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92)화 (91/122)

92.

그래, 이런 식이었다.

심부름꾼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현 수호자는 유능하긴 했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위스타드의 젊은 왕 앞에서는 유달리 입단속을 못 했고, 계산이 둔해졌다. 상단 내부에서도 윗선들이나 겨우 아는 내부 사정을 페란스 1세가 훤히 알고 있었다. 위스타드와의 거래가 잘돼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풀린 매듭은 진작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게 좀……. 매듭 세 개가 한꺼번에 풀리는 바람에.”

“세 개라니.”

성질을 내던 페란스가 털썩,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히자 단추를 다 채우지 않은 셔츠가 느슨하게 벌어졌다. 한쪽 다리를 발판에 두고 짜증을 내는 모습은 도무지 고상한 왕족이라고 할 수가 없었는데, 미친 외모 때문인지 그래도 눈이 부셨다.

“그 정도면 수호자로서는 끝 아닌가?”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위스타드와 든든한 연줄을 쥐고 있는 수호자라 여섯 매듭도 의견이 나뉘고 있습니다.”

“새로운 수호자는 어떤 인간인데?”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몇 년 전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인데 블루와렌 출신이 아니라 마땅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무능하긴.”

“…….”

심부름꾼이 오해하기 딱 좋았지만 무능하다는 건 그가 아닌 메넌에게 하는 말이었다.

“억제제 생산이 안 되는 게 블루와렌의 내분과 연관이 있나?”

“그럴 겁니다. 워낙 대체품이 없는 원료가 많이 쓰이는데 그중 하나라도……,”

“빨간 머리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매듭 중 하나가 조달을 하고 있다면 억제제도 만들 수 없다는 말이겠군.”

“정확하십니다.”

“…….”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을 하던 페란스가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너, 그 세 가문과 연락을 할 수 있나?”

“네? 아니, 그건 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아니면 할 수 있는 인간을 구할 수 있는지.”

“그야…… 방법이야 찾으면 있습니다.”

“그럼 가서 전해. 위스타드는 빨간 머리와 거래한다고.”

“엇, 그게…… 그럼?”

심부름꾼의 안색이 환해졌다.

“전하께서 도와주시는 겁니까?”

“어쩌겠어. 무능한 인간이 제 앞가림도 못 하고 있다는데.”

주변을 휙 훑어본 페란스가 제 셔츠 소매의 단추 하나를 뜯어냈다. 진주로 만든 단추는 금으로 된 받침에 페란스의 이니셜을 새겨 놓았다.

그가 그걸 심부름꾼에게 휙 던졌다.

“받아. 빨간 머리에게 주든지, 아니면 네가 직접 가지고 가든지 해.”

가까스로 단추를 받아 낸 심부름꾼이 화들짝 절을 했다.

“황공합니다, 전하!”

하지만 이어지는 페란스의 말에 황송함이 사라졌다.

“일주일 안에 억제제를 내 앞에 가져다 놔.”

“네? 아니, 전하! 일주일이라니요. 지금 당장 배를 타도 블루와렌에 도착할 시간입니다.”

“요샌 좀 빨라졌잖아.”

페란스는 울상을 짓는 심부름꾼에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아니, 전하……. 전하…….”

심부름꾼이 단추를 쥔 채 쭈뼛대고 있으려니 방금 침실로 들어온 키슬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를 잡아당겼다. 심부름꾼은 더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물러갔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계속 신뢰해도 되는 것이옵니까, 전하?”

키슬크가 잠시 옆으로 치워 놓았던 전신 거울을 다시 페란스의 앞으로 가져오며 말을 붙였다.

“글쎄……. 살아남을 재주가 없는 인물은 아니야.”

페란스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섰다.

습관대로 팔을 벌리고 있자 키슬크가 재빠른 손짓으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수호자는 더 많은 재주를 지닌 인물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문제야.”

“어째서 문제가 되옵니까, 전하? 새로운 수호자와 거래를 트는 일이 어려울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키슬크의 말에는 요새 누가 감히 위스타드를 경시할 수 있겠냐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그렇긴 해도 빨간 머리가 가엾잖아.”

“네……?”

키슬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란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식이었다.

“외람되오나 전하께서는 그자를…… 귀찮아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러니까, 거래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로젠게인을 찾지 않겠다고 말한 뒤로 메넌은 뭐가 씌기라도 했는지 구애를 멈추지 않았다. 구애라고 하기엔 그보다 좀 더 조심스럽고 정중했는데,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페란스가 새삼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넌의 구애는 사실 귀찮다기보다는 그냥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짓이라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봐.”

“네, 전하?”

키슬크의 눈이 더 커다래졌다.

“빨간 머리도 쓸 만한 알파잖아.”

“아닛……!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의 상대로 그런 어디 뒷골목 출신의…… 신분도 없는 자를……,”

단숨에 얼굴이 달아오른 키슬크가 숨을 빼액, 몰아쉬었다. 생각만 해도 분이 오르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기도 했다.

“신분 같은 건 없어도 돼. 블루와렌의 수호자라면 어지간한 가문의 멍청한 알파보다 쓸 데가 많으니까.”

“그,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전하의 상대가 아닙니까.”

“내 상대니까 하는 소리야.”

페란스가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응시했다.

다시 스물아홉 살이 되었지만 제 속은 그보다 곱절은 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제 나이는 마흔둘이라 해야 맞을지도 몰랐다.

로젠게인 알란드를 잃은 십이 년은 너무 길었다. 자신이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각인을 깨는 방법은 아주 더럽거든.”

“전하…….”

키슬크가 입술을 오므렸다.

재미있게도 각인을 푸는 법은 블루와렌의 특산품이 아니었다. 메넌은 각인을 푸는 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각인을 푸는 법을 알아낸 것은 마르스티엘이었을 것이다.

열세 살에 각인한 그가 마침내 각인을 푸는 법을 알아냈을 과정을 생각하면 페란스는 심장 절반이 닳아 없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좋은 가문에서 곱게 자란 알파가 그런 짓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어쩌면 빨간 머리가 나을 수도 있어.”

“그게…… 끄응.”

키슬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위스타드 역사상 가장 강한 왕권을 이룩한 페란스 1세는 그것을 위해 제 몸을 제물로 삼은 듯했다. 각인과 발정기가 몸을 상하게 했고, 그걸 견디기 위한 억제제가 다시 몸을 망가트렸다.

둘 다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페란스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키슬크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를 배우자로 삼겠다면 다들 반대하겠지. 너라도 환영해 줘.”

“전하. 너무 그렇게…… 벌써 마음을 정하신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루레티아의 대공자가 전하의 마음에 들 수도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아, 대공자를 깜박했군.”

어제 도착한 대공자에게 인사를 받는 일은 일부러 오늘 신년 연회로 미뤘다. 듣기로는 그 역시 알파성이 짙다고 했다. 발정기가 올 것 같은 시기에 가까이서 마주하는 일은 피해야 했다.

연회 전까지 메넌의 심부름꾼이 억제제를 가져오리라 여겼는데, 유감스럽게도 억제제는 없었다.

연회에는 얼굴만 비추고 곧장 돌아와야 할지도 몰랐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얼굴이 조금…… 크흠, 미형이오나 루레티아의 레이나르 대공자도 아주 훤칠한 미남이라 하였사옵니다, 전하. 조금만 마음을 열어 두시옵소서.”

“벌써 마음을 정한 건 아니야. 네 말대로 루레티아의 대공자가 쓸 만하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일이다. 그리고 일단 빨간 머리가 무사히 제 앞가림을 해야지.”

“맞사옵니다, 전하.”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키슬크가 부지런히 옷을 입혀 주었다.

“음……? 전하, 소매 단추가 하나 없사옵니다. 어서 가서 다른 것을 가져오겠나이다.”

소매 단추는 두 개씩이었다. 하나가 없긴 했지만 소매를 채울 수는 있었다.

“됐어. 시간도 없을 텐데 그냥 입혀. 소매야 어차피 재킷으로 가려질 텐데.”

“아무리 그래도 전하, 신년 연회이고 장차 배우자가 될지도 모를 대공자를 처음 마주하는 자리온데……,”

“소매 단추 하나 없다고 트집 잡을 인간이라면 청혼을 수락할 이유도 없다.”

키슬크가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라는 눈으로 애타게 페란스를 쳐다보았지만 페란스는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왕관은 관둬. 목이 아프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전하.”

“남들 앞에서 목이 훌쩍 꺾이는 꼴을 보이는 것보다야 낫지.”

“…….”

그러니 정말로 할 말이 사라졌다.

중독이 심해진 페란스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지쳤다. 왕관처럼 무거운 물건을 머리에 얹고 있으면 피로감은 더욱 빨라질 게 뻔했다.

“이제 장갑만 끼면 되나?”

“……그러하옵니다, 전하.”

키슬크는 손톱 끝이 부서져 너덜대는 페란스의 손에 하얀 실크 장갑을 끼웠다. 루비로 만든 장식이 손등 가운데 오도록 잘 고정시킨 그가 다 끝났다는 뜻으로 허리를 숙였다.

“갔다 올게.”

페란스가 먼저 훌쩍 등을 돌렸다.

키슬크가 새삼스레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이유는 사실 젖은 눈가를 가리기 위해서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탓이었다.

잠시 후, 페란스가 근위대에 둘러싸인 채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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