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3)화 (102/122)

103.

블루와렌의 횡포가 시작된 이후 레이나르 대공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성에 억지로 머물러 봤자 페란스는 콧등조차 훔쳐보기 어려웠다. 준비가 되면 청혼하겠다는 말도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가 떠났을 때는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었다 정도였는데, 막상 급한 처지가 되자 그 신경거리라도 붙들고 있어야 했나 후회가 일었다.

지금 온 답신은 루레티아의 여유 소금을 내년까지 빌려 달라는 요청에 대한 건이었다.

“……망할. 거절이로군.”

“그런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하.”

어차피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 또한 위스타드와 블루와렌의 신경전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섣불리 위스타드의 편을 들었다가 블루와렌과 마찰이 생길까 봐 몸을 사리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블루와렌이 질 확률이 높은 전쟁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소금의 소진율은 그보다 더 높았다.

다른 왕국으로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위스타드를 도울 이유가 없었고, 이번 일로 신흥 강국이 된 위스타드를 견제하려는 의도 역시 없지 않았다.

“다시 써.”

“이번에는 뭐라고 할까요, 전하?”

가죽 장갑 속에서 떨리는 손끝을 느끼던 페란스가 돌연 짓궂게 웃었다.

“내가 레이나르 하바트 대공자에게 청혼한다고.”

“네, 전하……?”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말에 왕실 비서관이 차마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숨어 있을 건지 두고 보자고.”

“전하, 무슨 말씀이온지…….”

“아, 그리고 이번 편지는 요란하게 보내. 마차는 백마가 끌게 하고 리본이라도 치렁치렁 둘러서 보내. 꽃 장식도 얹는 게 좋겠어. 누가 봐도 청혼이라는 걸 알게.”

“…….”

비서관이 연신 눈을 끔벅거렸다.

부탁을 거절한 공국에 외려 청혼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페란스의 주문대로 요란하게 장식한 왕실 마차가 카벨리카의 깃발을 휘날리며 루레티아 공국을 향해 출발했다.

키슬크가 힘을 쓴 덕에 페란스 1세가 드디어 결혼 상대를 정했다는 소문은 그보다 더 빠르게 번졌다.

* * *

길어도 이틀 안에는 반응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로젠게인이 위스타드 내에 없다고 할지라도 전언을 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예상은 크게 어긋나지 않아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알현 요청을 한 로젠게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대체 키슬크는 네게 왜 그렇게 후한지 모르겠군.”

아무리 기다렸다고 해도 눈을 뜨는 순간 침실에 나타나 있으면 심장에 무리가 가기 마련이었다.

페란스가 투덜대며 이제 막 눈꺼풀을 들어 올린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고개를 약간 틀자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로젠게인을 볼 수 있었다.

“야위셨군요.”

안부를 묻는 것치고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두 번씩 사는 지금에서도 속을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로젠게인 알란드는 진짜 빌어먹을 인간이었다.

“야위기만 했으려고. 손톱도 다 나갔다.”

페란스가 피딱지가 들러붙은 손끝을 들어 보이며 피식 웃었다.

“삼 주 전만 해도 이러진 않았어. 이게 다 네 탓이다. 네가 일주일 뒤에 나타나겠다는 약속을 어겨서 그래.”

“……그때 왔다면 제 청혼을 받아들이셨을 겁니까?”

그런 인간이 손을 끌어가 쥐는 동작은 자상했다. 살갗이 닿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몸짓은 걱정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걸 청혼이라 부른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지만. 그래, 어차피 너도 알고 있지 않았나? 다른 방도가 없게 만든 건 너잖아.”

“장기적인 소모전을 계획하셨다면 결국 제가 졌을 겁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시끄러워. 나한테 그럴 시간이 없게 만든 것도 너야.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끝이 부러져 나간 엄지를 로젠게인이 천천히 쓸었다.

“일주일은 너무 짧을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그때는 전하께서 버틸 만하다고 여기셨을 겁니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거절할 도리가 없도록 숨어 있었다고? 일부러?”

“그렇다고 하기엔 더 절박한 감정이었,”

탓!

페란스가 그의 손에서 제 손을 잡아 뺐다. 그리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얼굴을 후려갈겼다.

퍽!

제 몸 상태를 고려했을 때 꽤 묵직한 소리가 번져 온 게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손이 몹시 아팠고, 마음은 그보다 더 쓰라렸다.

“계속 지껄여 봐, 어디. 네가 절박했다고? 그렇게 절박해서 내 몸이 망가져 가는 걸 잘도 구경만 하고 있었겠네. 아예 내가 죽은 다음에 오지 그랬어. 그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꿀꺽, 로젠게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입에 고인 피를 삼킨 모양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중입니다.”

페란스가 입술을 비틀며 빈정거렸다.

“하는 김에 더 하게 해 주지. 네 제안은 거절하겠다. 네 말대로 죽어 가는 주제에 쓸데없이 비싼 몸이지만 네게는 안 팔아. 차라리 루레티아의 시원찮은 알파가 낫겠어.”

얼굴을 치느라 잡아 뺐던 손을 로젠게인이 다시 붙들었다.

“루레티아에서 청혼서에 답신을 보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페란스가 손을 뽑으려고 버둥대며 물었다.

“이번에는 그쪽도 협박하고 있나? 그러다 보면 블루와렌의 물건을 사겠다는 곳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마차에 손을 썼습니다.”

“뭐?”

“너무 눈에 띄기에 제게 보라고 하신 건 줄 알았습니다.”

“그야…….”

그런 의도이긴 했다.

“청혼서가 도착할 일도, 답신이 돌아올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로젠게인이 손을 놓고 페란스의 얼굴을 붙들어 이마를 맞댔다.

“제 청혼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어이가 없었고, 이유도 모른 채 속이 부글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마를 마주 대는 몸짓은 영원한 애정의 서약 같기도 해서 더 기가 찼다.

이래서 내가 너를 못 믿는 거야. 네 손과 네 입은 늘 서로 다른 말을 하니까.

“……조건은 전부 그대로 두고? 너는 나와 혼인할 뿐, 통치권은 없다. 너와 낳은 아이가 왕관을 쓴다 해도 아이의 이름은 카벨리카야. 네 이름을 함께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왕실의 일원이 되는 건 나와 혼인한 기간만이다. 이혼하거나, 혹은 내가 죽으면 너는 다시 콜더스트가 될 것이다. 이래도 받아들일 건가?”

그런 상황이라면 로젠게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그저 왕의 배우자가 될 뿐이었다. 페란스가 말한 대로 그는 귀족들을 상대로 한 사냥 파티나 주최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뭐? 좋다고?”

“저 역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일단 듣겠다. 말해 봐.”

“두 번 다시, 이전 수호자를 찾지 마십시오.”

“……음?”

뭔가 한참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던 페란스는 당황해 입을 벌렸다.

“빨간 머리는 이제 네 수중에 있는 거 아니었어? 블루와렌의 일을 내가 다 모르는 건가? 빨간 머리가 다시 네 자리를 넘볼 여지가 있는 거야?”

로젠게인이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블루와렌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두 번 다시 이전 수호자를 찾는 일이 없을 거라는 약속을 해 주시면 됩니다.”

“네가 다른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통치권을 얻어 낼 방법이라든가…… 아니면 나를 좀 더 괴롭힐 방법 같은 걸.”

눈썹에 이어서 눈가도 찌푸려졌다.

“위스타드의 통치권에 관심을 가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전 수호자를 전하의 삶에서 도려내는 일이 전하께는 충분히 괴로운 일 아닙니까?”

“음? 괴로울 것까지는……. ……아, 그렇다고 내가 그의 생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건 아니야. 그간 내 사람이 되어 준 것에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 내게 많은 일을 해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값을 넉넉히 치렀다고 생각하는데.”

중간에 말을 바꾼 건 자신이 너무 매정한 인간처럼 들릴지 걱정돼서였다.

“그게…… 다입니까?”

“감사로는 부족한가? ……아니, 그런데 너는 빨간 머리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왜 새삼 빨간 머리를 문제 삼고 있나.”

“싫어합니다. 그러니 찾지 마시라는 겁니다.”

딱 떨어지는 대답은 다른 여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걸 혼인 조건이랍시고 내세우니 이상하다는 말이었다.”

“저 역시 몹시 이상합니다. 전하께서 그자의 행방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시는 게.”

“그렇게 자주 어울렸던 건 아니야. 네 안전을 맡긴 뒤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려고 했던 것이었지.”

이상했다.

왠지 로젠게인이 아닌 마르스티엘이 그가 없는 곳에서 메넌과 어울린 일로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그때도 그랬나. 알파니까 달라는 소리였냐며 정색을 했었는데.

그건 자신이 제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마르스티엘은 어느 순간까지 비밀을 단속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잖아.

빨간 머리가 혹시라도 내 힘을 빌려 다시 수호자가 될 걸 경계하려는 게 아니라면. ……아, 그럼 그게 맞나 보군.

“네가 위스타드의 통치권에 관심이 없듯이 나도 블루와렌의 이권 싸움에 관심이 없다. 네가 아닌 다른 수호자를 거들 마음도 없어. 지금처럼 거래를 강요하기 위해 네가 미친 짓을 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블루와렌의 일에 끼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심해도 좋아.”

로젠게인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런 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아니면 그렇게까지 저를 우습게 보시는 걸지도 모르겠고.”

“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널 우습게 봤다는 건데.”

“전하께서는……,”

거기까지 말한 로젠게인이 입을 꾹 다물고 제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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