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90)화 (89/122)

90.

메넌이 답지 않은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어울리지도 않는 말은 집어치우십시오. 위스타드 내에서 카벨리카와의 혼담을 마다할 가문이 있기나 합니까?”

“부모가 죽었잖아. 나 때문에.”

“나 참. 그게 왜 전하 탓입니까.”

“내 탓이야.”

이전에는 저로 인해 죽었고, 이번에는 살리지 못했다. 그러니 제 탓이 맞았다.

“아닙니다. 그리고 선대가 죽고 난 다음에도 콜더스트 남작은 전하에게 반해 있었습니다. 눈이 삔 인간이 아니라면 몰라볼 수가 없을 겁니다. 분명 별일 아닐 테니 제가 찾아서 데려오거든 엉덩이나 한 대 걷어차 주십시오.”

“…….”

별일이 아닐 수 있을까.

페란스는 각인 반응처럼 솟구치는 불안감을 삼키려고 애썼다.

어떤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지지 않는 게 아닐까.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콜더스트 남작 부부의 죽음처럼.

그래서 너는 끝내 나를 미워하도록 정해져 있는 거라면…… 그럼 나는 뭘 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로젠게인을 찾아. 그래서 만일…… 더 이상 약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파혼을 허락한다고 전해.”

메넌이 혀를 찼다.

“나 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전해. 아니라면 내 앞에 데려와. 그리고 만일,”

“만일……?”

“로젠이 제 발로 떠났다는 네 호언장담이 사실이 아니었을 경우 죽을 각오를 해라.”

“…….”

열네 살짜리가 잠적한 이유는 별일 아닐 거라는 가벼운 발언은 페란스의 표정 앞에 갑자기 한없이 무거워졌다.

메넌은 어쩐지 입맛이 쓰다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메넌이 알현실을 떠남과 동시에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페란스의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 * *

“전하! 저언하!”

아침부터 키슬크가 요란이었다.

페란스는 잠이 깨고 난 뒤에도 의미 없는 습관처럼 천장을 바라보던 자세에서 힐긋 고개를 돌렸다.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안 주무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속일 생각은 마시고요!”

“……나 참.”

이제 키슬크는 저를 속속들이 아는 존재가 되었다. 페란스는 상반신을 일으켜 자고 일어난 기색이 전혀 없이 찰랑대는 금발을 쓸어 넘겼다.

“전하! 휘장을 걷겠나이다!”

별말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한 말이 다 맞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키슬크가 침대 기둥에서 늘어진 휘장을 휙 걷었다.

휘장이 가렸던 아침 해가 눈을 찔러 왔다.

새삼 눈이 아리다는 생각을 하며 페란스가 급할 것 없이 키슬크를 맞이했다.

“무슨 일인데?”

“루레티아 공국에서 청혼서가 왔사옵니다!”

“……그럼 그렇지.”

잔뜩 상기된 키슬크의 얼굴에 비해 페란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어차피 별일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요새 키슬크는 청혼서를 받는 데 열심이었다. 스물아홉 살 생일을 맞이한 페란스가 드디어 서른이 되기 전 성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시작된 일이었다.

위스타드 왕국의 독신 왕이 드디어 반려를 맞이하겠다는 말에 거짓말을 조금 보태 대륙이 들썩였다.

위스타드 왕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강국이 되었다.

원래부터 재산이 많은 왕실이었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낡아빠진 세법 체계를 뜯어고치고 블루와렌과의 적극적인 상업 거래를 통해 유통망을 개선한 지금은 왕국 구석구석 풍요가 넘쳐흐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렇게 된 게 현 왕 페란스 1세가 즉위한 다음부터였다.

열아홉 살에 대관식을 치른 젊은 왕은 거침없이 제 왕국을 뜯어고쳤다.

희한하게도 그는 왕국이 가야 할 길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가 손대는 것마다 꼭 필요한 일이었고, 앞으로 이뤄져야 할 일이었으며, 그래서 반드시 결과를 가져왔다.

열아홉 살의 왕을 못 미더워하던 시선들은 씻은 듯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섭정의 실종을 왕과 연관 짓던 의혹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만다리스 공작가는 수도를 떠나 왕국 북쪽에 위치한 원래의 영지로 돌아갔으며 으리으리하던 공작저는 왕립 도서관이 되었다.

스물여섯의 대귀족 가문으로 구성된 원로회는 사실상 다과 모임 수준으로 전락했다. 젊은 왕이 그 어떤 법을 만들어 공표해도 대귀족들은 찍소리 한 번 못 했다. 카벨리카 왕실은 유례없는 권력을 누렸고, 왕국은 이제껏 한 번도 없던 번영을 맞이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를 꼽자면 그런 왕이 아직 독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단지 왕이 성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간단하진 않았다.

“그럼 그렇지라니요, 전하. 이제껏 들어온 청혼 중에 제일가는 것이옵니다. 무려! 대공의 장자가 청혼을 하였습니다!”

“아……. 그랬어?”

페란스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긴 하군. 루레티아의 대공자라니.”

“그러믄요! 어디, 초상화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키슬크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쓸 만한 얼굴의 알파인 모양이었다.

엄청난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페란스에게 들어오는 청혼은 그다지 마음에 차는 데가 없었다.

일단 페란스가 오메가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자니 상대는 알파가 되어야 했는데, 카벨리카에게 청혼을 할 만한 신분의 알파라면 가문을 이어야 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페란스 1세의 배우자가 된다는 건 카벨리카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었으므로 자신의 성을 버려야 했다. 장차 태어날 아이에게 성을 물려줄 수 없음도 물론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알파만큼 핏줄에 천착하는 존재들도 없었다. 물려받을 작위가 높을수록 페란스 1세와의 혼인은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하여간 그러한 이유로 청혼서를 보내는 후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키슬크는 페란스보다 더 핏줄을 따지는 데 엄격해서 어지간한 가문의 청혼서는 제 손에서 거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대공국의 장자가, 페란스의 눈에 찰 만큼 외모가 수려한 알파가 청혼한 사실은 키슬크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페란스가 키슬크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럼 가져와.”

“네, 전……! ……전하,”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초상화를 가져왔어야 할 키슬크가 표정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응달이 생겨나는 눈가를 알아본 페란스가 동작을 멈추었다.

“아…….”

손톱 끝이 부서졌을 것이다.

손으로 눈길을 돌리자 피가 묻어 빨개진 손톱 끝이 눈에 들어왔다.

하시시의 흔적이었다.

무려 십삼 년이었다. 십삼 년을 억제제로 버티고 있으려니 중독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페란스의 오메가성은 몹시 짙은 편이었고, 그만큼 발정기도 심했다. 중독의 위험성이 필연적으로 포함된 블루와렌산 억제제를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복용해야 했다.

“오늘은 장갑을 껴야겠군.”

페란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피투성이 손끝을 감추었다.

“전하……. 몸이 미령하시면 오늘은 침실에서 지내십시오. 그러셔도 되옵니다.”

키슬크가 그새 울 것처럼 새빨개진 코끝을 한 채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손톱이 부서지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잖아. 새삼 겁먹지 마.”

“전하…….”

이러다간 키슬크가 정말로 울 것 같았다.

페란스가 이불을 훌쩍 걷어냈다.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지만 페란스는 이를 질근 물고 괜찮은 척했다.

“옷을 가져와. 목욕물은 생략하고.”

“……신이 어찌해야 합니까, 전하.”

“시키는 대로만 해. 아, 초상화도 가져오고. 쓸 만한 인물이면 청혼을 고려해 보겠다.”

“…….”

키슬크가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 입술을 우물대다 고개를 숙인 뒤 물러갔다.

……탁.

침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페란스는 비틀대는 몸을 도로 침대에 주저앉혔다.

이래서는 몇 년도 못 버티겠군.

이 몸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손톱이 부서지기 시작하면 일이 년 정도라고 했다. 이어서 손톱 끝이 까매지면 남은 시간은 몇 달이었다.

그 전에 혼인을 해서 후사를 이어야 했다.

페란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죽기 전에 너를 한번 보고 싶은데.

십이 년 전 사라진 로젠게인 알란드는 그 뒤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메넌의 말로는 그간 흔적을 감추고 사는 블루와렌식 방법을 너무 열심히 가르쳐 준 탓이라고 했다.

로젠게인 알란드가 대륙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콜더스트 가문의 영지 대리인에게 가끔 전달되는 편지 한 통으로 생사를 확인할 뿐이었다. 메넌은 힘닿는 대로 찾겠다고 했으나, 페란스가 그를 말렸다.

살아 있는 게 확실한데도 나타나지 않겠다는 건 그의 의지였다. 그가 자신에게 품었던 애정을 버리겠다고 하면 페란스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떠나고 싶으니 떠났을 것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 감정은 또 다른 얘기라서 체념을 부둥켜안은 채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감정이 사그라드는 속도보다 몸이 중독으로 망가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더는 남은 시간이 없다고 느꼈을 때, 혼인을 결심했다. 로젠게인 알란드가 아닌 다른 알파와 각인을 깨고 후사를 이을 것이다.

……어떤 알파가 너처럼 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페란스가 표정을 일그린 채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떤 때는 별것 아닌 동작에도 숨이 찼다. 아마 하시시가 제 심장을 반쯤 덜어 간 모양이었다.

루레티아의 대공자는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알파였다.

혼담이 빠르게 물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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