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일주일은 길었다.
그리고 몹시 짧기도 했다.
“전하…….”
“……흠, 읏?”
누가 조심스레 부르는 바람에 페란스가 꾸벅꾸벅 졸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심하십시오, 전하.”
키슬크였다.
그가 도무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입가를 좀…… 닦으시고요.”
“입가는 왜…… 아,”
졸기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왕실 서류에 잉크가 번져 있었다. 턱이 간지러운 걸 보면 제가 흘린 침 자국이라는 게 확실했다.
“아아, 젠장. 그 망할 인간.”
페란스가 욕을 내뱉으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키슬크는 이제 왕이 되셨으니 체통은 좀 지키셔야 되지 않겠냐는 점잖은 잔소리 대신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페란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벌써 사흘째 침실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잘 시간이 없다.”
페란스가 머리를 흔들어 남아 있는 잠기운을 털어 냈다.
“아직 마땅한 소금 공급처를 못 찾았어.”
“전하. 그리 서두르시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지요. 소금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다 늦어. 나중에 손쓰려고 하면 된통 당할걸.”
일주일 만에 소금 공급이 완전히 끊겼다. 왕실 길드에 속한 소매상들은 벌써들 앓는 소리였다.
비축분이 있으니 한 계절 정도는 어찌어찌 보낼 수 있다지만 그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블루와렌 쪽에서 공급을 중단했으니 다른 공급처를 찾아야 하는데, 이제껏 안정적으로 질 좋은 소금을 적당한 가격에 공급받던 위스타드에는 역으로 다른 공급자가 들어설 만한 공간이 전무했다.
이대로 가면 블루와렌의 유통망 밖에 존재하는 저급 소금을 터무니없는 바가지 가격에 사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도 블루와렌의 방해가 없다는 전제하에 가능했다.
소금 값의 상승은 결국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의미했다. 한 계절이 지난 뒤 물가가 얼마나 오르게 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벌써 소금 도매상들은 가격을 두 배로 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금이 다가 아닐 거야.”
소금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단 소금 값을 올려놓은 뒤 차근차근 치명타가 될 만한 필수품의 공급 줄을 죌 것이다. 그간 블루와렌과 너무 밀접하고 원활한 거래를 해 왔다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된 게 이름을 알 만한 소금상들은 죄다 블루와렌과 연관이 있는 거야?”
새삼 블루와렌에서 손을 대지 않은 물건은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블루와렌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산되고 판매되는 소금조차 크든 작든 블루와렌이 연결되어 있었다. 블루와렌의 화물선을 쓰든지, 아니면 블루와렌을 소매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게…… 송구하옵니다, 전하. 제가 알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키슬크가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물은 게 아니다. 그럴 필요 없어.”
탁!
페란스가 손에 쥐고 있던 문서들을 탁자 위에 팽개치고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잠을 못 잔 탓인지 어지럽고 두통이 일었다. 손끝이 약간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냥 혼인하겠다고 할까. 답이 영 안 나오는데.”
페란스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양손을 깍지 끼고 이마 위에 얹었다.
사실 소금 공급처를 알아볼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젠게인이 하려는 짓은 위스타드에게 치명적이었지만 그만큼 블루와렌에도 커다란 손해였다. 게다가 손해는 이제 시작이었다.
통치권도 포기하겠다는 인간이 대체 무얼 위해 그만한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건지 이젠 좀 헷갈렸다.
-모르시나 봅니다. 그 몸 하나가 제게 얼마나 비싼지.
그야 비싸기는 비쌀 것이다. 제 이름은 카벨리카니까.
그런데 네게 유난히 더 비싸다는 건 무슨 소리야.
“혼인이라면…… 루레티아의 대공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키슬크가 조용히 눈치를 보다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로젠.”
“아…….”
키슬크가 반들반들한 이마를 연거푸 닦아 냈다.
“생각을 달리하시는 것이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미치도록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을 하다 보니 알 것 같았다.
-그거라도 궁금해하시니.
로젠게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혼인을 해야 알려 주겠다잖아.”
“콜더스트 공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응. 못돼 먹었지. 그런 걸 보면 성격은 정말 안 변하는 모양이야.”
키슬크가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외람되오나 전하, 신이 기억하는 콜더스트 공은 아주 반듯한 분이었습니다. ……간혹 고집이 세질 때가 있었습니다만.”
“음? 못되지 않았어? 심술 맞잖아.”
“신이 알기로는 그렇지 않사옵니다. 대체 무슨 못된 짓을 했다고 그리 여기시는 겁니까?”
“그야…….”
말을 멈춘 페란스가 생각에 잠겼다.
아……. 왠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로젠게인은 종종 영문 모를 소리를 해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 때가 있긴 했지만 심술궂진 않았다. 그랬던 것은 마르스티엘이었다.
“……성격이 변했네.”
지금은 자신이 아는 마르스티엘의 성격 그대로였다. 사람이 가장 아픈 부분을 잘도 골라 아무렇지도 않게 푹 찔러 버렸다.
어쨌거나 같은 인간이라는 얘기였다.
……그럼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게 맞나. 같은 인간이니까.
머리가 아파졌다.
페란스는 너저분하게 널린 문서들을 바라보다 일단 정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손을 뻗어 주섬주섬 끌어 모았다.
“전하. 제가 거들겠나이다.”
키슬크가 후다닥 끼어들었다.
“아니, 됐……,”
탓!
키슬크를 말리려던 손이 탁자 모서리에 부딪쳤다. 검지 손톱 하나가 깨지며 피가 주르륵 흘렀다.
“전하!”
사색이 된 키슬크가 페란스의 손가락을 제 소맷자락으로 감쌌다.
약해진 손톱이 부서지는 일은 계속 겪었다지만 오늘은 좀 아팠다. 손톱이 절반은 날아간 느낌이었다.
“……이제 됐을 거야.”
피가 어느 정도 멎자 페란스가 키슬크의 손을 가볍게 밀었다. 키슬크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궁정의를…… 안 되겠지요.”
“응. 말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아직은.”
피가 고인 손톱을 들어 올리던 페란스의 안색이 변했다. 키슬크가 당장에 눈치챌 정도였다.
“전하? 왜 그러시는지요?”
“…….”
페란스는 답을 피했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부러져 나간 손톱 밑 살색이 거뭇하게 변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겠군.
제 몸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망가지는 중이었다.
혹시 사람의 수명 같은 건 정해져 있는 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내가 죽었던 그날에 죽게 되는 걸까.
심장께에 서늘하게 번지는 공포를 페란스가 애써 삼켰다.
그렇다면 더는 잴 수도 없겠군.
괜찮은 알파를 골라서 혼인하고 각인을 푼 뒤 후사를 잇겠다는 계획은 순간 깡그리 뭉개졌다.
이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오늘 로젠이 올 거야.”
페란스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선택이 지난번과 똑같이 결국은 내 죽음이 된다 하더라도.
“방을 준비해 둬.”
그래도 이번에는 끝까지 저항해 줄게.
“알겠나이다, 전하.”
마침 오늘이 일주일째였다.
그러나 로젠게인은 자정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 * *
“더는 못 참아.”
일주일이 이 주일이 되었다. 이 주일이 삼 주일이 되었다.
며칠을 더 채우면 한 달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게 아닐까 했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그 어떤 태풍도, 그로 인한 선박 사고도 없었으며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죽었다는 소문도 없었다.
그리고 위스타드에 대한 만행도 여전했다. 소금 공급을 끊더니 이번에는 가죽이었다. 가죽이 쓰이는 곳이 그렇게나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페란스는 이번 일로 처음 알았다. 가죽 다음에는 면포가, 그다음에는 땅콩기름과 씨감자였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한 달 사이에 물가는 다섯 배 이상 치솟았다. 고작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기도 어려웠다.
어쨌거나 로젠게인은 무자비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구혼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문제는 페란스에게 청혼을 수락할 결심이 선 와중에도,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개자식 같으니.”
페란스가 울컥 더워진 숨을 내뱉었다.
손톱이 부서지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무서운 속도로 독성이 번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제는 장갑을 낀 손에도 핏기가 묻어 나와 페란스는 두껍고 색이 진한 가죽 장갑을 껴야 했다.
“전하. 루레티아에서 답신이 왔나이다.”
문서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책상 앞에서 혼자 성질을 부려 대는 페란스의 눈치를 보던 왕실 비서관 하나가 견디다 못해 말을 꺼냈다.
“그럴 거면 일주일이라는 말은 왜 꺼내서……. ……뭐가 와?”
“루레티아의 답신이 왔나이다.”
사실 한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전하께서는 아예 귀가 머신 듯 보여 차마 바로 말씀을 올리지 못했다는 애절한 변명이 비서관의 떨리는 손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뜯어서 읽어 봐.”
페란스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까닥였다.
아직까진 잘 감추고 있었지만 조만간 몸이 온전하지 않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도 약간 목소리를 높인 대가로 현기증이 찾아왔다. 태연하게 손짓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뒤에는 곧장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려 떨림을 감춰야 했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