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1)화 (100/122)

101.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렸다.

그 사이사이의 기억은 혼미하다 못해 혼란했다. 어떤 기억에서는 로젠게인이 저만큼이나 황홀한 얼굴로 더없이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고, 다른 기억에서는 감정을 지운 얼굴로 무자비하게 성기를 박아 대고 있었다.

때때로 혼란은 시간마저 뒤섞었다. 죽기 전의 자신이 마르스티엘과 정사를 나누는 중인지, 아니면 이름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로젠게인과 뒤섞여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페란스가 순간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없……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각인 반응이 시작되기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페란스가 홱 몸을 일으켰다.

“윽!”

그러다 신음을 내며 시트 위로 고꾸라졌다.

그 몸을, 로젠게인이 받아서 다시 자리에 눕혔다.

“여기 있습니다. 저를 찾으시는 거라면.”

“아……,”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안도하는 것도 잠시였다.

페란스를 눕혀 놓은 로젠게인은 침대와 간격을 벌리고 놓아 둔 의자에 앉았다.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자세는 근사한 것과는 별개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명을 따랐으니 이제 발레스 해협을 가지고 하는 협박은 그만두실 겁니까?”

“뭐…… 그래야지.”

그런데 말투가 왜 저렇게 차가워. 내 귀가 잘못된 건가.

페란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로젠게인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주제에 말 몇 마디 나누다 정염에 불타올라 몸을 섞은 인간이 저 따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면 안 되는 일 같았다.

“좋군요. 그럼 다시 협상을 했으면 합니다, 전하. 각인을 깨고 전하의 목숨도 살려 드리겠습니다. 그거라면 계산이 달라지겠습니까?”

“너는 대체, 왜 매번 그따위인 거야.”

페란스가 울컥 성질을 냈다.

그에게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럴 거면 어젯밤 찾아오지 말지 그랬나. 너는 그렇게 절박한 키스를 하지 말아야 했어. 네가 내게 증오가 아닌 어떤 다른 감정이 있다는 표시를 절대로 내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바라는 게 혼인이라면 거절이야. 거래로 내 몸을 사고파는 짓은 안 해. 네가 잊었나 본데 내 이름은 카벨리카다.”

“저와 혼인하는 것보다 죽는 게 낫습니까?”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었어!”

“전부 기억합니다. 조사 하나 틀리지 않고.”

“그런데도 그따위로 말해야겠나?”

“저는 지금 저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정중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로젠게인이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양쪽 팔꿈치를 허벅지에 괴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그가 눈높이를 맞추었다. 푸른 눈은 오늘따라 빈틈없이 얼어붙은 호수 같았다.

“그럼 이렇게 묻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아닌 누구와 혼인할 생각이십니까?”

“……내가 그걸 네게 말해야 하나?”

“현실적인 면을 감안하면 루레티아의 대공자 정도가 전하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최상의 혼인 상대일 겁니다. 운이 좋다면 그런 알파와도 각인을 풀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몇 년은 걸릴 테고…… 전하께서 몇 년간 더 살아계신다면 아이라도 하나 낳을 수 있겠군요. 하지만 태내에서 하시시의 독성을 받아먹고 성장한 아이가 멀쩡히 태어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산하거나, 아니면 장애아를 낳으실 겁니다.”

“이리 와. 한 대 치게.”

몸을 일으킨 페란스가 주먹을 쥐고 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로젠게인이 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출산을 하고 나면 전하는 돌아가시게 될 겁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카벨리카의 핏줄은 결국 끊깁니다. 그리고 저는 루레티아 공국을 파산하게 만들 겁니다. 그다음에는 위스타드를.”

어이가 없는데, 이가 갈렸다.

“협박인가?”

“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각인을 푸는 데 루레티아의 대공자보다는 차라리 빨간 머리가 더 쓸모 있을 겁니다.”

“기가 차서……. 네가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게 설마 빨간 머리와 혼인하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각인을 깨는 시간이 좀 더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빨간 머리라면 재주가 있는 자니 어떻게든 하시시의 독성을 덜어 낼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르고.”

“아주 친절한데 그래. 사실 나도 빨간 머리가 제법 괜찮은 혼인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이유로 빨간 머리와 혼인은 못 하십니다.”

“……? 뭐라는 거야.”

“빨간 머리는 제 손에 죽을 테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죽여야겠군요.”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니까 나와 혼인하는 꼴이 보기 싫어 죽이겠다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지 않을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냥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피부에 따끔하게 와 닿는 공기가 너무 싸늘했다.

진심인가.

왠지 그런 것 같은데.

“빨간 머리는 내가 아니라 너에게 더 쓸모가 많을 텐데. 그러니 이제껏 안 죽였겠지. 괜히 내 핑계 대지 마.”

“이제껏 살려 둔 이유는 전부 전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숨을 붙여 두는 게 전하께서 계속 헛생각을 하시게 만드는 이유라면 죽이는 게 낫습니다. 빨간 머리를 살리고 싶으시면 다른 이유를 대십시오. 더 절박하고 애타는 이유를.”

“다른 이유…… 그걸 지금 내게 대라는 건가?”

메넌을 살려 둘 이유를 자신에게 묻는 이 상황이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빨간 머리는 네가 데려온 사람이야. 내 사람이 아니라고.

“차마 말을 못 하시겠습니까? 오늘 당장 죽이겠다고 해도?”

“아니, 그게…… 젠장, 할 말이 생각 안 나는 걸 어쩌라고. 빨간 머리는 내가 아니라…… 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진실 외에 다른 핑계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페란스가 포기했다.

“그래. 내가 빨간 머리와 혼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면 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시는 그를 위스타드로 부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십시오.”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빨간 머리를 살리려고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건데. 말했듯이 빨간 머리를 죽이지 말라고 한 건 너를 위해서야. 나중에 고마워나 해.”

페란스의 말에 로젠게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말씀은 의외군요.”

믿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페란스는 뭔가 억울한 기분이었다. 괜히 입술을 질겅이고 있으려니 로젠게인이 손을 뻗어 제 입술을 바로 폈다.

“다른 거래도 그렇게 받아들이십시오. 전하께 손해가 되는 거래는 아닙니다.”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하는데. 나는 이미 거절하겠다고 했어.”

“결정하신 겁니까?”

“그래.”

“유감이군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블루와렌은 위스타드에 소금 공급을 끊겠습니다. 부디 왕실에 소금 비축량이 넉넉하기를 바라겠습니다.”

페란스의 안색이 변했다.

“미쳤어? 그렇게 나오겠다고? 그건 새로운 수호자가 된 네게도 손해 아닌가?”

“전하께서 다른 알파와 혼인하시는 것만큼은 아닙니다.”

이쯤 되면 대답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도 또다시 묻고 싶어졌다.

“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나와 혼인하겠다는 이유가 뭐야? 네게 공동 통치권이 결코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건 알잖아. 나는 이미 왕이다. 왕의 배우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사냥 파티를 여는 일 따위가 고작이야. 너는 왕실에 네 피를 조금 섞겠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협박을 하는 건가? 수지 타산이 조금도 안 맞는 일이잖아. 납득할 수가 없다.”

“전하께서는 본인의 몸값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드르륵, 탁.

로젠게인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시선을 따라 고개가 위로 들렸다.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거리감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기 위해 꺾은 고개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 가는 그 몸 하나가 제게 얼마나 비싼지.”

“……?”

“제 의도를 의심하시니 그럴 필요가 없도록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혼인 이후 제가 다른 오메가 정부를 만들 일은 없을 것이고, 장차 태어날 제 아이의 통치권을 넘보지도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관련 법이라도 새로 만드십시오. 따르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대체 뭘 얻어 내려고……,”

그 말에 로젠게인은 진저리를 치듯 이를 물었다.

“일주일 시간을 드릴 테니 답을 준비하십시오. 일주일 후 답을 들으러 오겠습니다.”

로젠게인이 휙 몸을 돌려 침실을 떠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페란스가 문이 닫히기 전 소리를 질렀다.

“빨간 머리는 죽이지 마! 그건 이미 합의한 거야!”

……쾅!

대답을 대신해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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