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93)화 (92/122)

93.

“말씀이 별로 없으시군요, 전하.”

“아……. 오늘따라 술이 너무 맛있어서.”

페란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루레티아의 대공자를 향해 잔을 까닥 들어 보였다.

말이 별로 없는 이유는 피곤하기도 한 데다, 그를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나쁘진 않군.

레이나르 하바트는 신기할 정도로 마르스티엘과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남들보다 큰 키나 절도 있는 발음 같은 게 그랬다. 반듯하게 어깨를 편 자세부터 우수한 알파라는 광고 같았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은 매끄러웠고, 푸른 눈에 드러나는 감정은 적었다.

비슷했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 것치곤 거의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감시한다는 말 같아서 듣기 좀 그런데.”

레이나르 하바트가 입술에 미세한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송구합니다, 전하. 워낙 눈을 떼기 어려우신 분이라.”

“신년을 맞아 금주를 결심했다. 오늘은 이 한 잔만 먹을 생각이라. 가뜩이나 속이 상한데 그대까지 말을 보태진 말도록.”

페란스가 한쪽 눈을 감으며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도 비슷했다. 이런 자를 눈앞에 두고 술을 마신다면 너무 빨리 취할 것이다.

……그리고 발정기가 오겠지. 너무 빨리.

이제 슬슬 일어나야 했다.

로젠게인이 떠난 뒤로 별반 달갑지 않은 버릇이 붙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검은 자가 있으면 시간을 잊고 쳐다보게 되는 버릇이었다.

“술버릇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직 그런 내밀한 얘기까진 하고 싶지 않은데.”

레이나르 하바트는 조금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을 훑는 시선에서부터 느껴졌다.

혹시라도 각인 반응이 일어나면 곤란했다. 페란스는 남은 술을 훌쩍 들이켰다.

달칵.

빈 잔을 내려놓은 페란스가 몸을 일으켰다.

“만나서 반가웠다.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제가 마음에 안 차십니까?”

예의로 치장한 화법 같은 건 저에게 소용없다는 듯이 불쑥 치고 들어오는 말도 마르스티엘을 떠오르게 했다.

페란스는 능숙하게 외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내게 청혼서를 내민 알파들 중에서는 공자가 제일 내 취향이야.”

“그렇다면 지금 자리를 피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뜻이겠군요.”

“……뭐,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좋습니다. 오늘은 보내 드릴 테니 다음 약속을 정해 주십시오.”

달칵.

레이나르 하바트도 손에 쥔 잔을 내려놓고 페란스를 따라 일어섰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힐끔힐끔 이쪽을 돌아보았다. 겉으로는 여유 있게 연회를 즐기는 척해도 이목은 진작부터 이쪽을 향해 있었다. 과연 콧대 높은 미혼의 왕이 어떤 자를 제 반려로 정할지, 다들 궁금해 목을 빼고 있을 것이다.

“성격이 급하네.”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이렇지 않습니다, 전하.”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레이나르 하바트가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서요.”

“재촉받는 걸 좋아하진 않는데. ……내게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이제껏 단 하나였을 것이다. 거래를 사흘씩 끄는 경우가 없다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고막 안쪽을 약하게 울렸다. 아주 작은 일에도 연관성을 찾아 마르스티엘을 떠올리는 것도 십이 년이 된 습관 중 하나였다. 더는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전하. 잔이 빈 듯하여 새 술을 가져왔습니다.”

마침 그때 벨토우 백작이 끼어들었다. 그를 본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매부리코를 가진 벨토우 백작은 눈치도 없고 매력적인 화술도 없었지만 페란스는 신년 연회 때마다 그를 가까이했다.

그것도 습관이었다. 마르스티엘의 존재를 처음 알려 준 게 벨토우 백작이었음을 페란스는 잊지 않았다. 벨토우를 가까이한다고 해서 그가 어느 날 소문의 저 알파를 모르십니까, 라는 말을 들려줄 리는 없겠지만 그조차도 습관이 되었다.

“고맙군. 이 술은 그대에게 하사하지, 백작. 나는 오늘 치 술을 다 마셨거든.”

“이런……. 제가 미처 몰랐군요. 송구합니다, 전하.”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가 발바닥에 붙어 있는 벨토우 백작은 루레티아의 대공자가 니가 뭔데 끼어드냐는 식의 시선을 보내도 읽어 내지 못했다.

“그런데 전하, 혹시 소문의 알파를 보셨습니까?”

“소문의…… 뭐?”

그게 목적이었다. 페란스가 술을 거절한 건 벨토우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술은 핑계였고, 벨토우는 가십거리를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저기, 저자 말입니다.”

벨토우가 연회장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가면서도, 페란스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스물아홉, 서른이 되기 전 마지막 신년 연회.

마르스티엘을 만난 건 바로 그날이었다.

벨토우 백작이 지금처럼 들뜬 얼굴로 손가락질을 하는 곳에 마르스티엘이 있었다.

“자신을 블루와렌의 수호자라 소개하더군요. 붉은색 머리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붉은…… 머리라고?”

“네. 눈 색이 특이해서 붉은 머리가 더 요란한 느낌이랄까. 하여간 소문으로는, 저자가 각인을 깨는 법을 알고 있다 했습니다. 과연 그게 사실이겠습니까?”

벨토우의 손가락 끝에는 키가 큰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머리칼이 붉었다.

마르스티엘이 아니었다.

쿵쿵 숨 막히는 춤을 춰 대던 심장이 일순 정지했다.

……위스타드에 왔으면 내게 올 것이지. 신년 연회부터 참석이라니 무슨 짓이야.

숨을 다시 쉴 수 있게 되자 엉뚱하게도 화가 치솟았다.

심부름꾼을 보내 엄살을 부려 대던 메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새삼 괘씸했다.

억제제는 가져왔겠지.

페란스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휙 등을 돌려 메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

그 뒤를 레이나르 하바트가 따라왔다.

“아직 다음 만남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전하. 내일 오찬은 어떻습니까?”

페란스가 잘생긴 검은 머리 알파를 조금 귀찮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침은 잘 안 먹어. 내일이 지난 다음 생각해 보지.”

“산책이나 승마도 좋습니다, 전하.”

“말했듯이, 내일이 지난 다음에. 지금은 블루와렌의 수호자와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성큼성큼 보폭을 넓힌 페란스가 제 쪽에서는 등을 지고 서 있는 메넌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빨간 머리가 저렇게나 체격이 좋았나? 희한한 구두를 신은 모양인데. 그새 키가 커졌어.

고개를 한번 갸웃대는 사이 메넌을 둘러싼 사람들이 페란스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전하.”

“페란스 전하.”

“위스타드의 신년을 신께서 축복하시길.”

인사를 대충 흘려 넘긴 페란스가 메넌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내 방으로 와. 변명은 들을 생각 없으니 각오하고.”

“…….”

옷자락을 잡힌 메넌이 천천히 돌아섰다.

달칵.

손에 쥔 잔을 근처 조각상의 받침대에 올려놓은 붉은 머리가 빈손을 가슴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페란스의 손끝을 잡았다.

스칠 듯 말 듯, 입술이 손등을 스쳐 갔다.

페란스는 가만히 서서 그가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이 붉었다. 눈은 아주 옅은 푸른색이었다.

키가 컸다. 우뚝한 코가 이제껏 본 중에 가장 잘생겼다.

입술이 야했다. 손톱이 야했다. 그가 하는 모든 짓이 야했다.

메넌이 아니었다.

붉은 머리를 한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마르스티엘의 눈을 하고 있었다.

“신년을 경하드립니다, 전하. 위스타드에 폭풍의 가호를.”

“…….”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페란스를 집어 삼켰다.

너는…… 대체 누구야.

* * *

“조심하십시오.”

발끝이 아찔했다. 잠시 비틀대는 몸을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받아 들었다.

안았던 허리를 놓아주기 전 그가 빠르게 속삭였다.

“발정기가 오는 것 같습니다, 전하. 연회 자리는 그만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미친,”

아마 수백 번은 생각했을 것이다.

로젠게인을 다시 만난다면. 그럼 무슨 말을 할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그러다 전부 잊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각인이나 중독만으로도 고통은 충분했다.

그래서 그도 잊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볼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로젠게인은 떠났고 자신은 남겨졌다. 떠난 사람과는 달리 남겨진 사람이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우고 덮고, 어떻게든 잊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자신이 미련 맞은 건 어쩌다 두 번이나 살게 되는 우연이 주어져서 그럴 것이다. 진작 잊어야 될 것을 또다시 마주치는 바람에 다 잊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잊었다고, 힘들었지만 결국은 잊었다고, 남겨지고 나서도 십이 년을 무사히 보냈다,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팔을 홱 낚아챘다.

주변에서 가벼운 탄성과 당혹이 일었다.

“전하……?”

“혹 언짢으신 일이라도……?”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예의상 끼어드는 말 같은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닥치고 따라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