 아닙니다. 그 전날에도, 그 전전날에도 저는 전하를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손수건을 빌려드리기도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두막에서 뵌 날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그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제 생이 그날부터 시작했기에 그랬다.
“그런데 청혼을 하셨습니다. 몹시 아끼고 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열셋이라는 나이가 어려도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
페란스가 입을 다물었다. 저 상황에서 변명이 될 만한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저와 제 가문을 구하느라 최선을 다하셨고 그 덕에 저는 장차 전하와 혼인할 몸이 되었으니. 시간이 지나 제가 성장하게 되면 전하께서도 저를 약혼자로 대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아니,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내게도 그 약혼은 진심이었어.”
“그랬습니까?”
로젠게인이 쓰게 웃었다. 쓰다 못해 괴롭다고 느껴질 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게는 한 번도 연서를 보내 주시지 않았습니다.”
“매번 편지를 썼잖아. 그걸 배달하는 빨간 머리가 귀찮아할 정도로 많이 보냈는데.”
머리칼 사이를 파고드는 손짓이 다정했다. 너무 다정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뭉클 솟아올라 그것을 내뱉고 싶어졌다.
“하지만 연서는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발정기가 되면 목이 아프도록 내뱉는다는 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뭐……?”
페란스가 얼이 빠진 인간처럼 입을 벌렸다.
“너는 지금 그걸 연서라고 말하는 건가? 열세 살짜리한테 그런 편지를 쓰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그냥 미친놈이지. 너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을 거잖아.”
“마르스티엘은 열세 살이 아니었습니다.”
“마르스티엘은 당연히……. ……아니, 잠깐. 뭐라고?”
페란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러나 사실은 치명적이었던 실수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튀어나왔다.
“마르스티엘은…… 그러니까 마르스티엘은 당연히 네가…… 네가 아니라 빨간 머리였을 텐데……,”
“네. 마르스티엘에게는 쓰셨습니다. 보내셨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자, 잠깐. 내가……,”
당황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페란스는 감정이 북받칠 때마다 두서없이 휘갈겨 쓴 편지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버릴 수도 없어서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던져 놓은 편지들은 십이 년이 지난 지금도 무질서하게 뒤엉킨 채였다. 마르스티엘을 향한 제 감정도 그랬다. 복수를 위해 접근해 거짓 애정을 진짜로 믿게 한 그를 이해하면서 연민했고, 동시에 원망했다. 원망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그리워했다.
“내가 실수로…… 마르스티엘에게 쓴 편지를 네게 보냈고…… 너는 그래서…… 나를 떠났다는…… 그런 말이야?”
“그 시절 전하께서는 제 세상의 전부셨습니다.”
로젠게인의 담담한 목소리는 역으로 그가 이제껏 아주 많은 감정들을 하나씩 지워 왔다는 말을 해 주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을 두 눈으로 겪은 로젠게인이 달려간 곳은 페란스였다. 그를 안아 든 페란스는 복수를 맹세해 주었다. 부모의 죽음이 제 유년기를 끝냈다면 페란스는 그다음 세계의 시작이었다. 그를 지탱하는 것도, 부지런히 숨 쉬게 하는 것도 페란스였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페란스가 다른 알파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단순한 배신감이 될 수 없었다. 당시 그를 이루던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페란스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을 착각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편지들은 로젠게인이 아니라 마르스티엘에게 쓴 편지였다. 해명을 하려면 그의 이름이 원래 마르스티엘이었다는 말을 해야 했다.
“나는…….”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페란스의 반응을, 로젠게인은 다르게 해석했다.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들켜서 당황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와 제 제안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머리칼을 만지작대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다정함이 천성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헷갈렸다. 자신이 다른 인간을 욕망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다정하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럼 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혼인을 하겠다는 건가?”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왜?”
로젠게인이 웃었다. 그 순간 그가 너무 마르스티엘처럼 보였다.
“십 년이 넘게 떠돌았지만 그건 결국 전하께 돌아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