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키슬크는 잠시 연민하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페란스의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발견하게 된 광경은 지금도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다.
페란스는 피투성이였고, 아만다리스가 그 귀하신 몸을 제 몸으로 눌러 대는 중이었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키슬크는 물병을 올려 두었던 탁자를 집어 들어 아만다리스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아만다리스가 각인을 시켰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키슬크는 실감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페란스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그 또한 선왕과 아만다리스의 우정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는 아만다리스는 도저히 페란스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믿음이, 침실 문을 여는 순간 말끔히 깨졌다. 제 팔 힘이 조금만 더 셌더라면 아만다리스는 탁자에 머리가 깨져 죽었을 것이다.
하여간 연민은 사치였다. 아만다리스는 양 팔다리가 전부 부러져도 시원찮았고 산 채로 두 눈이 썩어들어 가도 모자랐다.
“아만다리스가 타고 온 마차와 마부도 잘 처리했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마부는 죄가 없겠지만 입막음을 해야 했다. 그는 마티바 탑 육 층에 가두었다. 간수들은 새로 들어온 죄수들의 신분을 듣지 못했다.
마차는 왕실 창고에서 조용히 분해되었다. 문짝과 의자, 창, 바퀴, 마부석까지 고루 뜯어 다른 마차를 수리하는 데 쓰도록 했다. 한 계절만 지나면 정체 모를 마차가 한 대 더 숨어들어 왔다는 사실은 아예 없던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섭정 아만다리스가 마티바 탑 지하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하아…….”
페란스가 눈을 감으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새벽의 끝이었다. 발정기도 곧 끝날 것이다.
아만다리스의 페로몬 덕에 좀 더 지체되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전처럼 그의 페로몬은 절대적인 족쇄가 아니었다.
견딜 수 있으니 저항할 수 있었다.
……너와 보냈던 시간들이 아직 내게 남아 있어서일까.
새삼 마르스티엘을 향한 감정들이 울컥 끓어올랐다.
여전히 그는 너무 멀리에 있었다.
편지라도 써야겠군.
페란스가 몸을 일으키자 키슬크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전하? 무얼 하시려고요?”
“서재로 가게.”
“아니, 그만 주무시지 않고요. 아침이 다 되어 갑니다, 전하.”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그래.”
게다가 써야 할 편지가 한 통 더 있었다.
메넌에게 사고로 인해 보낸 편지를 다 읽지 못했다는 말을 해야 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비서관을 깨울 필요는 없어.”
페란스는 잠옷에 슬리퍼를 신은 차림새로 서재로 향했다. 키슬크가 서둘러 어깨에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래도 주무셔야 합니다, 전하. 자꾸 밤을 새우시면 몸이 더 마릅니다.”
“알고 있어. 잠이 오면 곧장 자도록 할게.”
“부디 그리 하십시오.”
키슬크는 서재 문을 열어 준 다음 물러갔다.
혼자 남은 페란스는 서랍을 열고 편지지를 꺼냈다. 로젠게인이 받는 편지는 주로 달필의 왕실 비서관이 제 필체를 흉내 내서 쓴 것들이었다. 직접 쓴 편지를 보낼 때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다. 페란스는 늘 공들여 포장한 편지를 보냈다.
“……마음에 안 드는데.”
안부를 생략하고 지금 떠오르는 감정들을 두서없이 흘려 쓴 편지는 당연히 엉망이었다.
감정들은 너무 날것이었고 힘이 풀린 손이 만들어 낸 필체는 조악했다.
“내가 이렇게 글씨를 못 썼나.”
한숨을 짧게 흘린 페란스는 잉크가 덜 마른 편지를 대충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것도 보내지 못하는 편지가 될 것이다. 로젠게인에게 쓴 편지라기보다는 마르스티엘에게 쓴 편지 같았다.
페란스는 반대쪽 서랍을 열어 방금 쓴 편지를 넣었다. 왼쪽 서랍은 오른쪽에 비해 크고 깊었는데, 그 안에는 부치지 못했던 편지 몇 통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빨간 머리한테 보낼 편지는 못 쓰겠군.”
북받치는 감정을 쏟아 내고 났더니 피로가 느껴졌다. 서랍을 닫는 손이 떨려 왔다.
페란스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래서 끝내 보내지 못한 편지 더미가 평소보다 더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중 한 통이 없어졌다는 것도.
* * *
결과적으로 말하면 메넌에게 편지를 쓸 필요는 없었다.
편지를 쓰기 전 메넌이 알아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전하! 그걸 던지시면 저는 죽습니다!”
메넌이 당당하게 외치는 게 더 열이 받았다.
퍽!
페란스가 기어코 화병을 집어 던졌다. 과일은 그냥 맞았던 메넌이 화병은 후다닥 피했다.
잘한 짓이었다. 정말로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가 괘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고, 메넌이 행여나 몸을 제대로 못 쓰게 되면 자신이 불편했다. 메넌은 할 일이 많은 인간이었다.
그중 첫 번째가 블루와렌에서 사라졌다는 로젠게인을 찾는 일이었다.
“……래서, 위스타드에 있는 건 확실해?”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로젠게인이 사라졌다.
메넌은 로젠게인이 블루와렌에서 머물 저택과 사용인들을 마련해 주고 그가 쓴 편지를 페란스에게 보냈지만 두 사람이 자주 교류를 한 건 아니었다.
로젠게인은 메넌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딱히 감추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메넌도 열네 살짜리 남작을 대하는 게 껄끄러웠다.
로젠게인과 알레프가 사라진 건 보름쯤 전이었다. 위스타드행 무역선을 탔다는 건 확인을 했다. 블루와렌에서 위스타드까지는 배편으로 칠 일 정도가 걸리므로 이미 위스타드에 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페란스가 코피를 쏟아 읽지 못하게 된 뒤 내용이 그것이었다. 물론 메넌은 이렇게 자세한 얘기는 생략한 채 혹시 젊은 콜더스트 남작을 만나셨는지 묻기만 했다.
페란스가 메넌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걱정 때문이었다.
아만다리스는 이제 위협거리가 아니라지만 미세한 시차가 있었다. 로젠게인이 사라진 시기는 아만다리스를 마티바 탑 지하에 가둬 놓은 시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아만다리스가 탑에 갇히기 전에 이미 손을 쓴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닐 수도 있잖아. 제 발로 어딜 간 게 아니라 강제로 누가……,”
“아니, 전하. 그 얘기는 벌써 몇 번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용인들 모르게 짐을 싸서 가신과 함께 모습을 감췄습니다. 항구에서 목격한 자들도 하나같이 가신과 단둘이서 배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제 발로 사라진 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
“솔직히 열네 살짜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는 전하께서는 무슨 낌새라도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편지를 자주 주고받지 않으셨습니까.”
“빌어먹을. 그런 건 없었어.”
로젠게인이 보내온 편지에는 그저 평온한 일상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얘기밖에 없었다. 자신이 바란 대로 새로운 곳에서 슬픔을 잊고 잘 지낸다고만 생각했다.
“기일이라도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벌써 지났어.”
“하, 그렇군요. 음…… 그럼 전하를 몰래 뵈려 했다거나.”
“그럼 진작 왔겠지. 네가 알아차릴 때까지 숨어 있을 이유가 없잖아.”
“으음…….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하려고 한 게 아닙니까? 콜더스트 남작님은 열네 살이니까.”
“…….”
페란스가 지끈대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메넌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쓸데없는 말을 던졌다.
“살이 좀 붙으셨습니다. 훨씬 더 보기 좋습니다, 전하.”
“그딴 소리를 할 거면 아예 입을 꿰매고 와.”
“외람되지만 전하,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자주 없습니다.”
페란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서?”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기회가 생길 때면 놓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너는 대체……. ……네 이름이 마르스티엘이라는 데 감사해라. 아니라면 내가 네 빨간 머리를 참아 줄 이유도 더 이상 없으니.”
메넌이 투덜거렸다.
“아니, 제 머리칼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남들보다 조금 더 매력적이라는 건데.”
“그 뻔뻔함도 마찬가지야.”
“전하니까 제가 참겠습니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니.”
페란스가 메넌을 향해 짜증 어린 시선을 던지자 메넌이 뻔뻔한 미소로 받아쳤다. 할 말이 없어진 페란스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만 나가. 가서 마르스티엘을 찾아와.”
“……네, 전하?”
메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페란스는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러는데? 당연히 네가 마르스티엘을 찾아와야……. ……아, 이런.”
“지금 제 앞에서 콜더스트 남작님을 제 이름으로 부르신 겁니까? 굉장히 이상한데요.”
“말이 헛나갔어.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로젠을 찾아와.”
“착각하기에는 너무 다른 이름 아닙니까?”
메넌은 쓸데없는 데서 감이 좋았다.
“마르스티엘이라는 이름이 헛나올 정도로 입에 익으신 겁니까, 전하?”
“……누가 그렇대. 어쩌다 말실수한 것 가지고 왜 트집이야.”
“트집이 아니라 여쭙는 겁니다. 위스타드식 이름도 아니고, 저와 콜더스트 남작님을 헷갈리실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좀 그런 줄 알아.”
페란스가 실수를 무마하고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계속 거기서 뭉개고 있지 말고 나가서 로젠을 찾아오라니까. 로젠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위스타드를 떠날 생각 마라.”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흠, 전에도 한번 콜더스트 남작님을 마르스티엘이라고 부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언제?”
“약혼식 날에. 그리고 그 전에도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