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페란스가 중얼거렸다.
“각인 반응이 약해졌나 보군.”
“페로몬을 풀어 주십시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날에도 너는 그런 말을 했어.
다른 게 있다면 말리려 드는 알레프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알레프가 왜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알았다.
네가 나한테 살갑게 굴 때마다 나를 죽이고 싶었을 거야.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거래는, 다시 생각해.”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밀어냈다. 자유로워지려던 턱이 도로 붙들렸다.
로젠게인이 턱선을 빠듯하게 당긴 채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 네가 제안한 두 번째 거래는 다시 생각하라고.”
“각인이 벌써 깨졌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로젠게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라도 물고 있는지 턱 옆에 핏대가 울큰 솟았다.
“……아니면. 한번 자 보니 다른 알파가 더 낫겠다고 판단하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야.”
페란스가 다시 한번 로젠게인을 밀어냈다.
이대로 다정하게 구는 그를 보고 있으면 한 번 죽은 게 소용도 없이 다시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같은 방법으로 죽는 것만큼은 피해야지.
그러려고 두 번씩이나 산 게 아니니까.
“나는 너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 그리고 너 역시 나와 혼인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 낼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로젠게인의 표정에 금이 갔다.
“혼인할 마음이 없……. ……역시 그랬던 겁니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너도 혼인 같은 걸 거래 수단으로만 여기지 마. 네 오메가를 좀 더 아껴. 그가 충성스럽다는 건 알지만 네 혼인까지 진심으로 환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약혼자의 신분으로 다른 오메가와 관계하는 걸 두고 볼 마음은 없어. 두 번은 속고 싶지 않아.”
“대체 무슨,”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란스가 그러고도 턱이 멀쩡하냐는 표정으로 로젠게인을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누가 봐도 미치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숨길 생각은 하지 마. 알고 있으니까.”
“전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뭘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네 오메가.”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턱을 놓았다. 대신 시트를 움켜쥐었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 오메가가 누굽니까?”
“알레프.”
“뭐……라고?”
“너도 그를 사랑하잖아.”
“…….”
로젠게인이 다시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제껏 그런 미친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럼 아니야? 알레프가 네 오메가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할 노릇이지. 그 사고에서 함께 살아났던 순간부터 너희들은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였을 텐데.”
로젠게인이 헛숨을 내뱉다 입술을 비틀었다.
“전하께는…… 대체 제가 어떤 인간인 겁니까. 아직도 부모를 잃고 애정에 굶주려 곁에 있는 자라면 아무에게나 매달리는 어린애인 겁니까?”
그런 인간이라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쉽게 나를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건…… 아니, 내가 한 말을 그렇게 왜곡하지 마라. 네가 뭐라고 한들 사실이 사실이 아닌 게 되진 않아.”
“전하야말로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이라 우기고 계시잖습니까. 대체 어쩌다 그런……,”
로젠게인이 말을 끝맺는 대신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면 십이 년이나 기다렸던 게 헛수고였군요.”
로젠게인이 벌떡 일어섰다.
벗어서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집어 든 그가 몸을 물렸다.
“다음 발정기 때 뵙겠습니다, 전하.”
“아니, 잠깐.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났잖아. 그래서 거래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기존의 거래를 잇는 것으로 얘기가 된 건가? 약혼이나 각인 같은 개인적인 일은 없이?”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아주 낯선 표정을 지었다.
“이럴 거면 첫눈에 알아보지도 말지 그러셨습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쿵!
로젠게인은 대꾸 없이 그대로 문을 닫고 떠났다.
“망할 인간 같으니.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페란스가 버럭 성질을 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고꾸라졌다.
눈만 떴다뿐이지 몸 상태는 형편없었다. 그 잠깐을 일어서려 했다고 두 다리가 푸들푸들 떨려 왔다.
“하, 제길.”
페란스가 이를 갈며 시종을 부를 때 쓰는 끈을 더듬어 잡아당겼다.
잠시 후 키슬크가 달려왔다.
“전하! 깨어나셨……!”
“됐고, 가서 로젠을 붙잡아 와.”
페란스가 무사히 또 한 번의 발정기를 넘긴 사실을 기뻐할 틈도 없이, 키슬크가 냅다 침실을 달려 나갔다.
* * *
결론은 실패였다.
로젠게인은 십이 년 동안 쓸데없는 잔재주들을 배운 듯했다. 명령을 받은 근위대가 부랴부랴 움직였지만 로젠게인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퍽!
“빌어먹을.”
이제 좀 살 만해진 페란스가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키슬크는 꼭 자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어깨를 움찔했다.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발정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으셨사옵니다.”
“괜찮아. 평소에 비하면.”
“네? ……네에? 정말이옵니까?”
“억제제를 쓰지 않았다.”
“네? 네에?”
반색을 하던 키슬크는 이어지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억제제를 안 쓰고 발정기를 보내셨다고요? 그러니까, 여느 오메가들처럼……?”
페란스가 쓰게 웃었다.
“응. 그렇게 됐어.”
“그게……? 그게? 그럼 혹시 각인이……?”
“그건 아직 아니고. 그런데 조만간 깰 수 있을 것 같아.”
“저언하!”
키슬크가 침대로 왈칵 달려들었다. 순간 페란스는 그가 자신을 끌어안을 줄 알고 당황했는데, 키슬크는 조금 전까지 로젠게인이 무릎을 대고 앉았던 그 자리에 몸을 던지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전하…… 저언하! 참으로 다행…… 흐엉, 신이시여!”
“…….”
그래서 알았다. 왜 로젠게인이 그 자리에 그 자세로 앉아 있었는지.
키슬크가 제 손을 끌어와 쥘 수 있었다. 손등에 이마를 대고 엉엉 울 수 있었다. 로젠게인은 그보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 테니 머리칼을 쓸거나 뺨을 다독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만 울어. 아직 풀린 건 아니야.”
“그래도, 끄윽, 전하……. 무려 십이 년…… 아니, 십삼 년씩이나…… 끄흡, 흐윽!”
“울지 말래도.”
오늘은 다들 제 말을 듣지 않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도 키슬크는 한참을 더 울었다. 각인이 풀어지는 날에는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그럼 수배령을 내릴까요, 전하?”
키슬크는 손수건을 두 개나 흥건히 적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퉁퉁 부운 눈으로 여전히 유능한 시종장인 척 점잔을 떠는 게 잘 어울린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수배령이라…… 그래. 그렇게라도 해.”
로젠게인이 사라지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던 페란스가 울컥 성질을 냈다.
“망할 인간. 왜 제멋대로 가 버리는 거야. 그럴 거면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 같은 건 하지도 말지. 그래서 다른 오메가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예? 다른 오메가라니요……? 설마 콜더스트 공께요?”
내뱉고 보니 그가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다.
-이럴 거면 첫눈에 알아보지도 말지 그러셨습니까.
“뭐야, 그건. 내가 첫눈에 알아봐서 좋았다는 말로 들리잖아.”
혼자 투덜대던 페란스가 노심초사 제 표정을 살피던 키슬크에게 답을 해 주었다.
“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네. 그런데 믿기지는 않아.”
“콜더스트 공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십이 년이잖아. 다른 오메가가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글쎄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도 십이 년간 다른 누구도 곁에 두지 않으셨사옵니다.”
“나야 누굴 곁에 둘 상황이 아니었잖아.”
“콜더스트 공에게도 이유가 있을 수 있지요.”
“이제껏 나를 떠난 이유가 다른 오메가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가장 말이 되는 소리 아냐?”
“콜더스트 공께서는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음.”
“그럼 거짓은 아닐 것이옵니다.”
페란스가 빤히 쳐다보자 키슬크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십이 년간 억제제를 드신 것을 알고는 콜더스트 공은 몹시…… 괴로워 보였습니다. 더 일찍 돌아왔어야 한다고도 했사옵니다. 잠드신 전하의 곁을 지키는 모습은 신의 눈에 진실한 애정으로 보였사옵니다.”
“……그랬나?”
“틀림없이 그랬사옵니다. 신을 믿으소서, 전하.”
“…….”
사람 보는 눈이라면 키슬크는 믿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다른 시간에서 키슬크는 십삼 년 동안이나 아만다리스가 하는 짓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믿고 싶은 이유가 뭘까.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네 눈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군.
그렇게 겪고도 여전히 네가 던지는 거짓들을 애정이라 믿고 싶어 하는 불쌍한 미치광이로 보이는 게 아닐까.
“네가 믿는다면 나는 믿지 말아야겠군.”
키슬크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어째서 그리 말씀하시는지요.”
“로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니, 전하. 왜 그런 생각을 지니고 계시옵니까?”
“그럴 수 없게 되어 있거든.”
“……네?”
“돌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와 약혼을 계속 잇겠다고 말하는 이유도. 나는 그게 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 자기가 왕관을 쓸 수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꼭 아닌 모양이야. 그럼 이유가 될 만한 게 또 뭐가 있겠나?”
키슬크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전하, 그건 너무…… 너무 끔찍한 생각이 아닙니까. 감히 어느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나이까.”
그가 사람을 의심하는 데 영 재주가 없는 이유가 있었다. 키슬크는 선량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자신처럼 선량하다고 무의식중에 믿어 버렸다.
“너무 미워하면 그럴 수도 있게 돼.”
“하오나 전하, 콜더스트 공에게 전하를 미워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음……. 그게 문제긴 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
네가 인생을 바쳐서까지 나를 미워할 이유는 가까스로 피했다는 것.
그런데 왜 네가 하는 짓은 똑같은 걸까. 그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니까 새삼 열이 받는데.”
생각을 잇던 페란스가 짜증을 냈다.
“망할 인간. 그러고 가 버리다니.”
하여간 붙잡아 와서 물어보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발정기 때 보자고 했나.
적어도 두 달은 필요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영원처럼 멀게 느껴졌다.
너는 내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근위대장을 닦달해. 사흘 안에 찾아서 데려오라고 해.”
“사흘이요? 그건 너무 빠르지 않사옵니까? 만일 위스타드를 떠났다고 하면,”
“아, 그렇지. 항구부터 뒤져. 필요하다면 항구를 폐쇄해도 좋다.”
“아니, 그건 너무……. 아니, 알겠나이다.”
키슬크가 사라졌다.
사흘이라고 해서 짧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부재가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페란스는 그렇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