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87)화 (86/122)

87.

기가 막혔다.

그 편지를 보낸 건 으름장이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개새끼는 뻔뻔하게도 제 망상을 읊어 댔다.

“역시 그랬던 게야. 그 편지를 받고 생각을 오래 했다. 네가 그 편지로 무얼 말하려는지. 아무리 봐도 그건 내게 콜더스트 남작을 처리해 달라는 것으로 보였다. 네가 내 체면을 구겨 가면서까지 어린놈을 약혼자로 삼은 이유…… 사실은 그게 전부 우리를 위한 일이었던 것이냐? 하, 이럴 수가. 진작 너를 믿었어야 했는데.”

“무슨……,”

아만다리스가 포도주를 건네면서 운명이니 하는 말을 지껄였을 때 깨달았지만, 정말이지 미친 개새끼였다.

그때는 십 년도 넘게 발정기가 오면 몸을 섞었으니 착각을 하게 된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미친 인간이었다.

“그래…… 부모가 죽자마자 너는 기다렸다는 듯 어린놈을 어딘가 먼 곳으로 보냈지. 내 생각이 맞았던 게야. 그런 것을 괜히 일 년이나 기다렸구나. 내 잘못이다. 내가 너를 너무 몰랐어.”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얼굴을 붙들고 입술을 핥아 댔다.

페란스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어 아만다리스의 혀를 피했다.

미친 인간. 미친 개새끼.

“그럼 정말 네가 죽인 게 아니야?”

“죽이려 했다. 정말이야. 죽이려고 했어. 나를 너무 탓하지 마라.”

그럼 아니었다는 건가.

콜더스트가의 비극은 그저 궂은 날씨가 부른 사고였을까. 그럴 수도 있는 걸까.

머릿속이 전부 뒤엉킨 것 같았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달라지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르스티엘은 자신에게 각인하지 않았고 개새끼는 콜더스트 가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우지 못했다.

그래도 남작 부부는 죽었고, 로젠게인은 블루와렌으로 가게 되었다. 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벌어질 일은 결국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인가.

페란스가 지끈대는 머리를 문질렀다. 아만다리스가 거칠어진 숨을 뿌려 대며 페란스를 끌어당겼다.

“하아……. 더는 못 참겠군. 이제 그만 너를 가져야겠다. 그날처럼.”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쏟아 내며 손을 아래로 내려 페란스의 발목을 쥐었다.

“그날 네가 어땠는지 아느냐? 한 번도 벌린 적이 없던 다리를 벌리고 나를 받아들이던 네 표정이……, 지금도 매일 밤 꿈에 나온다. 꿈에서 네가 나를 부른다.”

“……그거…… 알아?”

뒤가 저절로 벌어지는 익숙하고도 끔찍한 감각에 페란스가 진저리를 치며 입을 벌렸다.

발목을 잡아 다리를 벌린 아만다리스의 손이 잠옷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드러나는 속살을 손등으로 쓸며 아만다리스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진심으로 욕정하는 표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아만다리스가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게.

그래서 자신이 지금 하려는 짓을 모른다는 게.

“뭘 말이냐?”

“네가 이 짓거리를 하다 결국 어떤 최후를 맞는지.”

“……뭐라고?”

아만다리스는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청해진 눈을 했다. 그 얼굴에 대고 페란스가 나오는 대로 비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가관이었는데. 네가 넋을 놓고 울부짖다가 결국 제 발로 뛰어내렸거든. 네 집구석 삼 층에서. 그리고 목이 부러졌지. 안타깝게도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더는 사지를 쓸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진짜 통쾌했어.”

“그게 무슨……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그러니까 어디 계속해 봐. 너한테는 이게 그냥 좆질 정도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정신이 이상해진 게냐? 설마 그런 거야?”

“사지를 못 쓰게 된 네가 침대에 누워서 어떤 꼴로 똥오줌을 싸고 있는지 봤어야 했는데.”

페란스가 보랏빛이 된 입술로 파들파들 웃었다.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어깨를 홱 붙들어 강제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

“발정기를 너무 참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네 머리가 정상이 아닌,”

“아, 하나 깜박했다. 네가 뛰어내리기 전에 내가 한 일.”

페란스가 들어 줄 필요가 없는 말을 잘라 냈다. 이제는 아만다리스를 인내할 필요가 없었다.

“너는 팔다리만 잃은 게 아니라 눈알도 하나 잃었어.”

퍽!

아만다리스가 추잡한 손길로 제 몸을 더듬는 걸 말리지 않은 이유는 이것을 위해서였다.

페란스는 한 손에 깨진 물병 조각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이 상하는 걸 개의치 않고 바닥을 더듬어 가장 크고 날카롭게 쪼개진 조각을 찾아 쥐었다.

“으…… 으아악!”

한쪽 눈을 찔린 아만다리스가 비명을 내뱉었다. 그 틈에 페란스가 그를 발로 걷어차고 앞으로 달려갔다. 침대 기둥 옆에 늘어진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종소리가 울렸다.

“안 돼! 하지 마라!”

아만다리스가 달려와 페란스를 와락 덮쳤다. 그가 제 무게로 페란스를 내리눌렀다. 페로몬이 성난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아만다리스가 페란스를 꽉 붙든 채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사람이 오면 돌아가라고 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미쳤군, 진짜. 그 눈부터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몸이 붙어 있으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아만다리스는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었다.

“아니, 잠깐……. 설마…… 러트가 왔어?”

오늘따라 유난히 미친 인간처럼 구는 게 러트가 시작될 조짐일지도 몰랐다.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귀를 깨물며 페로몬을 계속 토해 냈다.

십이 년 뒤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만다리스는 제 페로몬이면 페란스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게 결국 네가 진 이유야.”

페란스는 울컥 몰려드는 성감에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

투두둑!

피가 양탄자를 적시는 순간, 키슬크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전하. 찾으셨는지요.”

페란스가 잇자국이 난 입술로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만다리스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

“들어와서 섭정을 끌어내! 발정기를 맞았으니 저항이 거셀 것이다. 근위대를 넉넉히 데려와.”

* * *

페란스는 조용히 일을 처리했다.

키슬크가 경악에 질린 얼굴로 침실 문을 쾅 열어젖힌 순간만 해도 드디어 아만다리스를 공개 처형 할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달려온 근위대에게 아만다리스가 턱짓으로 비켜서라는 지시를 내리는 걸 보니 뱃속이 뒤틀렸다. 근위대는 페란스가 화를 내며 재촉을 할 때까지 아만다리스를 끌어내는 일을 주저했다.

생각을 바꿔야 했다.

러트가 오기 직전의 아만다리스가 새벽에 자신을 겁간할 생각으로 침실을 찾았다는 말을 대귀족들이 믿게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들도 저 굼뜬 근위대와 마찬가지였다. 선왕의 죽음 이후 그들은 선왕 노릇을 하는 아만다리스를 지켜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대귀족들과의 말씨름은 십이 년 뒤에도 해 보았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왕관조차 쓰지 못한 오메가 왕자가 아니라 마르스티엘의 돈과 군대였다.

지금 자신은 그때보다 더 어렸고, 입지는 더 약했다. 정면 싸움은 승산을 따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야비하고 영악한 수를 써야 했다. 스물아홉 살 때 마르스티엘에게서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했나?”

“물론이옵니다, 전하.”

페란스는 아만다리스를 마티바 탑 지하에 가두었다.

명령을 받은 근위대가 주춤대긴 했지만 애초에 그들에게는 왕족의 명령에 항의할 권한이 없었다. 아만다리스가 저항하는 바람에 잠시 실랑이가 오갔으나 결국 근위대는 페란스의 말을 들었다.

궁 밖에서는 아무도 아만다리스의 행방을 모를 터였다. 제 침실에 숨어들 것이라는 얘기를 아만다리스가 떠벌리고 다녔을 리는 없었다. 매수한 경비병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입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만다리스를 마티바 탑 지하에 가둬 놓는 일도 근위대 몇 명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아만다리스를 가둔 감옥의 열쇠는 간수가 지키는 게 아니라 페란스에게 전해졌다. 페란스는 그 열쇠를 금 사슬에 꿰어 목에 걸었다. 개새끼가 심어 놓은 궁인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왕자의 몸에서 열쇠를 훔쳐 그를 풀어 줄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 러트가 왔다니 더 잘된 일이었다.

보통 러트는 삼 일쯤 지속되니 이틀 정도는 고생하게 놔둔 다음 삼 일째 되는 날 억제제를 먹일 생각이었다.

억제제가 좀 아깝긴 했지만 러트를 그대로 방치하면 자칫 죽을지도 몰랐다. 각인한 상태에서 아만다리스를 죽이는 건 제 몸에 위험했다. 목숨은 붙여 놓아야 했다.

페란스가 옷 위로 늘어진 열쇠를 한번 만지작거렸다.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 멀쩡한가? 팔 하나쯤은 부러졌을 법도 한데.”

발정기를 무턱대고 참다가 발목이 부러진 경험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었다.

“아직 그랬다는 말은 없사옵니다, 전하. 대신 이마가 깨졌다고는 합니다.”

“아, 좀 아쉽군.”

“눈은 치료를 해 둘까요?”

“아니. 일단은 놔둬. 죽을 지경이 되면 그때 의사를 불러.”

“……알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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