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6)화 (105/122)

106.

대답은 단호했다. 그리고 반듯했다.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 이름 때문에 저를 신뢰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름은 찾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너, 이상해.

-어쩌면.

피 묻은 손이 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키스와 구분할 수 없는 손짓이었다.

-전하께서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왜.

-끝내 저를 미워하지 못하셨으니. 이상한 게 맞습니다.

-그런가……?

페란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별로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네가 나를 속였지만 나는 네게 더 큰 잘못을 했으니.

-그래서 이상한 분이라는 겁니다.

마르스티엘이 두 손으로 제 손을 꽉 감싸 쥐었다.

-죽지 마십시오, 전하. 아직 저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저를 떠나실 수는 없습니다.

-아……. 맞아. 그 말을 하려고 했어.

페란스가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마르스티엘의 손 위에 얹었다. 두 쌍의 손이 얽혔다. 이대로 누가 석고를 부어 영원히 손이 풀리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면 싶었다.

-나도 계약을 지키고 싶었어. 너는 나의 각인을 풀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다 늙어서도 한 침대에서 네 아랫도리를 빨다가 죽고 싶어.

마르스티엘이 웃었다.

-그럼 죽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틀린 것 같아.

제 손은 석고처럼 굳지 않았다.

마르스티엘의 손에 얹어 놓았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맹세할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땐 꼭 그렇게 하겠어.

이젠 마르스티엘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그저 하얗기만 했다.

-맹세하셨습니다.

-…….

고개가 무사히 끄덕여졌을까.

꿈은 대답 없이 끝났다. 눈을 뜬 페란스는 한동안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찾지 못해 헤맸다.

두 눈이 천천히 핏자국 없는 손에 초점을 맞춘 뒤에야 방금 꾼 꿈이 자신이 죽던 날의 현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들었는데.”

페란스가 침대 휘장의 얇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달빛에 손을 비춰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이라고 하니까…….”

그럼 다음에.

마르스티엘이 답했다.

그럼 다음에는. 반드시.

“……질기군. 둘 다.”

죽기 전에 한 말이 다음을 기약하겠다는 것이었다. 증오든 뒤틀린 애정이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질겼다.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살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네가 돌아오면.

끝은 그때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이라는 건 맺을 때나 파기할 때나 양측의 동의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페란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때를 맞춘 듯, 침실 밖에서 키슬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잠을 깨셔야 합니다.”

한밤중에 잠든 왕을 깨울 수 있는 이유는 많지 않았다. 페란스가 알기로 지금은 단 하나였다.

“포게논에서 연락이 당도하였나이다.”

* * *

“……주님, 단주님!”

꿈 밖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음성이 반가웠다.

로젠게인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괜찮은 건지 괜찮지 않은 건지 이제껏 헷갈리는 중이었다면, 지금은 이게 괜찮지 않은 상태인 것을 알았다.

반복되는 꿈은 페란스를 만나고 나서부터 점점 구체적이고 생생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더 선명하게 잔인했다.

정확히는 발정기가 온 페란스와 섹스를 하고 난 그날부터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에게 종속당한 페로몬은 조금도 역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각인에 대한 속설들이 와전된 것이라 여겼다.

각인을 푸는 법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일방 각인한 자들을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발정기의 페로몬은 유독 진했다. 그만큼 더 불쾌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페란스의 페로몬은 무서울 정도로 몸을 달구었다.

내게도 러트가 온 건가.

발정기 열이 올라 발긋하게 흐려진 초록 눈을 빨아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건데.

열이 따듯하게 데워 놓은 목덜미를 정신없이 탐하며 로젠게인은 몇 번이고 이성을 잃은 채 살갗을 물려고 했다.

십삼 년째 살아 있는 갈증은 갈수록 더 몸집이 커졌다. 각인을 푸는 법을 찾는 동안 제 눈으로 보고 귀로 확인한 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졌다. 각인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페란스를 바라보는데도 제 욕망은 시들지 않았다.

미쳤나 보군.

자신에게는 각인을 풀어야 한다는 면죄부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 뒤틀린 섹스의 밑바닥은 자신의 욕망이었다.

갖고 싶어. 당신을.

혼절하듯 잠이 든 페란스의 몸을 닦아 주며 로젠게인은 끊임없이 살갗에 울혈을 남겼다. 페란스가 간혹 잠결에 신음하며 어깨를 비틀 때는 다시 깨어나길 기대하며 입술을 삼켰다.

……하지만 가질 수는 없겠지.

페란스가 눈꺼풀 사이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을 속삭였다. 로젠게인은 살갗이 뚫리도록 제 입술을 씹었다.

어째서 내가 아닌 걸까.

입술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도 페란스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만한 각오도 없이 돌아오진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페란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동정하고 연민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구한 걸까. 가짜 각인이라는 말로 당신의 앞날을 저당 잡혀 가면서.

열셋,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그 순간에도 로젠게인은 페란스가 자신에게 주고 있는 게 애정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가 성인이 되면 청혼할 거야.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네가 나를 사랑하길 바랄 것이다.

너무 꿈같아서 정신이 없었지만 페란스가 청혼하는 상대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페란스는 어쩌다 곁에 있게 된 알파가 아닌, 몹시도 그리워하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건 한 번 인사를 받은 뒤 곧장 얼굴마저 잊어버린 자신이 될 수 없었다.

페란스가 각인했다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자신과 콜더스트 가문을 살린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카벨리카의 이름으로 혼인할 수 없는 상대라서 그런 걸까.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알파가 등장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페란스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친근한 얼굴로 마르스티엘을 바라보았다. 편안한 말투와 꾸미지 않는 표정을 곁에서 훔쳐보며 마르스티엘과 자신이 그에게 몹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다.

어이없게 아름다운 페란스는 어차피 이루지 못하는 혼인을 상관없는 다른 이를 구하는 데 이용하겠다고 결심할 만큼 고결한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다른 알파를 곁에 두지 말라는 말에도 페란스는 순순히 약속을 해 주었다. 최선을 다해 이 약혼을 진짜로 만들겠다고도 했다. 피가 전부 마르는 것 같았지만 그것으로도 감사했다. 자신은 너무 어렸으니까. 자신이 더 자라면, 그래서 완연한 알파가 되면 페란스의 시선도 달라질지 모르니까.

하루라도 빨리 자라기 위해 뼈가 아팠던 시절이었다.

매사에 갈증을 느꼈지만 로젠게인은 참고 버텼다. 페란스는 카벨리카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기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시간이었다. 부모의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로젠게인은 안도감을 느꼈다.

페란스가 제 부모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한 그는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위태롭고 얄팍한, 거미줄 같은 기만이었다.

페란스가 보낸 마지막 편지는 제 것이 아니었다. 빨간 머리의 알파에게 쓴 것이었다.

잘 정돈된 필체의 편지는 왕실 비서관이 공을 들여 썼다는 것을 로젠게인은 진작 알고 있었다. 가끔 그보다 자유로운 필체로 편지 말미에 덧붙인 문장은,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어 보던 페란스가 쓴 것이었다. 로젠게인은 페란스의 버릇을 전부 외웠다. ㅍ나 ㅌ 같은 자음을 쓸 땐 모음보다 글자가 더 커지는 바람에 가끔은 아이가 쓴 것 같았다. 어떤 모음은 획을 둥글게 안으로 말았는데, 그건 글씨가 너무 성의 없어 보일까 봐 일부러 그런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낱낱이 외운, 그간 사랑해 마지않았던 필체로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속삭였다.

넋이 나가 위스타드로 돌아왔다. 눈이 먼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편지가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그간 페란스의 필체인 줄 알았던 그것이 사실은 제 착각이었다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궁에 들어와 페란스의 서재에 숨어들었다. 서랍을 열어 뭐든 찾으려고 했다.

그때 발견한 것은 페란스가 보내지 않은 한 무더기의 편지였다.

마르스티엘이라는 네 이름, 이라고 써진 문장을 봤을 때 로젠게인은 심장이 깨어지는 감각을 경험했다.

그리고 제 얄팍한 기만도 깨어졌다.

페란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한 적도 없었고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넘치는 연민과 눈을 멀게 만드는 다정함을 주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것을 주었는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알레프가 부모를 죽인 게 페란스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믿기진 않았지만 억지로 믿었다. 그 말을 믿어야지만 그나마 답과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페란스에게는 자신 같은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신분은 있지만 나이는 어리고, 부모가 모두 죽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페란스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페란스가 하라는 대로 뭐든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과의 약혼이란 혹시 마르스티엘을 곁에 두기 위한 연막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떠나야 했다. 이대로 곁에 머물면 자신은 계속 열세 살짜리 고아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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