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페란스는 일 년쯤 자신의 행방을 쫓았다. 일 년이 지나자 그 다정함도 끝이 났다. 또 한 번 심장이 깨졌다.
당신은 이대로 나를 저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당신을 놓아야 하는 걸까.
방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방향이 없던 방황은 뒤늦게 고장 난 나침반에 자성이 돌아오는 것처럼 서서히 목적지를 정했다.
각인.
자신은 페란스 카벨리카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건 다른 알파도 마찬가지였다. 각인이 풀리기 전까지 페란스는 혼자였다.
그렇게 유령이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다니는 일은 자연스럽게 그를 존재하지 않는 자로 만들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전부 각인을 깨는 방법을 찾는 데 들어갔다. 그래도 돈이 부족했다. 돈을 버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각인을 깨는 법을 찾고 났을 때는 블루와렌과 깊숙이 얽힌 시점이었다.
빨간 머리 알파의 진짜 이름은 마르스티엘이 아니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선택하는 여섯 개의 이름 중 하나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누구라도 마르스티엘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자신이 되겠다고.
마침 시간이 딱 맞았다. 마르스티엘이 되려는 작업을 시작한 그 무렵 페란스 1세가 공개적으로 청혼서를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젠게인은 마르스티엘이 되어 페란스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신분이 없는 자의 청혼을 카벨리카 왕실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무기가 필요했다. 그가 준비한 무기는 각인을 깨는 법과 이전 수호자의 목숨이었다.
그 두 개가 부족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역 전반이 블루와렌과 얽혀 있는 위스타드는 새로운 수호자를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에 비하면 이전 수호자는 장사꾼이 아니라 호객꾼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위스타드의 숨통을 조일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페란스는 절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첫눈에 알아볼 줄은 몰랐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달라졌으리라는 믿음이 한순간에 휘발되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잘못한 거야.
하필 페란스는 발정기였다. 이제껏 한 번도 발정기를 각인 상대와 보내지 않은 것도 잘못이었다. 그 몸에 억제제를 들이부어 가며 그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게 잘못이었다.
페란스가 성년도 되지 못한 약혼자를 내내 기다려 온 게 아닐 텐데, 반쯤 미친 머리는 자꾸만 그럴 수도 있다고 속삭였다.
당신은 내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처음 치르는 정사가 서툴까 봐 걱정이 되는 건 아주 잠시였다. 몸은 몇 번이나 페란스와 섹스를 해 봤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입으로는 각인 반응을 뱉어 내면서도 페란스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토사물을 감추면서도 멈추지 말라고 했다.
끔찍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기억보다 여윈 몸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넋을 잃게 했다.
정사가 끝난 뒤 페란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다른 자의 이름을 흘리는 그가 잔인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래도 지금은 그게 제 이름이었다. 자신이 새 이름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페란스도 그 이름이 제 것이 되었다는 데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이미 페란스가 없는 시간을 십 년도 넘게 보냈다. 그의 곁에 있는 시간은 훨씬 쉬울 것이다.
벗은 어깨에 입술을 누르는 그 순간까지 그 생각은 굳건했다.
제 안의 어딘가가 비틀리기 시작한 건, 그다음부터였다.
* * *
꿈은 언제인지 모르게 시작되었다.
페란스를 눕히고 침대 옆에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던 마지막 기억이 꿈으로 이어졌다.
갑자기 페란스가 몹시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전하.
처음에는 자면서도 각인 반응이 오는 줄만 알았다. 페로몬을 지우고 페란스에게 다가갔다.
-전…….
그러다 몸이 굳었다.
숨소리가 없었다. 페란스는 눈을 뜬 채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별 같던 초록 눈이 빛을 잃었다. 탁해진 초록색이 거슬렸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죽은 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방금 전 제 손으로 씻기고 눕힌 사람이 갑자기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 터무니없는 괴리감에 숨이 막혔다.
-전하!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하!
위스타드의 시종장이 페란스를 덮은 이불을 움켜쥐고 몸부림을 쳐 댔다.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남이 하고 있다는 게 희한했다.
궁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시트를 걷어 내고 몸을 닦기 시작했다.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 피를 쏟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중절약이 잘못되었다고 소리를 쳤다.
페란스가 중절약을 먹었다. 페란스가 아이를 가졌다. 제 아이를.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약을 먹었다.
……쿵.
갑자기 이마가 얼얼했다.
오열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여간 뭔가를 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와서 몸을 일으켜 주기에 자신이 쓰러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옆방으로 옮겨서 눕히라느니 하는 말들이 오갔다. 필요 없는 짓이었다. 어디에 어떻게 있든 페란스가 보이는 곳에 있고 싶었다. 로젠게인은 식은 피가 굳어 가는 페란스의 침대 위에 누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페란스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하던 얼굴은 핏기를 모두 잃고 잿빛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뺨을 쓸자 이질적인 찬 기운이 살갗을 뚫고 스며들었다.
제 눈이 처음으로 페란스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기분이 몹시 불쾌해 제 눈을 더듬었다. 이대로 눈을 잡아 뽑으면 낫지 않을까. 그럼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니.
그게 첫 번째 꿈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페란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침대 옆에 주저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너무 생생한 꿈은 경계선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사고를 멎게 만들었다. 페란스가 간간이 잠꼬대처럼 마르스티엘의 이름을 중얼대지 않았다면 기어코 눈이 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키슬크가 나타나 제 뺨을 치는 순간이 되어서야 안도가 찾아왔다.
꿈이었다. 페란스는 죽지 않았다.
그래도 첫 번째 꿈은 교훈을 남겼다. 어떤 이유로든 자신은 페란스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혼인이 절박해졌다. 페란스의 곁에 남아 있어야 했다.
잠시라도 눈을 돌리고 있으면 아차 하는 사이에 페란스가 사라질 것 같다는 괴상한 강박감이 몸에 붙어 버렸다.
거기에 대고 페란스가 네 오메가니 뭐니 하는 소리를 했다. 그가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더욱더 초조해졌다. 페란스는 자신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은 페란스를 원했다. 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패는 그리 많지 않았다. 로젠게인은 몇 안 되는 패 중에서 블루와렌이나 위스타드 둘 중의 하나가 끝장이 날 때까지 목을 조이는 방법을 택했다.
치러야 할 대가는 크겠지만 그만큼 결과가 빠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는 쪽은 그였다.
페란스가 루레티아의 대공자에게 청혼한다는 소문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제 발로 페란스를 찾아가게 만들었다.
페란스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제 손톱을 보여 주었을 때는 항복도 부질없어졌다.
대체 당신의 마음 한 조각이 뭐라고.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라 했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줄 수 없다는 것을 내놓으라고 십 년이 넘도록 악을 써 댔다.
그 결과가 망가진 손톱이었다. 줄어든 수명이었다.
……욕심내서는 안 돼. 더는.
첫 번째 꿈은 예지몽일 수도 있었다. 제 과욕이 페란스를 영원히 잃게 만들 거라는 경고일지도 몰랐다.
혼인 준비를 계속할수록 꿈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그는 꿈속에서 페란스의 장례식을 치르고, 위스타드를 떠났다.
폭풍 속을 떠돌다 견디지 못하고 다시 위스타드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어떤 꿈에서는 발정기가 왔다.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은 페란스에게 각인한 상태였지만 그게 이상하진 않았다. 페란스를 욕망하다 못해 미쳐서 각인이라도 했을 것이다. 몸을 묶고 억제제를 삼키는 일이 시작되었다. 코와 입으로 피를 쏟았다. 그럴수록 생생해지는 것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페란스가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끔찍한 절망감이었다. 결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토해 내던 몸이 조금씩 망가져 갔다.
각인을 깨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각인을 깨는 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각인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페란스의 흔적이었다.
어느 날 더는 지켜볼 수 없겠다며 알레프가 떠났다. 혼자 남은 자신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죽었다.
제 목덜미에는 아직 페란스의 이가 만든 흉터가 남아 있었다. 각인이기를 원했지만 상처는 그저 상처로 남았다. 운명 같은 걸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쯤 되면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페란스를 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