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95)화 (94/122)

95.

그랬다면 갑자기 사라진 것도 말이 될지 몰랐다. 열네 살까지는 마르스티엘이 그랬던 것처럼 뻔뻔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혼자를 저버리고 다른 오메가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페란스가 삐딱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던 고개를 반듯이 했다.

누가 정해 놓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콜더스트 부부는 죽고, 그 아들은 함께 살아남은 가신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고. 그래서 남작의 아들은 신분도 버리고 원래 이름도 버릴 것이라고.

그래서 남작의 아들이 버리는 것 중에 자신이 포함된 모양이었다.

“그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그게 각인을 풀어 드리는 대가입니다.”

“……그건 나와 혼인하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

페란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걸까.

몇 개는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바뀌어 봤자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네 아이를 낳고?”

“……좀 이른 얘기긴 하지만 그러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그러다 내가 죽으면 너는 아이 대신 왕관을 쓰겠군. 한 일 년쯤 뒤에 재혼할 테고.”

“대체 무슨 말씀을……. 그건 농담입니까?”

그 말에 로젠게인이 거세게 인상을 썼다. 다 숨기지 못한 당황이 드러나는 표정이 조금은 진짜 같았다.

내가 미리 알아채서 놀랐으려나.

다른 건 몰라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고 싶진 않아.

어차피 죽을 목숨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거절하겠다.”

페란스가 입 안에 고인 쓴맛을 삼키며 중얼대듯 말했다.

“블루와렌과 거래는 잇겠어. 하지만 다른 제안은 거절한다.”

“더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주십시오.”

당황을 지우긴 했지만 로젠게인은 여전히 눈매 끝을 일그린 채였다.

“각인을 푸는 법은 나도 알고 있어.”

“……이전 수호자의 목숨은 고려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 빌어먹을. 빨간 머리가 있었지.”

페란스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어쩌다 로젠게인에게 메넌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메넌이 의미가 있던 건 그가 마르스티엘과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런 건 말해 줄 수도 없고.

“다른 조건을 대. 네 손에 죽는 건 싫으니까.”

로젠게인이 입을 약간 벌렸다. 그게 이 가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 페란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다시 전하의 약혼자가 되겠다는 게, 어째서 그런 말이 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나야말로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입장에서는 너무 뻔하지 않나? 분명히 말했어. 네가 원하면 약혼이 아니라 파혼도 가능하다고. 그런데도 너는 작별 인사조차 없이 사라졌잖아. 십이 년이나 지난 뒤 다시 와서 약혼을 계속하자고 하면 당연히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아?”

“제가 떠난 건……,”

로젠게인이 말을 끊고 숨을 훅 들이쉬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였는데?”

“전하께서……,”

“내가 뭐?”

“……이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말해. 나한테 그 정도 얘기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그럼 거래를 받아들이십시오. 거래가 무사히 끝나면 그때 들려드리겠습니다.”

“너는 이런 것까지 내게 흥정을 거는군.”

페란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필요 없다. 구걸하면서까지 알고 싶진 않아.”

제 목숨을 손에 쥐어 주면서까지 그를 붙들고 싶진 않았다.

이미 겪었으니 어떤 일이라는 건지도 알고 있었다.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요. 하셔야 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발정기가 왔고, 전하께서 억제제를 구할 방법은 더는 없으니까요.”

로젠게인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페란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절로 시선이 위를 향했다. 그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턱을 쥐었다. 뿌리치고 싶었지만 감각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순간 마르스티엘을 다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전 수호자가 부리던 연금술사는 제 소유가 됐습니다. 그 외에도 위스타드에서 만들어지는, 전하의 몸에는 조금의 쓸모도 없는 억제제 또한 구하실 수 없을 겁니다. 억제제의 원료는 모두 블루와렌에서 유통됩니다. 저를 통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그 어떤 종류의 억제제도 구하실 수 없습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꼭 그렇게 해야겠다는 건가? 기어코 왕관을 빼앗아 가겠다는 거야?”

“어이가 없군요. 그 미친 소리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는 게.”

비틀리는 표정이 정말로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그럼 뭔데.”

페란스가 제 턱을 쥔 로젠게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둘 다 지금 이 자세를 바꿀 마음은 없었다.

“내 왕관이 아니라면. 너는 이 약혼으로 뭘 원하는 건데.”

“거래가 완료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말해. 말을 못 하는 이유가 뭐야. 네가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새삼 실망이라도 할 것 같나? 장담하는데 그럴 일은 없어. 그냥 말을 해.”

상처는 받겠지만 실망하거나 절망할 일은 없었다.

“아직 괜찮으십니까? 슬슬 제 페로몬이 역해지실 때가 됐는데.”

“우습게 보지 마. 십삼 년이나 각인을 견뎌 낸 몸이다. 이 정도는 아직……. ……제기랄, 무슨 짓이야.”

이제껏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로젠게인의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생생한 그 무거운 습지 냄새가 맡아졌다.

로젠게인이 턱을 쥔 채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시선을 맞부딪쳤다.

“괴로우실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하지만 조금도 웃음 같지 않았다. 옅은 푸른 눈은 너무 서늘해 몸을 얼게 만들었다.

웃음의 의미는 명확했다.

거래는 지금부터 시작이며 페란스가 도망칠 구석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무슨……,”

발정기와 각인 반응이 동시에 시작되었다.

* * *

퍽!

“미친……! 보살펴 준다며!”

페란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겉옷을 벗기는 건 괜찮았다. 아무래도 벗은 게 더 편했으니까. 구두와 스타킹을 벗기고 침대에 눕힌 것도 괜찮았다. 눕는 게 더 나았으니까. 양 손목을 침대 기둥에 묶는 것도 괜찮았다. 발정기 때는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가 제 장갑을 벗기고 난 뒤 입가에 가져다 대던 억제제를 옆으로 집어던졌을 때는 당연히 화가 났다.

“뭐 하자는 거야!”

덜컹덜컹!

페란스가 몸을 들썩이자 침대 기둥이 흔들렸다. 로젠게인이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누르며 고개를 바싹 들이댔다. 푸른 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섭정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뭐……?”

“죽였습니까? 그렇게나 생각이 없는 분이셨습니까?”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 이유가 뭔데?”

로젠게인이 침대에 묶인 손목을 붙잡아 페란스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 지경이 되도록 억제제를 사용하신 겁니까? 이전 수호자가 이게 무슨 뜻인지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부서지고 갈라진 손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페란스는 옷을 벗기겠다는 걸 진작 말릴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페란스가 입술을 실룩였다.

“……네 탓이야. 너와 싸우는 통에 빨간 머리가 위스타드에 오지 못했잖아.”

“일이 년 복용한 것으로 이 지경까지 중독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네 탓이다. 다른 알파는 곁에 두지 말라던 게 누구야.”

“대체 그걸……,”

로젠게인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라 신선했다.

붉은 머리 탓인가. 성격이 더 나빠 보이는데.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아니, 성격이 나빠 보이는 게 아니라…… 참지 못하는 건가.

페란스는 가시관에 묶였던 마르스티엘을 떠올렸다. 피를 흘리다 정신을 잃은 그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도 늘 마주하던 엇비슷한 표정을 했다. 아픈 게 뭔지 잘 모르는 그런 사람 같았다.

지금 로젠게인은 가시관에 매달린 것보다 더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보단 좀 더 솔직한 성격이 됐을지도. 뭐, 그건 나쁘지 않겠는데.

“알고 있어.”

그러는 페란스야말로 제 죽음을 말하는 데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페란스의 손목을 쥔 로젠게인의 손등에 울컥 힘줄이 돋아났다.

“그런데도……,”

“그렇다고 개새끼와 붙어먹을 수는 없잖아.”

“…….”

로젠게인이 뭔가를 씹어 삼키는 소리를 냈다.

“각인을 푸는 법을 알고 계신 건 맞습니까?”

“알면서도 왜 시도를 하지 않았는지 묻는 건가?”

페란스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만둔 지는 벌써 꽤 됐는데.

“증상이 이렇게 심해진 건 최근이야. 급하게 쓸 만한 알파를 찾던 중이었다. 빨간 머리라도 써 보려고 했는데 제 일이 바빠졌다고 여긴 얼씬도 안 하지 뭐야. ……아, 그러니까 그것도 네 탓이군.”

“대체, ……하,”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가슴팍에 대고 한숨을 토해 냈다.

숨결은 살갗을 간질였고, 그래서 각인 반응을 유도했다.

삽시간에 안색을 바꾼 페란스가 몸을 들썩였다.

“그만 내 몸에서 내려와. 네 얼굴에 대고 토하기 전에.”

“……각인 반응입니까?”

“알면 비켜. 억제제나 다시 가져와.”

“…….”

로젠게인의 눈이 흔들렸다.

이상하게도, 그게 보기 좋았다.

언젠가 그가 발정기를 겪는 자신에게 연민을 드러냈던 그 순간 같았다.

아, 지금의 너는 그런 건 없겠군. 각인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비슷해 보였다. 같은 얼굴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저 괴상한 붉은 머리만 아니라면 좋겠는데.

“억제제는 드릴 수 없습니다.”

로젠게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어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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