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91)화 (90/122)

91.

“……래서 청혼서에 답장을 보냈어.”

축축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하나 있는 등불은 바람이 없어도 위태로웠고, 텅 빈 공간은 이유도 없이 역했다.

페란스는 그곳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집무실과 침실을 제외하면 이곳은 그가 왕궁 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의자가 없었다. 일부러 의자를 치웠다.

엉덩이가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영영 이곳에 눌어붙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죽기 전에 후사는 이어야 하니까. 루레티아의 대공자라던데, 혹시 알아?”

우우.

마치 헛바람 소리 같은 자그마한 대답이 들려왔다.

페란스가 소리가 들려오는 어둠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잘생겼던데.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랐어. 마르스티엘을 많이 닮아서.”

우우…… 우우우.

“아니, 닮았다는 말은 좀 아닌가. 푸른 계열이라고는 해도 눈 색이 전혀 다르니까. 콧대나 이마 선도 달라. ……아, 속눈썹도 좀 달라. 대공자는 속눈썹이 위로 휘어졌더라고. 그래도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좀 비슷해. 나쁘지 않았어. 생긴 건.”

우우.

“키도 크다던데. 마르스티엘만큼 클지는 잘 모르겠지만. 손은 확인을 못 했어. 듣기로는 중지가 길어야 물건도 크다던데.”

우우. 우.

페란스가 제 앞머리를 성의 없이 잡아당겼다.

“그런데 대공자라니 걱정이야. 각인을 깨는 험한 꼴을 견뎌 낼 수나 있을까. 물론 험한 꼴은 내가 다 하는 거지만. 그래도 지켜보고는 있어야 하잖아. 아, 물건도 세우고 있어야 하고.”

우우우.

“역시 그런 걸 보면 그냥 빨간 머리가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우.

페란스가 앞머리를 놓고 다시 힐긋 어둠 속에 시선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제는 빨간 머리의 새 이름이 마르스티엘이잖아. 그건 혹시 빨간 머리로 만족하라는 소리일까.”

우우. 우!

“의외로 빨간 머리가 헌신적인 알파일지도 모르지. 마차 안에서 먼저 잠이 들면 신발과 양말을 벗겨 주고, 토한 입술에도 곧장 키스해 주고. 뭐 그런 거 있잖아.”

우…….

“악을 쓰며 손가락을 물어뜯는 상대에게 사랑스럽다고 말할 정도라면 어지간히 정신 나간 인간으로는 안 될 것 같고…… 빨간 머리는 규격 외의 인간이긴 하니까.”

우우.

“아, 내가 그 얘길 했나? 전에는 빨간 머리가 염색을 하고 왔더라고. 검은색으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했더니 정색을 하던데. 그럴 거면 검은 머리의 알파가 지나갈 때마다 눈 돌리는 짓 좀 그만하라고. 그 정도면 뭐, 멀쩡한 인간은 아니지 않아?”

우우우.

“……그래, 괜찮겠네. 빨간 머리한테 앞으로 염색을 하고 있으라고 해야겠어.”

말을 마친 페란스가 볼일을 다 본 사람이 그렇듯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를 털어낸 그가 어둠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오늘은 어때? 그래도 발이 아래로 가 있으니 한결 편하지?”

말투는 언뜻 다정한 안부처럼 들렸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란스는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증오를 담은 차가운 눈으로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를 훑는 중이었다.

“발목도 많이 나았네.”

페란스의 시선을 따라가자 철구에 묶인 발목이 보였다. 퉁퉁 부은 발은 군데군데 썩거나 고름이 고여 있었다.

페란스가 신발을 신은 발끝으로 그 발목을 툭 건드렸다.

“우…… 흐!”

가시관에 묶인 누군가가 뭉개진 신음을 토해 냈다.

혀가 잘린 아만다리스였다.

십이 년째 마티바 탑 지하에 갇힌 아만다리스는 눈을 하나 잃고, 혀가 잘리고, 사지가 철구에 묶여 제 손으로 죽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뒷목은 살점을 도려내 불로 지졌다. 그렇게 하면 페로몬을 만드는 기관이 망가져 더는 알파로 살 수 없다는 낭설이 있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궁정의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지만, 페란스는 해 보면 알겠다면서 웃는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궁정의가 맞았다. 살점을 도려내는 정도로는 페로몬 기관을 없애진 못했다. 그러나 보람이 아주 없진 않아서 그 뒤로 아만다리스는 페로몬을 방출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 그 덕에 마음 편히 아만다리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가끔씩 과거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만다리스밖에 없다는 게 환멸스럽기도 했고, 자조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혼자만 알아야 하는 일을 털어놓을 상대가 있다는 건 그간 자신이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더 나아. 그래야 내일부터 다시 거꾸로 매달지.”

툭.

페란스가 반대쪽 발목을 건드렸다.

조금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아만다리스는 들리지 않는 고통을 호소하며 울어 댔다.

“괴롭나?”

“우…… 우우…….”

“조금만 참아.”

페란스가 위로를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으면 그땐 너도 죽을 수 있다고 했잖아. 오래 안 걸릴 거야.”

“우우…… 우흐…… 흐으…….”

“그러게 각인 같은 개짓거리를 하기 전에 결과가 어떨지 잘 따져 봤어야지.”

페란스가 아만다리스를 향해 짤막한 미소를 남긴 뒤 등을 돌려 감옥을 나섰다.

“전하. 이제 가십니까.”

떠나기 전 자물쇠를 채우는 페란스의 옆으로 간수들이 다가왔다.

“그래.”

페란스가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다시 목에 걸었다. 아만다리스가 마티바 탑에 들어온 그날 페란스는 지하 이 층의 간수들을 전부 바꾸었다. 아만다리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자들로, 신분이 낮되 입이 둔한 자들로 교체해 놓았다. 섭정의 실종에 젊은 왕이 관여했다는 소문은 있을지언정 마티바 탑 지하 이 층에 섭정을 가둬 두었다는 소문은 한 번도 돌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잘 감시해라. 죽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간수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루레티아의 대공자는 신년 연회를 하루 앞두고 위스타드에 도착했다.

청혼을 한 가문을 카벨리카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초대한 적은 처음이었다. 수도는 다가올 봄처럼 수선스러운 분위기였고, 청혼자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신년 연회에 대한 기대감이 새싹처럼 솟아올랐다.

“미치겠군.”

그 와중에 신년 연회를 두 시간 앞둔 궁 안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궁인들이야 정신없이 분주했지만 왕의 침실은 사정이 달랐다.

준비를 마치기는커녕, 이제 겨우 셔츠만 한 장 걸치고 있는 페란스 1세가 초조한 얼굴로 침실 출입을 허락받은 신분 없는 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블루와렌의 심부름꾼이었다. 메넌이 직접 오지 못할 경우 그가 메넌의 역할을 대신했다. 요 몇 년간 페란스에게 신종 억제제를 구해다 준 사람도 그였다.

그가 오늘 빈손으로 도착했다.

조만간 발정기가 시작될 낌새였다. 연회는 어찌어찌 넘긴다 해도 오늘 밤부터는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억제제가 없이 빈손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블루와렌에서 억제제를 구할 수가 없다고?”

“송구합니다, 전하. 단주님 말씀이 전하의 억제제만이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은 벌써 줬잖아!”

퍽!

초조한 마음에 괜히 소파 다리를 걷어차게 되었다.

“……하아. 이쯤 되면 네가 전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빨간 머리는 왜 몇 달간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 블루와렌에서 위스타드와 거래를 끊기로 한 건가?”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하.”

메넌의 심부름꾼은 그새 페란스의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다.

위스타드의 젊은 왕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그것부터 타인에게는 치명적인 무기였는데 본인은 그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블루와렌과는 십 년도 넘게 거래를 트고 있는 데다 수호자는 그 어떤 귀족도 받지 못한 특별대우를 받는 편이었지만, 페란스 1세는 언제라도 거래가 끊어진 다음을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다. 그건 수호자가 직접 한 말이었다.

십이 년 전 섭정 아만다리스 공작이 사라진 일은 분명히 젊은 왕의 짓이었다. 수호자도 그 사실까진 알고 있었지만 방법은 몰랐다. 시종장 키슬크를 빼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수호자조차 믿지 않는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가뜩이나 난리가 난 블루와렌에 더 큰 재난이 닥쳐올 수 있었다.

“그럼 빨간 머리를 불러와. 블루와렌에 있나? 배를 타고 오는 시간을 빼고 이틀을 주지. 내 앞에 와서 직접 해명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해.”

심부름꾼이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하는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게…… 단주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실 수가 없습니다.”

“비우라고 해.”

“그…… 아마 배를 타실 수 없을 겁니다.”

심부름꾼은 그냥 고분고분히 입을 놀렸다. 수호자는 지금 블루와렌에서 벌어지는 일을 최대한 감추라고 했지만, 페란스 1세가 뭔가를 짐작했을 때는 섣불리 거짓말을 하지 말고 그냥 이실직고하는 게 낫다고 일러두었다. 경험상 거짓말이 별 소용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일단 수호자가 시키는 대로 한두 달 정도는 버텼으니 이제는 입을 열어도 될 것이다.

“배를 못 타? ……나한테 말을 안 한 일이 있나 보군.”

이런 식이었다.

“그게…… 여섯 매듭 간의 다툼이 조금…….”

여섯 매듭이란 블루와렌에 기반을 둔 여섯 개의 가문과 그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여섯 개의 가문 모두에게 인정과 지지를 얻어야 했다. 일단 수호자가 정해지면 여섯 매듭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조금? 아니겠지.”

페란스는 빠르게 심부름꾼이 말로 다 하지 못한 상황을 짐작했다.

“빨간 머리가 수호자가 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위스타드와 거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 년차 풋내기 수호자였겠지만, 그 거래가 지금은 블루와렌에서 가장 큰 돈줄이 되어 주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여섯 개 중에 풀린 매듭이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지. 빨간 머리가 제 손으로 수습할 수 없는 일이라면……,”

페란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치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썩 내키지 않는 결론이 도출되는 탓이었다.

“블루와렌에 새로운 수호자가 나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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