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4)화 (103/122)

104.

“……그렇다면 이 거래는 성사된 겁니까?”

“네가 다른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면.”

“아시게 될 겁니다. 제게 다른 마음은 없다는 걸.”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내가 죽고 난 뒤라도 네가 무슨 짓을 못 하도록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 두고 갈 거야.”

그러자 로젠게인이 불쑥 손을 뻗어 턱을 쥐었다. 순간 심장이 뜨끔했다.

“우리 거래에 전하의 목숨이 포함된 건 아십니까?”

“네가 나를 살리기로 했지.”

“네. 그러니 지금부터 그 목숨은 전하 게 아닌 제 것입니다. 함부로 죽는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내 나이가 더 많으니 너보다야 빨리……, ……읍!”

입술로 입이 막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자욱한 페로몬에 취해 로젠게인의 혀를 빨고 있었다. 그의 손은 그새 더 능란한 거짓을 배워 온 듯했다. 뺨을 쥐고 어르는 손짓이 안타까울 만큼 다정했다.

“앞으로 죽는다는 말을 하실 때마다 키스하겠습니다.”

젖은 입술이 제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모든 말이 속삭이는 밀어처럼 들려와 기가 찼다.

“너…… 이제 와서 이렇게 구는 이유가 대체 뭔데. 다정한 약혼자 노릇은 예전에 집어치운 거 아니었어?”

“거래 내용을 상기하십시오. 제가 떠난 이유를 말씀드리는 건 전하께서 우리의 약혼을 진짜로 여기게 되신 다음입니다.”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그 말 진짜 웃기지 않아? 약혼이 진짜인지 거래인지 그걸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설령 내게는 진짜가 됐다 하더라도 너는 여전히 아니라면, 그 약혼은 진짜일 수 있나?”

로젠게인이 입술을 댄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전하께서만 진심이시면 됩니다.”

“그건 왜,”

답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 키스가 시작되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떼려는 시도를 했지만 부질없었다. 로젠게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각인 반응이 없는 키스는 생각을 전부 녹여 없앨 만큼 뜨거웠다.

* *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소파에 앉아 기운 없이 턱을 괴고 있던 페란스가 중얼거렸다.

혼인이 거래된 그날을 계기로, 페란스의 인생은 급류를 탔다. 로젠게인은 공격적으로 혼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레시토 호텔을 매입해 혼인 전까지 머물 장소로 썼다. 듣기로는 레시토 호텔에 매일같이 어마어마한 짐마차들이 들락대고 있다고 했다.

혼인식 준비는 당연히 왕실의 몫이라 여기고 있던 키슬크가 뒤늦게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예복부터 식이 치러질 왕실 예배당의 꽃 장식까지 전부 마련된 탓에 키슬크가 손댈 수 있는 게 없었다.

뭐 하나라도 부족하면 꼬투리를 잡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게 다였는데, 그마저도 신통치 않아 키슬크는 요새 좀 우울한 상태였다.

페란스는 혼인과 관련해 새로운 법 조항과 계약서를 만드느라 바빴다.

대부분 자신이 죽은 뒤 로젠게인이 왕실에 아무런 위해도 끼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정작 로젠게인은 그가 뭘 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기에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지 회의감이 차오르곤 했다.

그 와중에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제 더는 궁정의들에게 숨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페란스의 망가진 손톱과 창백해진 안색, 그리고 홍채에 생기기 시작하는 붉은 반점을 발견한 궁정의들은 사색이 된 채 궁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 정도로 깊이 진행된 하시시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궁정의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었다. 십삼 년이나 복용한 하시시가 이제야 증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도 이제껏 본 적이 없노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어쨌거나 궁정의들은 아무도 쓸모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혼란이 조금 더해졌다.

어제 완성한 혼전 계약서에 따르면 그들의 혼인은 페란스가 중독을 치료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러니 치료를 명목으로 저를 죽이려 드는 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뭘까.

정말로 그저 혼인을 바라는 건가.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티 테이블 위에 약병을 늘어놓고 페란스가 먹을 약을 준비하던 알레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 혼잣말이었다.”

“……아아, 네.”

알레프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메넌이나 로젠게인은 조금씩 달라진 구석이 보인다면, 알레프는 여전했다.

여전히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그 사실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지금도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미묘하게 돌린 채 약을 만들고 있는 그를 보며 페란스가 입술을 실룩였다.

너만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나도 네가 내내 거슬렸다고.

그러니 조금 괴롭혀도 될 것 같았다. 페란스가 턱을 괸 삐딱한 자세로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았나? 어제 로젠이 혼전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걸.”

“압니다.”

“내가 죽어도 로젠은 너와 재혼하진 못해. 계약서에 아예 네 이름을 써 놨어. 네가 이름을 바꾸거나 신분을 바꿔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퍽!

이건 알레프가 약병을 하나 떨어트리는 소리였다. 다행히 병이 깨지진 않았지만 안에 든 내용물이 절반은 흘러넘쳐서 테이블보를 더럽혔다.

알레프는 약병을 주워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페란스를 쳐다보았다.

“……대체 제가 남작님과 혼인할 이유가 뭡니까?”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식의 표정이라 오히려 페란스가 더 놀랐다. 심지어 알레프는 평소보다 지금 그 말을 꺼낸 순간 자신을 더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하잖아.”

“뭐를 말입니까?”

“로젠을.”

“누가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네가.”

“……진심이십니까?”

“아니야?”

“…….”

“…….”

둘 다 기막혀 하며 서로를 노려보는 시간이 잠시 흘렀다.

“대체 왜 그런……, ……진 생각을 하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썩어 빠졌다고 말한 거 다 들렸어. 감출 거라면 제대로 감춰.”

“그 부분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으시는 것 같으니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왜 미치신 겁니까? 아직 광증이 나타날 때는 아닌데.”

“……이상한데.”

페란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진심으로 들려.”

“진심이니까요.”

알레프가 진저리를 치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왜……. ……후우.”

알레프가 내뱉은 한숨이 제 귀에는 설령 남작님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알파라 할지라도 나는 절대 혼인할 마음이 없다는 외침으로 들려와 몹시 이상했다.

“이제 드십시오.”

알레프가 크리스털 잔에 담은 약을 내밀었다.

찰랑대는 진득한 초록색 약물은 독이라고 해도 별반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여기서 네가 이 잔에 약이 아닌 뭔가를 섞는다 해도 아무도 모를 거 아냐. 예를 들면 천천히 죽는 독 같은 것 말이야. 너는 그렇게 나를 죽이고, 로젠은 아이를 앞세워 섭정 같은 걸 하다 슬슬 왕관을 쓸 때가 되었다 싶으면 너와 혼인하려 들겠지. 그게 애초에 나와 혼인하려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혼전 계약서가 주절주절 길어진 거고.”

“……외람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벌써 광증이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흠. 아니라는 건가. 그래도 뭔가 비슷한 다른 이유가 있겠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페란스가 독약 같은 약을 꿀꺽 삼켰다. 역시나 맛은 끔찍했다.

“매사에 그런 식이라면 광증이 빨리 나타나는 것도 이해가 어렵진 않군요.”

꼼꼼하고 매서운 눈으로 페란스가 약을 전부 삼키는 걸 확인하고 난 뒤 알레프가 말을 보탰다.

“전하께서는 하시시가 아니었어도 미치셨을 겁니다. 그 성격 때문에.”

“이제 무례도 개의치 않는 건 내가 곧 죽을 인간이 됐기 때문인가? 재미있는데. 계속해 봐, 어디.”

둘 다 별다른 악의가 없는데도 시선은 계속 창끝을 닮아 갔다.

“네가 매번 그렇게 날 죽이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게 로젠과 네 관계 때문이 아니라는 건가?”

“전하께서는 충성심이라는 말을 모르십니까?”

“그 눈빛은 충성심이라기엔 너무 열렬한 것 같은데. 그리고 네 말대로 그저 충성심이라면 오히려 나를 환영해야지. 나와 혼인하겠다는 건 네 주인의 뜻인데.”

“충성심에서 제게 이 혼인을 환영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알레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퍽!

페란스가 지팡이 끝으로 알레프의 발등을 눌렀다.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없게 된 것도 최근 일이었다.

“멋대로 입을 다물지 마라. 나는 네게 무례를 허락한 게 아니라 봐주고 있었을 뿐이다.”

지팡이 끝으로 발끝을 짓이기자 알레프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닌 척해도 아프긴 할 것이다.

“내가 네 목 하나를 못 딸 것 같나? 지금에 와서도 로젠을 이유로 너까지 인내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가 내 무조건적인 애정을 누리던 시절은 십삼 년 전에 끝났어.”

“애정이라고요?”

입을 다물고 고통을 흘려 넘길 생각이었던 알레프가 그 말에 표정을 바꾸었다. 진심으로 역겹다는 듯 페란스를 바라보며 그가 날 선 비웃음을 내뱉었다.

“애정이라니…… 대체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로 남작님을 기만하실 겁니까. 단 한 번도 남에게 애정 같은 걸 주어 본 적이 없으신 전하께서……,”

페란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데?”

“충분히 압니다.”

“그러니까 뭘 알고 있냐고. 내가 로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대체 무슨 거짓말을? 거짓말은 로젠과 네가 했지.”

“선대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는 사람을 시켜 그 부모를 죽이는 게 애정입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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