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8)화 (108/122)

108.

곁에서 얼굴을 살피던 수하가 말을 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단주님. 피를 너무 흘리셨습니다. ……나가서 약이라도 구해 와야 할 것 같습니다.”

“피는 멎었어. 그럴 필요 없다.”

경매장에 예상치 못한 기습이 있었다.

포게논은 경매 물건을 노리는 잡도둑들이야 언제든 쥐 떼처럼 들끓는 곳이었지만 기습은 얘기가 달랐다. 루레티아 공국의 체포서를 들고 온 기사단은 전쟁을 치르듯 경매장을 포위하고 이쪽의 신병을 요구했다. 명분은 루레티아와 맺은 금광 채굴 협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페란스의 청혼서를 가로챈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포게논은 중립 지역이긴 했지만 루레티아와 가까웠다. 국경의 치안은 대부분 루레티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난처한 입장이 된 경매장은 일단 양쪽 모두의 비위를 맞추는 쪽을 택했다. 블루와렌을 뒷문으로 안내한 뒤 루레티아에도 뒷문의 위치를 알려 주는 식이었다.

추격전이 벌어졌다.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루레티아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변변찮은 알파라 했던 대공자는 약이 바짝 올랐는지 그들을 뒤쫓는 데 국경 수비대를 통째로 쏟아부었다.

어쩌다 보니 마차를 잃고 칼에 찔린 채 국경 인근의 마을로 숨어들었다. 유목 부족이 한 철을 지내고 가는 곳이라 지금은 마을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칼을 뽑고 상처를 지져 출혈을 막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뒤로는 줄곧 꿈을 꾼 모양이었다.

“놈들이 여길 모른다는 게 기적이로군.”

로젠게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데인이 유인책을 쓰고 있을 테니까요……. 내일 새벽까지 국경을 넘어가면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티로안에 도착하면 이쪽도 무력이 있으니 상대할 수도 있고요.”

“거기까지 가면 싸움이 커져. 전쟁이 된다.”

“그래도 수호자를 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데 설마 루레티아에서 티로안까지 뒤쫓아 오겠습니까? 지금 칼을 들이댄 것도 어이가 없는데?”

“나를 죽이려던 건 아닐 것이다. 개중 멍청한 인간이 칼을 잘못 놀렸겠지.”

“그렇다고 수호자가 칼을 맞은 일이 없던 게 됩니까?”

온갖 무법이 판을 치는 블루와렌 출신들은, 그래서 역으로 안전에 예민했다. 블루와렌을 지키는 것은 돈과 그 돈으로 산 무력보다도 오히려 상식과 계약이었다. 루레티아는 오늘 상식과 계약 두 가지를 전부 깨트렸다.

“제게 맹세하십시오. 블루와렌으로……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여길 무사히 벗어나면 루레티아를 말려 죽이겠다고.”

“그런 일로 수호자의 맹세를 써먹지 마라. 당연한 일이니까.”

“물론 압니다만 너무 열이 받아 말입니다. 니미, 저 똥대가리 같은 것들. 지들이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있을 거면서.”

카누트라는 이름의 수호자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계속 욕설을 중얼거렸다.

귓등을 스쳐 가는 타인의 목소리가 벽에 난 구멍처럼 생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과 무의미하게 뒤섞였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는데, 그건 달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속눈썹에 고여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죽을 수도 있으려나.

잘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제 몸이 어느 상태인지, 기력이 회복되어 가는 중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여기서 죽는 건가. 그렇다면 빨간 머리가 다시 수호자가 되겠군.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꽤 열이 받았다.

그 멍청한 인간은 페란스가 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시시껄렁한 추파나 던질 것이다. 그건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직 죽으면 안 되겠어.

페란스는 여전히 각인한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간 머리 같은 가벼운 인간이 각인을 풀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자신만큼 페란스 카벨리카에게 미친 인간은 없었다. 그 하나는 확실했다.

“출발하지.”

로젠게인이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카누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부축했다.

“이런…….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움직여야 해. 바람이 부는 것 같아.”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 아닙니다. 수호자께서 아시겠지요.”

희한하게도 블루와렌의 수호자들은 바람에 민감했다. 폭풍의 신이 블루와렌의 수호자들을 미리 점찍어 제 숨결을 따로 머릿속에 박아 넣은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에서는 폭풍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았고, 육지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살갗으로 알았다. 그래서 여섯 매듭이 한 번 수호자를 인정하면 아무도 그 사실에 반발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호자는 바람 앞에서 자격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이 몸으로 국경을 넘으려면 고생깨나 하실 겁니다.”

제 몸을 어깨로 받친 카누트가 인상을 썼다.

“죽지 않을 정도라면 좋겠군.”

“태평하신 걸 보니 죽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좋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이제는 숨 쉬는 체력까지 아껴야 할 때였다. 마을 언저리의 돌벽을 따라 걷던 그들이 마을의 끝을 알리는 돌탑에 도달했을 때였다.

……툭.

거의 동시에 걸음이 멎었다.

“바람이……,”

카누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바람이 달라졌다. 그렇다는 건 보이지 않는 저 앞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움직이면 그들을 스쳐 오는 바람에는 정보가 섞였다. 어떨 때는 온도가, 또 다른 때는 냄새가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카누트가 물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뛰어.”

로젠게인이 칼에 찔린 곳을 손으로 잡고 북서 방향에 펼쳐진 산을 가리켰다.

* * *

“칼을 줘. 가지고 내릴 테니.”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고 있던 페란스가 손을 내밀었다.

알레프가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떤 칼 말입니까?”

“네 칼을.”

알레프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허리춤의 칼을 뽑아 페란스에게 건넸다.

“무겁습니다. 살상용 칼을 훈련하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들지도 못하실 겁니다.”

칼을 받자마자 손이 무게에 딸려 아래로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마차 바닥에 구멍을 낼 뻔했다.

“젠장, 열받아. 뭐 이리 무거운 거야.”

“제가 들겠습니다.”

알레프가 페란스의 손에서 칼을 가져갔다.

쿵!

페란스는 화풀이를 하듯 마차 바닥을 걷어찼다.

“너무 느려.”

“거의 다 왔습니다.”

알레프가 창문 밖을 살폈다. 저 끄트머리에 로랑카야의 돌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조만간 루레티아의 국경 수비대도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포게논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루레티아가 블루와렌의 수호자 앞으로 체포령을 내렸다. 중립 지역인 포게논에서부터 국경까지 수호자 일행을 뒤쫓아 로랑카야 마을까지 왔다고 했다. 수호자의 흔적이 끊어진 곳도 로랑카야였다. 지형상 마을 북쪽의 산으로 도주로를 잡았을 것 같다는 첨언이 있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 내린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로랑카야에서 행적을 들켰다면 북쪽 산 말고는 숨을 곳이 없었다.

알레프는 인근의 무력을 전부 동원해 로랑카야로 가게 했다.

거기에 위스타드의 왕실 기사단이 합류할 줄은 몰랐다. 페란스 1세가 직접 칼을 차겠다고 말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하는 짓을 보면 약혼자를 걱정하느라 몸이 단 인간이었다. 그러나 알레프는 그 많은 일들이 벌어진 지금에 와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 정신 나간 놈들은 보이나?”

“아직.”

“전부 죽여도 괜찮아.”

페란스 1세는 걱정에 몸이 다는 것도 모자라 미친 인간 행세까지 하고 있었다.

전부 죽이라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외교적인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건 루레티아에서 했어야 할 일이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건 게 누군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국경 수비대를 전멸시키면 없는 문제도 생깁니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유감인지 다행인지 페란스는 약발이 잘 듣는 인간이었다. 스스로를 연금술사라 부르는 블루와렌의 제약사는 하시시의 독성을 전부 없애려면 두 달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체질이 잘 맞고 무시무시하게 운이 좋은 인간이라는 전제를 두고 한 얘기였다. 페란스는 고작 며칠 만에 안색이 달라졌다. 지팡이를 짚고 걷던 인간이 이젠 제법 팔팔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아시겠지요.”

알레프는 사서 하는 걱정은 그만두기로 했다. 위스타드의 왕은 자신이 아니라 페란스였다.

“역시 안 되겠어. 칼을 내놔.”

……혹시 팔팔한 게 아니라 미친 건가.

“못 드셨습니다.”

“그래도 내놔.”

“…….”

알레프가 혀 차는 소리를 삼킨 뒤 제 칼을 내어주었다. 페란스는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칼을 받아 손잡이 위쪽으로 마차 벽을 쿵쿵 쳤다.

“서둘러! 더!”

이히히힝!

마부 대신 말이 대답을 했다. 마차 속도가 빨라졌다.

페란스와 알레프가 비슷한 표정이 되어 전방을 주시했다. 마침내 루레티아 국경 수비대의 깃발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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