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이걸 섭정에게 보내. 오늘 안으로 답장을 바란다고 전하고.”
콜더스트 남작 일가가 떠난 뒤 페란스는 곧장 편지를 썼다.
약혼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섭정을 존중하는 척, 일부러 편지까지 쓰긴 했지만 사실 반쯤은 약을 올리려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편지를 쓰는 내내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오늘 안으로요? 이미 저녁이 다 되었사옵니다, 전하.”
키슬크가 우려를 드러냈다.
사실 그래서였다. 시간을 촉박하게 잡으면 개새끼라도 신경을 쓰긴 할 테고, 당장 로젠게인을 뒤쫓으려고 들지는 못할 것이다.
“괜찮아. 안 자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해.”
“그게…… 알겠나이다, 전하.”
“남작 일가가 영지로 떠났다고 일러두었어. 왕실 근위대가 호위를 맡았다고 했으니 아무리 양심 없는 개새끼라도 손을 쓸 생각을 안 하겠지.”
키슬크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런 생각을 다 하셨습니까?”
“방심하면 안 되니까.”
아만다리스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약혼 사실을 통보하면 더 미쳐서 날뛸 것이다.
“근위대를 더 많이 보낼 걸 그랬나.”
페란스가 새삼 불안해하자 키슬크가 그를 달랬다.
“아니옵니다, 전하. 왕실 근위대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말씀하신 대로 왕실의 호위를 공언하신 것이니 섭정이 감히 불경한 마음을 먹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긴 한데 근위대 안에서도 누가 쥐새끼인지 모르는 일이라…… 아, 참. 아만다리스한테 줄을 대고 있을 만한 인물을 골라 놓으라는 건 어떻게 됐나?”
“아직 다는 알아보지 못하였사옵니다.”
그래도 키슬크는 제법 성실히 명령을 따랐다. 궁인들 절반 정도가 짧든 길든 아만다리스와 줄을 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근위대는 좀 더 심해서 칠 할 이상이 아만다리스의 연줄로 자리를 잡은 이들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근위대장이야. 그는 어떤 것 같나?”
“아카드 경은 아직 확실치 않사옵니다, 전하.”
기억이 맞다면 근위대장은 이 년 뒤에 바뀔 것이다. 지금의 근위대장 아카드는 선왕 시절부터 함께하던 자였다. 카벨리카 기사단이 왕실 근위대로 개편되면서 아카드가 근위대장을 맡았는데, 나이가 들며 지병을 얻은 뒤로는 중직을 내려놓고 싶어 했을 것이다.
“아카드의 후임을 정해야겠군. 아만다리스와 연관이 없는 자로.”
“힘이 닿는 대로 알아보겠나이다.”
“그래……. 일단 이 편지는 아카드에게 전해. 관절염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 일은 할 수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키슬크가 공손히 편지를 받아 들었다.
“계속 서재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시간이 늦었사온데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좀 더 머물겠다.”
“그럼 부르시면 다시 오겠나이다.”
키슬크가 서재를 떠났다.
“하아…….”
혼자 남은 페란스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목을 늘였다. 눈가가 무거웠다. 발현열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지만 몸 상태가 썩 괜찮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페로몬을 제어하는 데 신경이 너무 쓰였다. 그래도 페로몬이 계속 새어 나오긴 할 텐데, 로젠게인은 용케도 역겨운 표시를 내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고집쟁이.”
생각할수록 마르스티엘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게 신기했다.
열세 살의 너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도 종종 너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게 이상할 때가 있어.
그건 혹시 네가 나를 싫어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걸까…….
생각에 잠긴 고개가 어느 순간 한쪽으로 기울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벌써 침대에 눕고 싶진 않았다. 콜더스트 일가가 무사히 영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와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걱정이 많은 건가…… 주책 같기도 하고.”
생각을 잇던 페란스가 쓰게 웃었다.
어쩌면 아만다리스는 자신이 알던 개새끼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아만다리스가 제 몸을 구속하는 것으로 왕권을 훔쳐 가 재미를 톡톡히 본 것은 각인 이후였다. 지금이라면 아만다리스는 아직 손 쓸 도리 없이 미치기 전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별일은 없겠지.
“그만 가서 자야겠군.”
페란스는 느려진 몸을 일으켰다.
스물아홉 살 때에 비하면 훌쩍 마른 몸은 자그마한 동작에도 피로를 느꼈다.
이젠 건강에도 좀 신경을 써야겠어. 개새끼가 날뛰려고 들면 빨리 도망치기라도 해야 하니까.
침실로 돌아간 페란스는 키슬크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침대에 대자 순식간에 잠이 밀려왔다. 더 이상 페로몬을 억누를 필요가 없어진 시간이라 페란스는 간만에 마음을 놓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꿈 없이 달게 잤으면 싶었다.
혹은 꿈을 꾸더라도 조금은 덜 괴로운 장면을 보았으면 했다. 다시 눈을 뜬 뒤로 매일 밤마다 꾸는 꿈은 슬프거나 괴롭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르스티엘이 자신에게 독이 든 포도주 잔을 건네거나 아니면 등을 돌리고 서서 알레프에게 무슨 말을 속삭이거나 했다. 알레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경멸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페란스는 아무 말 없이 독을 받아 마시거나 미안하다고 중얼대는 게 다였다.
……꼭 그런 일만 있던 건 아니었는데.
좋았던 순간도 더러는 있었는데.
오늘 밤은 마르스티엘이 자신을 두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던 순간을 꿈꾸고 싶었다.
하지만 꿈은 늘 바람과는 달랐다.
오늘은 괴로운 꿈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꿈을 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 * *
“전하.”
탕탕.
“전하…….”
탕, 탕…….
무덤 속 같은 새벽이었다.
페란스는 되살아나는 시체가 된 기분으로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들어와.”
내뱉으면서도 터무니없이 작다고 느꼈던 목소리를, 키슬크가 용케도 알아듣고 문을 열었다.
“전하.”
“왜……. 무슨 일이야.”
페란스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시야가 뿌연 탓인지 키슬크가 울기 직전으로 보였다.
“로젠게인 알란드 경이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입궁을 허가하시겠습니까?”
“무슨……. ……뭐라고?”
잠이 확 달아났다.
“이 시간에? 남작 부부는? 설마 혼자 왔나?”
“아니요. 가신을 한 명 대동했나이다. 자세한 일은 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것이……,”
키슬크가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어서…… 데려와.”
“알겠나이다. 환복은 어찌할까요?”
“옷은 됐어. 옆방으로 데려와. 거기에 있겠다.”
“네, 전하.”
키슬크가 침실을 나간 뒤 페란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읏,”
서두른 탓인지 아니면 떨리는 탓인지 마른 몸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무서웠다.
무슨 짓을 해도 한 번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고,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 * *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젠게인은 넋이 나가 있었다. 그를 데려온 알레프도 비슷한 처지였다. 옷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핏물이 튀어 있었고 양손은 흙투성이였다.
“씻을 물을 대령하겠나이다, 전하.”
두 사람을 페란스의 사실로 데려온 키슬크가 말했다. 그 역시 이 상황에 당황한 터라 알현 전에 미리 옷차림새를 단속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너무 늦게 했다.
“그렇게 해.”
페란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인 페란스가 로젠게인에게 다가갔다.
“전하,”
말리는 말도 듣지 못했다. 두 팔이 스스로 움직여 로젠게인을 끌어안았다.
……툭!
몸이 닿자 그가 허물어지듯 몸을 기대 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무게감에 떠밀린 페란스가 그를 안은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하!”
키슬크가 달려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상태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만 알려 줘……. 두 사람 다, 죽었나?”
페란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페란스에게 안긴 로젠게인의 고개가 한 번 끄덕 움직였다.
“너는……. 너는 다치지 않았어?”
“…….”
“그럼 이제 울어도 돼.”
“…….”
소리 없이 입이 벌어지는 듯했다.
로젠게인이 머리를 제 목덜미에 내려놓았다. 페란스가 이를 물고 그의 등을 다독였다.
한참 후에 로젠게인이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길이 막혔다고…… 그 전날 날씨가 안 좋았다고 하는…… 근위대가 먼저 말을 타고…… 길을 살피러 갔습……니다. 마차가 뒤에 따로 남았는…… 그때…… 절벽이 무너지면서 다리가…….”
“그만.”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더는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등을 쓰다듬는 손이 아프도록 떨려 왔다. 제 손목에서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내 잘못이다. 근위대 정도로 안심할 게 아니었어.”
“…….”
소리는 없었다. 대신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들어 갔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머리를 힘주어 안았다. 그를 안은 채 자신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겁할 것 같았다.
사고가 아닐 것이다.
사고처럼 보여도 사고가 아니었다. 그런 기막힌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맹세할게. 내가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겠다.”
“…….”
“반드시 죽여 줄게. 그 누구라도.”
“…….”
시간은 몹시 느리게 흘러갔다.
젖었던 목덜미가 마르도록 서로를 안고 있던 두 사람은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느린 걸음으로 로젠게인을 욕실로 데려간 페란스는 느리게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벗겼다.
느리게 알몸이 된 로젠게인이 느리게 물속에 잠겼다. 페란스가 그의 머리에 천천히 따듯한 물을 흘려 보냈다.
모든 게 느렸지만 그건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새벽잠을 털어 낸 왕실 근위대가 빠르게 말을 달려 마차 사고가 벌어진 곳을 찾았다. 처참히 뭉개진 시체 두 구가 검은 관에 담겨 궁으로 돌아왔다.
남작 부부의 장례식은 왕족에 준하는 예우를 다해 삼 일간 치러졌다.
콜더스트라는 이름을 이제 겨우 듣게 된 귀족들도 빠짐없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왕실 예배당의 묵직한 종소리가 그칠 때까지, 페란스는 장례식에 참석한 귀족들의 얼굴을 빠짐없이 훑었다.
어떤 자가 애도했으며 어떤 자가 웃었는지 전부 잊지 않고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