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하마터면 당황하는 얼굴을 보일 뻔했다.
“내가 언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제 입이 실수로 마르스……, 라는 말을 토해 낸 적은 제법 있었다. 혀가 헛돈 것처럼 적당히 넘겼고, 페란스에게 왜 사람 이름을 잘못 부르냐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간의 실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상한데.”
메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란스가 그를 팔꿈치로 툭 밀며 알현실을 나서게 했다.
“전하께서는 어디 가십니까?”
“널 배웅하려는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설레서 그럽니다. 이런 적은 처음 아닙니까.”
“제발 그 입 좀 어떻게 해.”
진저리를 치는 페란스를 보며 씩 웃은 메넌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 그런데 아만다리스 공의 실종은 사실입니까?”
“……그게 네 귀에까지 들어갔나?”
메넌을 내보낼 생각으로 알현실을 떠나려던 페란스가 발을 주춤했다.
“사실이로군요. 설마 전하께서 손을 쓰신 겁니까?”
“……그랬다면?”
“아니라고 하시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그저 방법이 궁금할 뿐입니다. 말 그대로 감쪽같이 사라졌다던데.”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아만다리스가 제 손으로 무덤을 팠을 뿐.”
“궁금해 죽겠습니다.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듣고 싶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페란스가 구두 끝으로 메넌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럼 로젠을 찾아내. 그때 들려주겠다.”
“하, 정말.”
메넌이 차마 화는 못 내겠고, 다리는 아파 죽겠는데 오늘따라 금발이 참 눈부시다는 그런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어 냈다.
“새 억제제로는 안 되겠습니까?”
“내게 흥정을 걸지 마라. 그래도 되는 인간은 딱 하나뿐이니까. ……그리고 새 억제제는 오늘 가져온다고 하지 않았나? 왜 빈손이야?”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
“그게 좀…….”
메넌이 보기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말해.”
“그게…… 임상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약제사 말로는 중독성을 줄이려고 아편이 아닌 다른 성분을 썼는데…… 셋 중 하나는 백치가 된다더군요. 그런 걸 전하께 가져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젠장.”
각인과 관련해서는 쉬운 일이 없었다. 일말의 기대감이 늦가을의 낙엽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조만간 다른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일단은 기존의 억제제를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이번 발정기는 적당히 넘겼다는 말이기도 했고, 그러나 점차 성년이 되어 가며 달라질 발정기가 걱정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메넌은 언제나처럼 빠르게 페란스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서두르라 하겠습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잖아. 말했듯이 아직은 괜찮아.”
어쨌거나 발정기는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로젠게인의 행방이 더 문제였다.
“로젠을 찾는 데 사람이 더 필요한가? 근위대가 나서면 낫겠어?”
“그건 너무 소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도리어 숨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아……. 다른 건?”
“딱히 없습니다. 숨은 사람을 찾는 일을 블루와렌만큼 잘하는 곳은 없습니다. 돈 떼먹고 달아난 인간을 뒤쫓던 경력이 있으니까요.”
메넌을 향하는 시선에 가시가 돋아났다.
“그럼 아예 찾아서 데려오지 그랬나.”
“전하께서 편지를 읽지 못하셨을 줄은 차마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
그러니 일단 달려와서 화부터 달래려고 했다는 말이었다.
“당장 꺼져. 로젠을 찾아낸 게 아니라면 나타나지 마.”
“이렇게 상처 주시는군요. 잊지 않을 겁니다, 전하.”
“닥치고 나가.”
메넌이 장난스레 입술을 비죽이면서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돌아올 테니.”
“그런 말을 할 시간도 아껴.”
“자꾸 상처 주지 마십시오. 저도 알파입니다.”
메넌이 끝까지 열받는 소리를 남긴 뒤 사라졌다.
그러나 메넌이 헛소리만 지껄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페란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나타났다.
* * *
“……어이가 없군그래.”
아무리 그래도 가 보겠다고 말한 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도로 알현 요청을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로젠게인을 데려온 것도 아니었다.
“네 눈에는 내가 너와 놀아 주는 사람처럼 보이나?”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맹세코 제가 되돌아온 건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페란스가 울컥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으면 네놈과 하는 거래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 진심이야.”
“입궁하셨습니다.”
메넌이 빠르게 답을 했다.
“……뭐라고?”
“콜더스트 남작님이.”
“…….”
제 귀가 멀쩡한 게 맞는지 잠깐 헷갈렸다.
“그러니까…… 로젠이 여길 왔었다고?”
“네.”
“대체 언제?”
“나흘 전에.”
“나흘……?”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나흘 전이라면…….”
하필 그 사건이 벌어진 날이었다. 아만다리스가 몰래 숨어들었다가 마티바 탑에 갇힌 날.
“대체 언제…… 몇 시에?”
“경비대의 말에 의하면 늦은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새벽 교대가 막 바뀌던 시점이라고 했으니.”
“…….”
메넌은 로젠게인이 짐을 챙겨 사라진 이유가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대충 다 자란 것 같아 보여도 로젠게인은 아직 열네 살이었다. 부모가 다 죽었으니 어리광을 피울 상대라고는 페란스밖에 없었다. 분명히 페란스를 만나러 왔을 것이다.
그래서 궁을 떠나는 길에 경비대를 찾았다. 혹시 콜더스트 남작이 알현 신청을 하려다 그냥 간 적이 있진 않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경비대는 콜더스트 남작은 왕궁 출입권을 지녔으며, 나흘 전 그가 궁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의 출입을 본궁에 알리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현 신청을 하지 않고도 그는 페란스를 찾아올 수 있었다. 왕궁 출입권을 지닌 자는 왕족 외에 섭정 정도였다.
“왔다가…… 그냥 갔다고? 왜?”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전하. 혹시 전하께서 짐작하시는 바는 없는 겁니까?”
“나흘 전……. 새벽이라고.”
짐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불길한 감각이 뱃속에 번졌다.
설마…… 본 건가.
페란스는 아만다리스가 한 짓을 되짚어 보았다. 아만다리스는 러트가 오기 직전이었고, 제 목덜미를 만졌다. 그가 만지는 것을 참았다. 들을 얘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고, 만일 로젠게인이 그 모습을 봤다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게 아니라 달려들어서 막았을 것이다. 로젠게인은 자신이 아만다리스에게 각인한 사실도, 그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면 대화 중에 오해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아만다리스가 헛소리를 지껄이긴 했다. 자신이 편지를 보내 콜더스트 남작 부부의 행방을 알리며 죽음을 사주했다는 식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때 나눴던 말을 조금만 더 들었다면 그게 아만다리스 혼자만의 망상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키슬크가 도착했다. 만일 로젠게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키슬크의 눈을 피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 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페란스가 양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하. 손이 아파 보이십니다.”
메넌이 한마디 했다. 페란스가 애써 그대로 굳은 것 같은 주먹을 폈다.
물어뜯는 버릇을 고친 손톱은 이제 멀쩡했다. 로젠게인을 떠나보낸 일 년간 제 삶은 그리움을 빼면 꽤나 평탄했다.
아만다리스는 공적인 자리를 제외하면 따로 마주할 일이 없었고 키슬크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궁인들은 차츰 신뢰할 수 있는 자들로 하나둘씩 바뀌고 있었고 메넌과 손을 잡은 덕에 아만다리스가 모르는 금고도 생겨났다. 가장 즐거운 일은 자신이 앞날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만다리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페란스는 그가 막강한 세를 누리게 된 길들을 하나씩 끊어 놓는 중이었다.
아만다리스가 오메가 계승권자는 혼인 전까지 대관식을 치를 수 없다는 미친 법을 만든 게 내년이었다. 페란스는 그때 아만다리스의 곁에서 그 법은 꼭 필요하다며 자신을 얼러 대던 귀족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아만다리스와 이렇다 할 친분을 쌓지 못하도록 적당히 이간질을 해 놓는 중이었다. 내년에 그 개같은 법령에 왕실의 인장이 찍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게 좋았다.
그리움은 편지가 달래 주었고 조금씩 달라지는 정국은 죄책감을 희석시켰다.
로젠게인이 돌아오면 귀국 선물로 아만다리스의 목을 교수대에 매달아 줄 생각이었다. 그 전에 각인을 풀어야겠지만, 그 기다림도 즐거웠을 것이다.
그렇게 제 인생도, 로젠게인 알란드의 앞날도 달라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희망은 잔인했다. 가장 잔혹한 악마의 이름은 희망이라는 말처럼 되살아나면서까지 간절히 바랐던 일을 결코 내어주지는 않은 채 눈앞에서 흔들고만 있었다.
“……이제 깨달은 걸까.”
달라진 손톱을 바라보던 페란스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약혼. 이건 결국 족쇄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