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84)화 (83/122)

84.

“너 때문이다.”

“예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메넌이 도착했다.

흰 겉옷에 검정색 스카프를 두른 페란스가 인사를 받는 대신 대뜸 그런 말을 던지자 메넌이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분간 잘 지키라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바빠서 내가 내린 명도 따르질 못했나?”

“아니, 그게…… 그리 말씀하시면 저는 몹시 송구하고 억울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왕실 근위대가 따라갔다던데, 그 정도면 천재지변 아닙니까?”

“그럴 리가.”

“실례지만 귀국의 섭정께서는 날씨도 부릴 만큼 유능한 분입니까? 그럼 저는 거래처를 바꾸는 걸 고려해 봐야겠습……. ……이크,”

페란스가 화병을 집어 들자 메넌이 황급히 다가와 그의 손에서 화병을 빼앗았다.

“제 입을 용서하십시오, 전하. 가끔 저도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

페란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사실 지금 화병이든 뭐든 집어 들어 내려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지킨다고 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되돌리고자 다시 눈을 떴는데, 결국 이전과 똑같았다.

화병을 빼앗긴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범인은. 알아낼 수 있겠나?”

“그 일에는 벌써 왕실 근위대가 나서지 않았습니까?”

“믿을 수가 없어. 그중에 누가 사주를 받은 건지도 알 수가 없고. 의심 가는 인물이 너무 많아.”

“그래서 전부 감옥에 처박아 놓으셨군요.”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역시나 정보가 빨랐다.

콜더스트 남작 일가의 호위를 맡았던 근위대는 사고의 책임을 물어 전부 기사직을 박탈하고 감옥에 가둬 놓았다. 교수형을 내리지 않은 건 아직 사고의 정황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넌이 말한 대로 불운한 천재지변이었다고 할 만큼 남은 증거가 없었다. 아만다리스가 대체 어떤 작자를 부려 그런 기가 막힌 사고를 만들어 냈는지 직접 불러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전하, 진짜 사고일 가능성도 고려를 해 보십시오. 개같긴 하지만 비극이 사람을 구분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너라면 그럴 수 있겠나?”

“무엇보다 로젠게인 경이…… 아, 이제는 남작님이라 불러야겠군요. 여하간 콜더스트 공이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만일 섭정께서 손을 쓴 거라면……,”

“정작 죽을 사람은 로젠게인이었다는 말이겠군.”

“제 사견으로는 그렇습니다.”

페란스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남작 부부의 죽음이 그저 사고였다는 말은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일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되돌아왔으니까.

그럼 그게 그냥 사고일 수도 있는 걸까.

“……아니, 섣불리 단정 지을 일이 아니다. 사고라 여기지 말고 조사부터 해. 어떻게든 증거를 찾을 생각을 해라.”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페란스가 한숨을 내뱉으며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메넌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차다가 곁으로 다가왔다.

“이전보다 더 마르신 것 같습니다. 잠은 주무십니까?”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야.”

“그렇게 허약해진 몸으로 억제제는 어떻게 드실 생각이십니까. 몸이 못 버팁니다. 일 년도 안 가서 중독이 되실 겁니다.”

“……젠장.”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미약하다지만 발정기가 아예 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껏 발정기를 혼자 보낸 적은 없었다. 개새끼와 보내든, 아니면 마르스티엘이 곁에서 돕든 했었다. 이제는 어떻게든 혼자 견뎌 내야 하는 일이 됐다.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럼 몸을 좀 돌보십시오. ……아니, 정말이지 너무 위태로워 보인단 말입니다.”

메넌이 투덜거렸다.

“비쩍 마르고 창백하면 보통은 유령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하는 왜 더…… 아, 이놈의 입. 그만 다물겠습니다. 하여간 제가 알파라는 사실은 좀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대꾸하기도 귀찮았던 페란스는 다시 제자리에 놓인 화병을 툭 밀었다.

퍽, 쨍그랑!

화병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메넌이 제 입을 손으로 막는 시늉을 했다.

“블루와렌으로는 언제 출발하나?”

“원래 이번 주쯤 예상했습니다만, 전하께서 맡기신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좀 더 여유를 두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아니야. 예정대로 떠나.”

페란스가 잠시 생각해 본 뒤 말했다. 메넌이 고개를 갸우뚱댔다.

“그 안에 맡기신 일을 정확히 처리해 놓을 자신은 없습니다, 전하.”

“앓는 소리 말고. 너 대신 일할 자를 두고 가면 되잖아.”

“그렇게 블루와렌의 조직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전하께 조직의 비밀마저 팔아먹은 배알 없는 알파처럼 보일 게 아닙니까.”

“그렇게 혀 단속이 안 되는 주제에 어떻게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된 거야.”

“걱정해 주시니 황송합니다만,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전하 앞에서만 이러는 겁니다.”

“네 눈에는 내가 만만한가 보지?”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십니까. 그 반대입니다. 전하만 뵈면 긴장해서 혀가 멋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긴장하지 마. 예법 좀 실수했다고 내가 네 목을 치려고 들진 않는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 같으십니까. 그러게 왜 그렇게 사람 심난하게 하는 얼굴로 태어나셔서……. ……이크,”

메넌이 또 쓸데없는 말실수를 저지르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메넌의 방문을 비밀에 부쳤던 페란스는 이미 사실의 출입을 금해 두었다. 페란스가 짜증을 섞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돌아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전하.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아?”

하지만 로젠게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페란스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직접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자고 있던 게 아니었나?”

문을 연 페란스가 물었다. 힐끗, 방 안쪽을 살핀 로젠게인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방해가 됩니까?”

“아니. 그럴 일은 없다. 들어와.”

“네, 전하.”

사실로 들어서기 전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그래서 둘은 손을 잡은 채 걸어 소파가 놓인 자리로 돌아왔다.

“이쪽에 앉도록.”

페란스가 자신이 앉는 일인용 소파 옆 카우치를 가리켰다.

로젠게인은 일인용 소파와 카우치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더니 고개를 저었다.

“전하 옆에 서 있겠습니다.”

“왜? 앉아, 그러지 말고.”

“……아니면 함께 앉는 건 안 됩니까?”

“아, 그럼 되겠군. 내가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겠다.”

페란스는 로젠게인과 나란히 카우치에 앉았다. 그러느라 앉을 곳이 애매해진 메넌이 어정쩡하게 두 사람을 마주 보며 서 있게 되었다.

“이것 참. 무슨 일이지…….”

그가 작게 입술을 달싹이다 혀를 찼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 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콜더스트 공. 망자가 남긴 슬픔이 폭풍처럼 사라지길.”

“…….”

로젠게인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조의를 받았다. 그런 다음 메넌은 아예 없는 것처럼 몸을 옆으로 틀어 페란스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시던 중이었습니까?”

“블루와렌으로 언제 출발할지. 이번 주 안이 될 것 같은데. 너는 어때?”

로젠게인이 페란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까?”

“힘든 시기라는 건 알아. 상속 문제도 있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이곳을 빨리 떠났으면 한다.”

무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 같아 페란스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오해는 마.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야. 나는…… 내가 불안해서 그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로젠게인은 말을 잃었고, 페란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내내 잠을 설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로젠게인이 자고 있는 방으로 달려가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더 야위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메넌만이 아니었다. 키슬크도 내내 살이 빠지셨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형편없이 마른 손목에 뼈가 툭 불거져 나왔다. 제 몰골이 한심하기는 페란스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로젠게인도 페란스가 마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지도 짐작했다. 그럴 때마다 페란스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도 이해했다. 자신도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페란스가 자신을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하듯, 그 역시 페란스를 계속 마르게 하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다.

왕관을 쓰지 못한 왕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로젠게인은 끝없는 걱정이 페란스의 애정마저도 마르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 전에, 떠나야 했다.

제 존재가 페란스를 불안하게 만든다면 떠나는 게 맞았다.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성장한 뒤 돌아와야 했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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