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팔을 잡아끌고 걸음을 옮겼다.
“전하,”
영문도 모른 채 잡아끌리는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대신하듯 루레티아의 대공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정말이지 귀찮았다.
페란스는 로젠게인의 팔을 더 단단히 붙든 채 레이나르 하바트를 향해 말했다.
“공의 청혼 말이야, 지금 거절하지.”
“……네, 전하?”
“내가 눈치가 없는 알파를 싫어한다는 걸 지금 깨달았어. 루레티아까지 평온한 귀로를.”
레이나르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페란스는 그대로 로젠게인을 잡아끌었다.
일단은 사실로 갈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잡아끄는 데 힘이 들어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걷고 있는 것처럼 편해졌다. 단지 숨이 찰 정도로 걸음이 빠를 뿐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거절해도 되는 청혼이었습니까?”
사실로 향하는 문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즈음, 로젠게인이 물었다.
“뭐……?”
어이가 없는 나머지 걸음이 딱 멈췄다.
페란스가 고개를 홱 돌려 로젠게인을 마주했다.
……빌어먹을. 그 머리 색은 대체 뭐야.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붉은 머리가 낯설다는 것이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사파이어와 루비를 섞은 요란한 반지 같은 것도 천연덕스럽게 잘 어울리는 인간이긴 했지만 붉은 머리는 정말이지 못 봐줄 지경이었다.
스물여섯이 된 로젠게인은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마르스티엘이 되었다.
그래서 더 꼴 보기 싫은 걸까.
붉은 머리 덕분에 제 기억에 흠집이 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전하께 들어온 청혼 중에는 가장 괜찮은 조건이었을 텐데요.”
“계속 지껄여 봐.”
페란스가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어디든 맞고 싶으면.”
“……제가 전하께 맞을 만한 짓을 했습니까?”
“아닐 것 같나?”
피식, 자조와 더 닮은 헛웃음을 흘린 페란스가 느닷없이 로젠게인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고개가 훌쩍 돌아갔다.
입 안쪽 살이 찢어졌는지 입술 끝에 피가 고였다.
“저, 전하?”
후려치는 소리 덕에 근처의 근위대가 다가왔다. 얼얼한 주먹을 털고 있던 페란스가 눈짓으로 근위대를 물렸다.
“별일 아냐. 신경 쓰지 마라.”
“다치신 게 아닙니까? 궁정의를 부를까요?”
“나중에.”
페란스가 반대쪽 손으로 로젠게인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이었다.
근위대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로젠게인을 그 안으로 떠민 페란스가 쾅 문을 닫았다.
철컥!
이어서 문을 잠갔다.
“하아…….”
그러고 났더니 이제야 좀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개자식.
주먹이 아직도 아팠다. 저릿대는 손을 쥐었다 펴며 페란스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개자식. 나한테 왜 그랬어.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인 줄 알았다.
콜더스트 가문은 사라졌다. 열세 살의 마르스티엘은 각인 상대가 있는 제 몸에 각인했고, 열여섯 살의 오메가 왕자를 욕보였다는 누명을 썼다. 자신은 각인열을 변명 삼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마르스티엘에게는 자신이나 개새끼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려고 해도 끝내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이해했다.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부모는 죽었지만 가문은 건재했고 각인도 하지 않았다. 그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런 거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시간대에서처럼. 한 번 죽었던 콜더스트 남작 부부를 살릴 수 없었던 것처럼,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끝내 바꿀 수 없는 부분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이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었잖아.
사랑하지 않는 건 괜찮아. 그렇다고 나를 미워할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잖아.
대체 왜 그랬어. 왜 이렇게까지 했어.
“하실 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퍽!
문을 한 번 후려친 페란스가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 로젠게인을 마주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네게 있는 거겠지.”
“……그렇긴 합니다.”
“들어 주겠다. 앉아.”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킨 페란스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로젠게인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곳이 사실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곳은 십이 년 동안 달라진 데가 없었다.
로젠게인이 늘 앉던 제 옆자리의 소파도 팔걸이가 닳아 반질반질한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로젠게인뿐이었다.
이제는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이 무심결에 흘러나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모습으로, 단지 붉은 머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시겠지만 수호자가 바뀌었습니다.”
잠시 팔걸이의 흠을 한번 쓸어 보던 로젠게인이 입을 열었다.
“그게 너였군.”
“네. 지금은 제가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가문이 건재해도 로젠게인은 결국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되었다.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빨간 머리는? 설마 죽었나?”
“살아 있긴 합니다. 아직은.”
“곧 죽을 거라는 말 같은데. 죽일 생각이야?”
“그건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그게 왜 나한테 달려 있는데?”
기억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가 감정을 닫아걸고 이쪽을 응시했다.
“제가 전하께 제시할 수 있는 대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전 수호자의 목숨, 그리고 또 하나는……,”
“각인을 푸는 법이겠군.”
페란스가 말을 가로채자 로젠게인이 잠시 눈썹을 비틀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십이 년 만에 다시 나타나서 거래를 하겠다고? 지금 하는 말이 그거야?”
“네.”
개자식.
말 한 마디 없이 버릴 땐 언제고 필요한 게 있으니 찾아왔다는 건가. 정말이지 너무하는데.
“뭘 원하는데?”
“이전 수호자가 위스타드와 했던 거래를 그대로 잇고 싶습니다.”
“그 대가로 빨간 머리를 살려 주고 내 각인을 풀어 주겠다는 건가?”
“아니요. 위스타드 왕실에 상납하는 금액을 삼 할 올려 드린다는 조건입니다.”
“어이가 없군. 그게 다야? 내 쪽에 더 이득인 걸 안겨 주면서 그게 조건이라고? 진짜 원하는 게 뭐야, 대체?”
“…….”
그 말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표정을 지운 채 페란스를 바라보던 로젠게인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한눈에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를?”
“저를.”
“……?”
페란스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내가 벌써 눈이라도 먼 줄 알았어?”
“예전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제가.”
“대체 누가 그러는데?”
“대부분이.”
“뭐?”
처음에는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바라보며 조금씩 표정을 바꾸었다.
……그럴 수도 있었겠군.
로젠게인은 페란스가 자신이 성장한 모습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열세 살의 로젠게인은 조금씩 마르스티엘의 얼굴로 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앳되었다. 갑자기 자라는 키를 따라가지 못한 몸은 말라 보였고, 눈동자 색깔도 더 진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달랐다. 블루와렌으로 떠난 직후 변성기가 왔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달라져서 적응이 안 된다는 말에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독특한 억양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억양을 바꿨네. 일부러 그랬나?”
“출신을 감추려다 보니.”
“그 머리도?”
대답은 없었지만 그렇다는 말 같았다. 외모를 바꾸기 위해 애를 썼다는 의미일까 싶었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데?
내가 너를 찾을까 봐? 너는 그렇게나 나를 벗어나고 싶었나?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미 얘기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파혼을 해 주겠다고.
그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던 걸까.
“…….”
생각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야 입술에 고인 피가 눈에 들어왔다. 페란스가 재킷 안을 더듬어 손수건을 꺼냈다.
“닦아.”
“…….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로젠게인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페란스가 턱을 괴는 척, 시선을 옆으로 돌린 뒤 대강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얘기나 마저 해.”
푸른 시선이 집요하게 이쪽을 쫓아오는 듯했다. 지금은 시선조차 고통스러웠다.
“이전 수호자와는 더는 어떤 거래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억제제도 포함해서 생각하십시오.”
“……빌어먹을. 요새 억제제를 구할 수 없다고 하던 게 네 탓이었나?”
“네.”
페란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의도가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억제제가 꼭 필요한 페란스에게 일부러 공급을 끊고 그가 제안하는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간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만하면 네가 거래를 원한다는 건 알겠어. 내게서 뭘 바라는 건데?”
“전에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약속이 아니라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어떤 걸?”
“제가 원하면, 약혼이 진짜가 될 수도 있다는 약속을.”
“기억한다.”
약혼도, 파혼도. 원하면 가능하다고 했다.
로젠게인이 바라는 것 중 페란스가 거절한 것은 각인뿐이었다.
각인이 됐길 바라서 상처가 곪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앳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 마음은 상처가 낫듯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덩치를 사랑하게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