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예상대로 수호자의 일행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루레티아의 국경 수비대가 막 그 뒤를 쫓았다. 역으로 다시 마을로 되돌아오거나, 아니면 아직 이 근방에 일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경우를 대비해 루레티아에서도 인원을 나누었다. 그 남은 인원이 텅 빈 마을을 뒤엎기 직전에 위스타드에서 도착했다.
인원은 양측이 비등비등했다. 하지만 위스타드와 블루와렌은 멀었고 루레티아의 국경은 가까이 있었다.
게다가 국경 수비대의 대장은 고지식의 산증인 같은 인물이었다. 대공저에서 직접 내려온 체포령을 제 목숨처럼 사수해야 한다고 믿는 중이었다.
위스타드의 기사단이 산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루레티아에서 그 앞을 막아섰다. 결국 한바탕 전투가 벌어질 분위기였다.
탁, 드르륵.
페란스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들 수 없는 칼을 손에 쥔 채 칼끝으로 땅에 골을 파며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알레프도 속을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페란스 1세가 십 년쯤 칼만 휘두르고 다닌 전쟁광으로 보일 것이다.
“네가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알겠고.”
드르륵…… 쿵.
칼끝이 흙바닥에 꽂혔다.
“그렇다면 내기를 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비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알레프가 시기적절하게 손에 든 화살을 빙그르르 돌렸다. 의미 없는 동작이었지만 화살을 다루는 손끝이 몹시 빠르고 유연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대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니면 네가 그 체포령을 곱게 접어 대공저로 돌려보냈을 때. 어느 쪽이 네가 살아남을 확률이 더 클지.”
“……네?”
“이대로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나는 너를 살려 보낼 생각이다. 이 전투는 반드시 전쟁이 될 테고, 그럼 전쟁의 책임을 묻는 건 네 늙은 몸뚱이가 되어야 할 테니까. 그건 나보다 루레티아 대공이 제대로 할 거라는 데 이 칼을 걸겠다.”
“…….”
남의 칼을 양국의 전쟁이 걸린 내기에 써먹다니, 과연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루레티아에 병력이 얼마나 있지? 위스타드의 상비군보다 많은가?”
대답은 알레프가 했다.
“절반의 절반입니다, 전하.”
“좋은 숫자로군. 전쟁이 시작돼도 한 달이면 끝나겠어.”
“기간도 그 절반의 절반이 될 겁니다. 전쟁 물자를 공급할 곳이 사라질 테니.”
“위스타드에 루레티아 영지가 생기겠군. ……가만, 그럼 그냥 전쟁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블루와렌에서는 수호자의 생존만 확인되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 그래.”
수비대장이 회색 수염을 부르르 떨며 내뱉었다.
“이곳은 루레티아의 국경입니다, 위스타드의 왕이시여. 곱절의 곱절이라는 그 상비군은 전하의 생각보다 멀리 있나이다.”
“여기가 국경이라는 것은 그 너머는 다른 왕국의 땅이라는 뜻이지. 루레티아가 위스타드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환영할 나라가 얼마나 되겠나?”
“그건……,”
수비대장이 답을 고르지 못하는 사이 알레프가 답을 했다.
“루레티아 대공조차 그럴 마음은 없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래.”
페란스가 땅에 꽂아 넣은 칼의 손잡이를 툭툭 치며 수비대장을 바라보았다.
“결국 여기서 전쟁을 원하는 건 너 하나라는 소리다. 전쟁에 패한 루레티아 대공이 네게 무슨 죄를 물을지 짐작은 가나?”
“위스타드의 왕이시여. 그건 터무니없는……,”
“터무니없는 건 공국의 체포령이지. 포게논 같은 중립 지역에서 타국의 왕족에게 손을 쓰는 일은 선전포고야.”
페란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아도 그는 그 표정으로 인해 왕으로 보였다.
서른도 되기 전에 지금의 위스타드를 만든 왕이었다. 권력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인간이라면 페란스 1세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말은 여기까지다.”
그것은 왕이 베푸는 자비도 여기까지라는 뜻이었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나? 체포령을 뒤로하고 수색을 거든다면 루레티아 대공에게 전령을 보내 주겠다. 네 목을 아껴야 한다는 말을 보태 주지.”
국경 수비대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무얼 해야 하는지는 뻔했다. 전투는 기세였다. 명분을 잃은 국경 수비대는 이미 패배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페란스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국경 수비대는 이미 칼을 들었고, 공교롭게도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칼에 찔리는 불운한 사고가 벌어지고 난 뒤라는 점이었다.
체포령은 사살령과 달랐다. 사실 수비대장은 대공의 명령을 죽어도 따라야 한다기보다는, 제 실수를 감추기 위해 애를 쓰던 중이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만일 위스타드에서 먼저 시체라도 발견한다면 페란스 1세의 협박보다 더 끔찍한 결과가 찾아올 것이다.
“……저희들은 루레티아의 국경 수비대이며, 루레티아 대공 전하의 명을 따릅니다.”
“대장!”
“……,”
수비대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었지만, 선택은 정해졌다.
“그렇다면.”
페란스가 칼의 손잡이를 쥐고 선 자세 그대로 또렷하게 내뱉었다.
“시작해.”
그 짧은 한마디가 이제껏 국경 수비대가 들어 본 것 중 가장 무거운 말이 되었다.
* * *
국경 수비대는 한 시간 만에 반으로 줄었다.
페란스가 전쟁광은 아니었지만 왕실 근위대와 상비군에 꽤 많은 공을 들인 건 사실이었다. 루레티아의 국경 수비대 역시 놀고먹는 한량들은 아닐 테지만 갑옷의 질부터 다른 왕실의 정예 기사단과 비등한 전력을 보일 수는 없었다.
살아남은 반 중에서 반은 투항하고, 반은 달아났다.
전투로 치자면 나쁘지 않은 승리였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산으로 올라가 로젠게인 일행의 뒤를 쫓았을 국경 수비대의 흔적은 해가 지면서부터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다.
“밤이 되면 찾기가 더 어려워질 겁니다.”
“그럼 더 빨리 움직여.”
페란스가 답하는 동안 알레프는 짙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흰 얼굴에서 식은땀의 흔적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다시 묻는데, 그냥 산 아래서 기다리실 수는 없습니까?”
“내 걸음이 느리다는 소리야?”
“산이 위험해진다는 소리였습니다. 산에 올라와 본 적은 있으십니까?”
“그랬으면 내가 이런 구두를 신고 왔겠어?”
페란스가 짜증스럽게 웃으며 주름 장식이 달린 흰색 실크 구두를 가리켰다. 구두는 흙과 풀물이 묻어 엉망진창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내려갈 생각이 없으시다는 뜻이겠군요.”
“그럼 빨리 찾아.”
“…….”
알레프가 할 말이 아주 많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한 대로, 시간이 촉박했다. 시야가 확보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가려지면 그다음부터는 귀에 의지해야 했다.
쫓기는 사람은 기척을 죽이기 마련이었다. 그걸 알기에 뒤쫓는 사람들도 소리를 낮췄다. 가뜩이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쫓다 보면 밤에 움직이는 새와 짐승의 흔적이 뒤섞여 산이 거대한 미로로 변할 것이다.
“아니, 안 되겠습니다. 그 전에 전하께서 먼저 하산을……,”
알레프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말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왜 그러는데?”
그가 말을 끊고 표정을 굳혔다. 페란스가 그 표정을 알아보았다.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소리가?”
희미하지만, 들렸다.
산짐승이나 새들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칼들이 뒤엉켜 울리는 소리일 것이다. 어떤 무리가 둘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저쪽.”
알레프가 다급히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망할. 어서 쫓아가!”
페란스가 빠르게 멀어지는 알레프의 등을 손가락질하며 근위대를 채근했다.
어둠이 부산스러워졌다.
* * *
티로안 항은 국경 지역에서 멀지 않았다. 포게논과 더불어 대륙 중부에 속한 중립 지역이었다. 작은 블루와렌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항구는 작았지만 지역적 특성상 유동 인구가 많았다. 늘 사람과 배가 북적대는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이곳은 워낙 다양한 인간들이 오가기에 사건 사고도 늘 다채롭게 일어났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햇빛이 물기를 전부 말려 죽일 기세로 쏟아지는 거리에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가 등장했다. 그 마차의 뒤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마를 탄 기사단이 뒤따랐다. 기사단 뒤에는 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상쩍은 무기를 망토 아래 감춘 무리가 따라붙었다.
거기까지면 드물긴 했어도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벌거벗은 인간이 멋들어진 가죽 부츠만 신은 채 거리를 활보해도 그러려니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비싸 보이는 마차에 붉은 백합을 수놓은 흰색 비단 깃발이 펄럭이고 있으면 한 번쯤 쳐다볼 만했다.
쾅!
마차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그 안에서 왠지 꼬질꼬질해 보이는 누군가가 뛰어내린 사실도 덩달아 주목을 끌었다.
“망할 인간.”
꼬질꼬질한 누군가는 다시 보니 예사롭지 않은 생김새를 지녔다. 햇빛에 닿은 금발이 눈부셨다. 흰 옷에 온통 흙먼지와 진흙이 묻었다는 사실은 그 화려한 생김새에 금방 잊혔다.
“대체 왜 이런 곳에 와서…… 누구한테 이런 개고생을 시키는 거야.”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시면 다 들릴 겁니다. 오시는 걸 입단속할 필요가 없었겠군요.”
그 옆에서 덩치가 큰 회색 머리가 침착하게 말을 붙였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눈빛이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으면 한 대 후려치겠어.”
“단주님은 부상을 입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멀리까지 올 정도면 한 대 더 맞는다고 죽진 않아.”
“……마음대로 하십시오.”
회색 머리가 포기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문 열어.”
마차가 멈춰선 곳은 어떤 저택 앞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저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여러 번 거쳐야 하며, 내부를 정확히 모르는 자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덩치가 큰 회색 머리가 군말 없이 앞장을 섰다. 그러나 사람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자 회색 머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전가옥은 이제 수명이 다 됐겠군요.”
“……음? 뭐라고?”
“아닙니다.”
어쨌거나 별로 크지 않게 보였던 저택은 제법 많은 무리와 큼지막한 마차를 어렵지 않게 제 안으로 들여보냈다.
티로안의 사람들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곳이 사실은 블루와렌이 숨겨 놓은 집들 중 하나였으며, 방금 전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위스타드 왕국의 페란스 1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