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흘은 턱도 없는 시간이었다.
십이 년간이나 흔적을 지우고 살았던 로젠게인이 이제 와서 왕실 근위대에 순순히 잡혀 줄 리가 없었다. 수배령은 애들 장난처럼 무의미했고 페란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을 늘렸다. 키슬크는 요새 전하의 심기가 불편하고 또 불편하니 다들 숨소리를 죽이고 다니라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와중에 루레티아의 대공자가 찾아왔다. 일단 신분이 있으니 함부로 박대할 수는 없는 처지라 그것도 짜증스러웠다.
“벌써 돌아간 줄 알았는데.”
페란스가 일부러 찻잔을 달칵대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청혼은 거절한다고 듣지 않았나?”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하.”
레이나르 하바트는 페란스와는 달리 소리 하나 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고 곧장 떠날 마음이 들진 않더군요.”
겉모습은 쳐다보기에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로젠게인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이쪽의 청혼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제 감정이라는 건 놀라울 정도로 간사해서, 애초에 그를 괜찮다고 생각했던 검은 머리나 푸른 눈 같은 이유가 이제는 하찮아졌다.
어차피 진짜는 따로 있으니까.
“저런.”
그러다 보니 대하는 데도 성의가 없었다.
레이나르 하바트가 무심히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있는 페란스를 꼼꼼히 훑다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묻진 않으실 모양입니다.”
“그거야 공의 마음이지. 이즈음 위스타드는 따듯해질 계절이라 관광을 하기에도 괜찮고.”
“수배령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블루와렌의 새 수호자 앞으로.”
레이나르 하바트는 남에게 대화를 맞추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게 왜?”
“처음에는 그자와 다른 인연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처음 본 사람치고는 반응이 격렬하시기에.”
“그랬나?”
그가 뭐라든 별 상관이 없었다. 페란스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차만 홀짝였다. 원래 왕의 다과 시간은 오후 네 시였지만 미리 시간을 앞당겨 먹는다고 생각하고 그 시간에는 집무실에 있으면 되리라는 계산 중이었다. 비서관들이 앓는 소리를 좀 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잘생긴 알파더군요. 그래서 마음이 상할 뻔했습니다.”
“잘생기긴 잘생겼지.”
그런데 왜 네가 마음이 상하는데?
페란스가 힐긋 시선을 돌려 레이나르 하바트를 쳐다보았다.
고상하게 차를 한 모금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이제껏 거래하신 상대는 이전 수호자였고, 그의 행방이 묘연해진 일로 심기가 언짢으셨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어…… 음?”
“섣불리 다가서진 않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조급함을 싫어하시는 듯하니.”
자신은 느린 것보단 차라리 성급하게 구는 쪽이라 여겼던 페란스에게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런 줄은 나도 미처 몰랐는데.”
“제가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찾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런 말을 하는 자가 레이나르 하바트라는 게 유감일 뿐이었다.
“대가가 있을 거라는 말로 들리는데.”
“아니요. 감히 위스타드의 페란스 1세께 어느 누가 대가를 운운하겠습니까.”
그게 과연 정말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방법을 알고 싶군. 위스타드는 항구를 사흘이나 폐쇄했는데도 찾아내지 못한 인물을 손님인 그대가 어떻게 찾을 것인지.”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페란스가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제 섣부른 청혼을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거절하면 청혼은 자연히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닌가?”
“기억에서 지워 주십시오. 저는 청혼자가 아닌 그저 손님으로 위스타드에 머물겠습니다.”
“쫓아낼 생각은 없었어.”
“그리고 전하께서 준비가 되시면 그때 청혼하겠습니다.”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공이 그런 마음이라면 도움은 사양하지.”
“그렇다면 지금 한 말조차 잊어 주십시오. 대를 이어 돈독한 우정을 가꿔 온 카벨리카 왕실에 친구의 이름으로 도움을 제공하겠습니다. 제 도움이라면 늦어도 이틀 안으로 블루와렌의 연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도움이 어떤 건데?”
레이나르 하바트가 귀찮은 존재가 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란스는 유감스럽게도 열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로젠게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귀찮은 청혼자건 날파리 같은 알파건 뭐든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루와렌의 서쪽 항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레스 해협은 루레티아 공국의 영해입니다.”
“……길목을 막겠다는 협박을 하겠다고?”
“양국의 우정을 위해서라면.”
“좀, 극단적인데. 공국의 손해도 막심할 텐데 말이야.”
“그래서 가급적이면 전하께서 시간을 길게 끌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
“흐음…….”
이 상황에서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내가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찾는 이유가 달리 있다고 하면? 그래도 도울 텐가?”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는 콜더스트 남작이고, 내 약혼자다. 십삼 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가…… 소문의 콜더스트 남작이었습니까?”
레이나르 하바트가 입술을 꾹 물었다.
한참 전의 일이긴 했어도 기억하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페란스가 공개적으로 청혼을 받겠다고 했을 때, 이미 예전 약혼에 대한 소문들이 한차례 돌았다.
대부분은 어린 콜더스트 남작을 죽은 사람 취급 했다. 당시의 섭정 아만다리스가 콜더스트 남작을 죽였고, 화가 난 페란스 1세가 섭정을 아무도 모르게 죽여서 복수했다는 소문이 가장 흔했다.
재미있게도 둘 다 시체가 나오지 않았기에 소문은 그저 소문으로만 남을 수 있었다.
“살아 있었군요. 그럼 십이 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도 모른다.”
“……네?”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럴 것이다. 페란스도 아직 황당해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냥 사라졌어.”
“그리고 어제 나타난 겁니까?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돼서?”
“어이가 없긴 하지.”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다고 합니까?”
“나도 몰라. 말을 하지 않고 사라졌어.”
“……그래서 찾으시는 것이로군요.”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길 만도 하지. 사람을 저 좋을 대로 무슨 가구 취급을 하고 있잖아. 내가 언제든 같은 자리에 있는 물건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니고.”
“콜더스트 공을 찾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일단 왜 사라졌는지 이유부터 들어야겠어.”
“…….”
레이나르 하바트가 질근대던 입술을 내뱉었다. 발가벗겨 놓아도 대공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반듯한 자세로 그가 페란스를 마주했다.
“전하께 그런 약혼자는 필요 없습니다.”
“……그건 그대가 할 말이 아닌 듯한데.”
“그러니 그자의 입으로 직접 듣고, 확인하십시오. 마음의 정리가 될 겁니다.”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공의 청혼을 거절했어.”
“잊기로 하셨습니다. 잊어 주십시오.”
“요구하는 게 많군.”
“그렇게 들렸다면 송구합니다. 요구가 아니라 제 바람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그것도 요구잖아.
해 달라는 게 많기도 했다. 그 요구를 다 들어주면 도움 정도는 받아도 될 것 같았다.
이것도 다 네 탓이야.
페란스가 입술을 비죽였다.
네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짓은 안 했어.
“그렇다면.”
페란스가 찻잔을 들어 술잔처럼 레이나르 하바트의 찻잔에 챙 부딪쳤다.
“나는 공의 요구를 들어주고, 공은 내게 도움을 주는 걸로.”
“좋습니다.”
둘은 미지근한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웃음을 지었다.
너무 알파처럼 구는 것만 빼면 레이나르 하바트는 아예 써먹지도 못할 인간은 아니었다.
루레티아의 대공자는 궁에 머물며 블루와렌에 전언을 보냈다. 페란스에게 블루와렌과 소통하는 방법이 따로 있듯이 루레티아 공국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나르 하바트는 발레스 해협의 통행세 문제를 두고 이틀 안에 답을 달라는 말을 전했다.
로젠게인이 나타난 건 이틀 뒤가 아니라 그날 밤이었다.
* * *
“어이가 없네, 진짜.”
당황한 근위대가 우스꽝스러운 그림처럼 로젠게인의 뒤를 막았다. 수배령이 떨어진 인물이 태평하게 궁으로 와 알현 신청을 했다는 사실에 아직도 적응을 못 하는 눈치였다.
“나가 봐, 다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하?”
“그래.”
근위대장이 주춤대다 근위대를 이끌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탁.
페란스가 뭔가를 쓰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괜히 손이 저릿대는 기분이었다.
“왜 찾으셨습니까?”
그사이 로젠게인은 원래의 검은 머리가 되어 있었다.
가지 말라는 사람을 뿌리치고 간 주제에 염색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
진짜 열받는데.
“찾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다른 알파를 끌어들일 정도로 다급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열받아.
“가까이 와. 짜증나니까 올려다보게 하지 말고 앉아.”
“명하신다면.”
로젠게인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에 앉을까요?”
“여기에.”
페란스가 책상 위의 물건을 팔로 쓸어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로젠게인이 작게 웃었다.
“이상한 취향이 생기신 모양이군요.”
그는 모르겠지만 이 책상에는 둘만 아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상처 난 안쪽에 연고를 바르겠다며 그가 이 책상 아래서 하던 짓이 생각나 지금도 가끔 곤혹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네가 내 취향을 두고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닐 텐데. 앉아.”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