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쾅!
페란스가 발로 문을 걷어찼다.
하는 짓을 보면 어지간히도 화가 났다 싶겠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제 기분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뭐든 뱉어 내지 않으면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다 네 탓이야.
페란스가 숨을 들이쉬었다.
로랑카야의 그 산에, 로젠게인은 없었다.
대신 칼을 부딪치고 있던 자들은 그를 뒤쫓았던 루레티아의 국경 수비대와 산적 떼였다. 중립 지역 밖의 국경 인근에는 산적들이 둥지를 틀기 딱 좋은 곳이었다. 애초에 루레티아의 국경 수비대가 조직된 이유도 산적이었다.
어이없게도, 산적들에게 국경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한 게 블루와렌이었다. 산적들을 이용해 국경 수비대의 발을 묶어 두고 자신들은 국경을 넘어 티로안 항으로 이동했다.
티로안 항에 도착하자 블루와렌의 연락망이 움직였다.
로젠게인의 안전을 확인한 알레프는 한시름을 덜었지만 페란스는 아니었다.
몇 번이고 심장 바닥이 꺼지는 경험을 했다.
어째서.
너보다 먼저 죽는 건 나일 텐데.
무사하다는 소식이 왜 이렇게 섬뜩한지, 페란스는 티로안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유를 깨달았다.
무사하다는 건 그전까지 무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네가 먼저 죽으면 안 되잖아.
그런 가정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페란스가 죽었을 때 마르스티엘은 살아 있었다. 그에게 마르스티엘의 죽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는 뭐든 상관이 없게 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또다시 숨을 들이켰다.
이제껏 이 관계는 너에게 달려 있는 줄 알았어.
그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약혼이 싫어져서, 다른 오메가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에게는 애정을 가질 수가 없단 이유로 떠난 줄 알았던 로젠게인에게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이 관계도 달라질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이유를 캐묻고자 달려왔다.
하지만 그것조차 핑계였다.
그가 품은 게 무엇인지는 상관없이, 자신은 늘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계속 거기 계실 참이라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
로젠게인의 음성이 눈을 뜨게 했다.
상반신에 붕대를 두른 그가 침대에서 일어서는 중이었다.
“됐어. 일어나지 마.”
“그럼 가까이 오십시오.”
“……나중에.”
로젠게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까?”
“지금은.”
“…….”
페란스는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로젠게인은 침대에서 일어서다 만 채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내가 나타나면 놀랄 줄 알았는데.”
“많이 놀랐습니다.”
놀란 표정은 하나도 없는 인간이 그러니까 퍽도 진심으로 들렸다.
“약이 잘 듣는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뭐야. 내가 와서 놀란 게 아니라 지팡이 없이 걸었다고 놀란 거였어?”
“……역시 안 되겠어.”
뭐라고 작게 중얼거린 로젠게인이 침대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너야말로 너무 멀쩡해 보, …….”
로젠게인이 덥석 제 몸을 안았다.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후끈한 체온이 숨을 막히게 했다.
이 열감은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진짜 오신 게 맞군요.”
체온이 엇비슷하게 섞인 즈음에야 페란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눈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
“가끔 안 보이는 것처럼 쓸모없는 눈이 되곤 합니다. ……전하에 관해서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대답 대신 페란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울컥 들어갔다.
칼에 찔렸다니 열이라도 나는 모양인지 오늘따라 그가 뜨거웠다.
뜨겁다는 건 말로 뱉어 내 식힐 수 없는 무언가가 가득 차 있다는 의미 같았다. 그래서 자신도 말문이 막혔다.
이상해.
너를 보면 할 말이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전부 귀찮아. 이렇게 계속, 이 생이 다할 때까지 있어도 될 것 같아.
심지어 로젠게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숨 막히게 끌어안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페란스가 겨우 속삭이듯 물었다.
“너는 이렇게 계속 서 있어도 되는 건가?”
로젠게인이 제 목덜미에 이마를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건 다 지나갔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열이 나.”
“아프지는 않습니다.”
“과신하지 마라. 다친 주제에.”
“그러는 전하께서는,”
로젠게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종종 그랬듯이, 시간 감각이 헝클어졌다. 터무니없이 느려진 시간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새 멈춰 버렸다.
“먼 길을 오셨을 텐데 괜찮으신 겁니까?”
“약이 잘 들어 보인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칼에 찔린 너보다야 내가 낫겠지. 너는 네 몸부터 나을 생각이나 해.”
로젠게인이 제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모르는 글자가 섞여 있는 책을 읽는 사람 같았다.
“왜 오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 목숨을 구하러 왔다는 생각을 못 하는 건가?”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오시지 않아도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알레프도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고 달라지는 일은 크게 없었고, 괜히 몸을 가누지 못해 신경을 쓰게 만드는 게 고작일 거라고.
그 말이 고까워 보란 듯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나섰다.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여기서 로젠게인을 마주하고 있는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궁금해서.”
“어떤 게?”
“네가 십이 년 전 사라졌던 이유.”
“그건,”
“알아. 그걸 들으려면 조건이 있었다는 것.”
페란스가 웃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금 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면 들어도 될 것 같아. 진짜 약혼이라는 네 말이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다면, 그래. 내게는 들을 자격이 있다.”
로젠게인이 천천히 제 얼굴을 쥐고 다시 아주 천천히 살갗을 쓸었다.
“저와의 혼인을…… 스스로 바라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그래.”
사실 제 말은 조금 틀렸다.
지금이라면 들어도 되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까웠다.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빨리.”
“요구한 사람은 너잖아.”
“네. 그래도.”
“그러니까 어서 대답해. 설마 또 무슨 이상한 조건을 내걸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아,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네 부모를 죽이지 않았다. 그건 사고였어. 나 역시 사고라는 걸 믿지 못해 일 년 동안 남작 부부의 죽음을 조사했다. 그건 사고가 맞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어?”
“네.”
“그렇다면.”
뺨을 어르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안타까울 정도로 조심스럽던 감각이 희미해져 갔다. 뒤늦게 너무 오래 서 있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페란스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너, 지금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건가?”
“……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을 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발밑이 물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페란스는 로젠게인이 쓰러지는 중이라 생각하고 다급히 그의 몸을 붙들었다.
“전하?”
“……?”
뜬금없게도 코 속이 울컥 뜨거워졌다.
후드득, 피가 쏟아졌다. 로젠게인이 아니라 자신이 코피를 쏟고 있었다.
……아, 말을 안 듣는 건 내 몸이었나.
포게논에서 로젠게인의 행적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로 계속 몸을 경직시켰던 긴장이 이 순간 풀렸다.
페란스가 눈을 감으며 풀썩, 로젠게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 * *
“…….”
다시 눈을 뜬 순간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개운하면서도 동시에 쇠약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메넌의 빨간 머리였다.
그새 머리를 길렀는지 처음 봤을 때처럼 땋아서 한쪽 어깨로 내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메넌이 입술을 실룩대면서도 웃었다.
“그게 이 멀리까지 달려온 사람을 보자마자 하실 말씀입니까? 어쨌든 되살아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죽진 않았나 보군.”
“웬걸요. 다들 전하께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연금술사가 하는 말이 약에 부작용이 있거나 몸에 안 받거나 하는 건 아니고, 몸이 낫는 와중에 과도하게 움직이셔서 기력이 고갈됐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뜬금없는 광경에 점차 적응이 됐다.
자신은 티로안에서 성으로 돌아왔고, 아직 죽지 않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빨간 머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죽도록 앓다 스스로 깨어난 사람에게 할 인사치고 너무 경박하다는 생각은 좀 하지 그래. 멀뚱히 쳐다만 보지 말고 일으켜. 허리가 아파.”
“이런. 제가 둔했습니다. 손을 올리겠습니다, 전하.”
메넌이 어깨를 붙들어 침대에 앉도록 해 주었다.
등에 베개를 받치고 허리를 펴자 제대로 숨을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안 죽어서 좋긴 하군. 그런데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로젠은 뭘 하는 중인데?”
메넌이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전하께서 저를 그리워하신다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온 겁니다.”
페란스가 메넌과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뭐? 누가 그딴 소리를 하는데?”
“단주님께서요.”
“단주님? 단주님이 누구…… 로젠을 말하는 건가?”
“네.”
메넌이 잠깐 입술을 비죽였다.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에게는 그간 꽤 많은 일이 있었다. 대부분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험한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수호자를 수호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대체 제 운명에는 어떤 폭풍이 불기에 이렇게 되는 건지. ……엇, 전하?”
페란스가 갑자기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고 하는 바람에 메넌이 펄쩍 뛰었다.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가만히 계십시오.”
“방금 엄청나게 기분 나쁜 생각이 들었어. 로젠이 너를 불러왔다고? 그게 확실해?”
“아니면 제가 무슨 수로 블루와렌을 떠납니까. 단주님이 부르셨습니다.”
페란스가 이를 갈았다.
“미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때는 두 번 다시 보지 말라고 한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