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5)화 (104/122)

105.

페란스의 동작이 움칫 멎었다. 알레프의 회색 눈이 순간 마르스티엘의 옅은 푸른 눈으로 보였다.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아만다리스에게 마차의 위치를 알려 주셨다는 말을.”

“잠……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선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께서 남작님을 감싸 안고…… 저까지……,”

알레프가 말을 맺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그러니까 아만다리스가 찾아온 그날…… 로젠이 여기…… 있었다고?”

그 사실이 충격적인 건 페란스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그런 말 한마디를 들었다고…… 내가 제 부모를 죽였다 믿었어? 일 분만 더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게 아만다리스의 망상이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고작…… 그래서 나를 떠났다고? 한마디 말조차 없이……,”

……툭!

충격으로 떨리는 손끝에서 지팡이가 떨어졌다.

알레프가 일그러진 얼굴로 어깨를 떠는 페란스를 지켜보았다.

“아니라는 겁니까? 분명히 제 두 귀로 들었습니다.”

“내가 선대 콜더스트를 죽이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살리려고 애쓰는 대신 아만다리스와 전쟁을 하도록 내버려 뒀겠지.”

“남작님께는 손대실 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각인을 했으니.”

“각인?”

페란스가 알레프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이 이상했다.

“로젠이 네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무얼 말입니까?”

“각인이 거짓이라는 걸.”

“……네?”

“나는 그에게 각인한 적이 없다. 로젠도 알고 있어.”

알레프의 회색 눈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각인이 거짓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체 왜…… 아니, 그렇다면 애초에 약혼할 이유조차 없었던 건데…….”

“그게 콜더스트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그럼 선대는……,”

“그날 벌어진 일은 사고였다. 그건……,”

페란스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콜더스트 남작 부부의 죽음은 모든 절망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제 손으로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을 남겼고, 사고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앞으로 벌어질 일은 미리 정해져 있으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를 싹 틔웠다.

로젠게인이 떠나간 사실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납득했다.

다른 시간대에서처럼 그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거라고. 무슨 짓을 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 생각은 신앙처럼 굳어져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모든 짓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일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게 페란스가 한 번의 죽음으로 얻어 낸 사실이었다.

“네가 알렸든 옆에서 들었든 그는 내가 제 부모를 죽인 줄 알았겠군. 그럼 역시 돌아온 것은 복수가 목적이었나?”

“아니……,”

알레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싸고 엎드리듯 몸을 숙인 모습은 신음 하나 없어도 섬뜩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 얘기를 들은 건 접니다. 제가 남작님께 말씀을 드렸…… 습니다.”

“로젠은 왜 내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던 거지? 최소한 확인이라도 해 볼 수는 있었잖아. 그렇게 떠나 버리는 대신.”

“남작님께서는…… 전하께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데?”

알레프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강제로 토해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복수 같은 건 할 수가 없다고…… 그냥 그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파혼을 요구하지 않았지? 아니, 그 전에. 나한테 제 부모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걸 알잖아. 그 말을 그렇게나 쉽게 믿었던 이유가 대체 뭐야?”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긴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남작님을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뭐?”

“그래서 떠나는 게 가장 나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남작님께서 너무 상처받으셨기에 저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돌아온 이유는? 이제 와서 생각이 달라진 건가? 아니면 십이 년씩이나 지나서 다시 복수가 하고 싶어진 거야?”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복수가 목적은 아닐 겁니다. 그러기엔 지금 남작님이 하시는 짓은 정신 나간 구애에 더 가깝습니다. 전하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도 진심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페란스가 머리칼을 움켜쥐다 느리게 내뱉었다.

“십삼 년…… 아니, 십이 년 전까지 내 인생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꼽자면 그를 향한 애정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온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시 죽어도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래서 하고 싶었던 것은 있었다. 제게 각인함으로써 뒤틀린 로젠게인의 인생을 바로잡고 싶었다. 자신이 그의 인생을 망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 당시 내게 그것보다 귀중한 것은 없었어.”

그 애정을 놓아 버린 것은 그들의 전제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 때문이었다. 로젠게인은 떠났고, 그러니 자신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는 찾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서 떠났을 테니까.”

“아…….”

알레프가 뭔지 모를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기억 속의 알레프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낯선 소리였다.

그래서인지 지금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알레프가 낯설었고, 그에게서 매번 느껴지던 적의가 낯설었으며 그를 보는 제 감정도 생소했다.

……그리고, 너도.

나와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대체 뭘까.

이제껏 품어 왔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다시 모래알로 돌아간 감정들은 무한하게 흩어져 형태가 없는 혼란이 되었다.

페란스는 한 움큼 쥐고 있던 모래알의 흔적을 바라보는 것처럼 장갑 낀 손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까지 손금 사이에 붙어 있는 감정이 하나 남아 있다면, 그 이름을 알고 싶었다.

“지금 어디 있나?”

누구를 묻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포게논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이십니다.”

“포게논? 거기가 어딘데?”

대륙에서 가장 큰 광산 다섯 개로 가는 대로가 교차하는 땅에 세워진 도시였다. 최근에 발견된 원석의 경매가 있다고 했다. 지상에서 가장 큰 블루 다이아몬드가 되리라는 원석이었다.

페란스가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하는 손으로 얼굴을 쓸다 동작을 뚝 멈췄다.

“그건 설마……. 혼인 반지에 쓸 건가?”

“…….”

알레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면 어쩐지 반지에 대한 얘기는 비밀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페란스는 알레프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다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네?”

“그 블루 다이아몬드!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블루와렌에서 보석 경매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있는 일이 더 이상할 텐데요.”

“그게……, 빌어먹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려던 페란스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레프가 말없이 바닥을 굴러간 지팡이를 주워 건네주었다.

“경매는 언제야?”

“내일 저녁입니다.”

“반지는 필요 없으니까 당장 돌아오라고 해.”

“전령을 보내도 경매 전에 도착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해.”

“……뜻대로.”

알레프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사실을 떠나자 페란스가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너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야.”

눈꺼풀이 푸들푸들 떨려 왔다. 페란스는 핏줄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창백한 손으로 눈꺼풀을 눌렀다.

“왜 한 번도 내 생각대로 머무르는 법이 없는 건데. 너는 왜 늘 그렇게 나를……,”

눈꺼풀을 누르는 손도 떨렸다. 이어서 어깨도 흔들렸다.

페란스는 손을 눈으로 가린 채 한동안 머물렀다. 흔들리는 어깨는 웃음 같기도 했고 울음 같기도 했다.

* * *

알레프가 남부 지역에 깔아 둔 블루와렌의 연락망을 전부 동원했다고 말한 지 이틀이 지났다.

첫날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초조했고, 둘째 날은 거짓말처럼 무감각해졌다.

달도 뜨기 전인 초저녁부터 잠이 와 페란스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이른 잠은 수상쩍을 정도로 달았고, 몸은 간만에 통증 없이 잠잠했다. 그간 알레프가 주는 약을 부지런히 받아 마셨더니 효과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간만에 잠이 휴식 같았다.

꿈은 그 와중에 시작되었다.

너무 평온하고 고요한 꿈이라 처음에는 꿈인 줄도 몰랐다.

-왜 말하지 않았나?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제 손을 마르스티엘이 붙잡아 뺨에 대고 있었다. 손이 피투성이였다. 아마도 자신이 흘린 피일 것이다.

-뭘 말입니까?

-네 각인 상대가 나였다는 것. 내가 그걸 외면했다는 걸.

피투성이 손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좀 안쓰러웠다. 제 몰골이 엉망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다 보니 말을 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데? 너는 그래서 위스타드로 돌아왔던 거잖아.

마르스티엘이 잠시 생각을 잇느라 말이 끊겼다.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시간 동안 눈빛은 더 다정해졌다.

-처음에는 이름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살아남았으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그런데…… 전하를 갖는 데 과거의 이름은 오히려 방해가 될 것도 같았고.

엉뚱한 대답이었다.

페란스가 맥 빠진 얼굴로 웃었다.

-그게 말이 되나? 이름을 찾으려고 나를 가지려던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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