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그, 아니, 그게……. 그렇다고는 해도…….”
페란스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지금 전하께서도 열여섯 나이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도 하셨으니 저희 아들도 할 수 있겠지요. 또한 그래야 하고요.”
로젠게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저러고 있으니 사기꾼 같네. 네가 왜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됐는지 알 것 같아.
“위스타드에는 아직 조혼 관례도 남아 있지요. 블루와렌에서 돌아오는 시기는 전하의 성년식으로 하고, 혼인도 같은 해에 이루었으면 합니다. 그게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건…….”
……그대의 아들에게 가혹한 처사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는 아직 어리니 벌써부터 책임을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그가 성년을 지나 스스로 원하게 됐을 때 혼인을 진행하고 싶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고, 준비도 했다.
그러나 막상 입을 딱 다물고 있는 로젠게인을 보고 있으려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이렇게 구속해도 되는 걸까.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이 자신에게 증오가 아닌 다른 감정을 품었는지, 그 점을 끝내 알지 못했다. 내내 그와 함께 있던 오메가는 알레프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신이 그의 앞날까지 제 입맛에 맞게 재단해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란스는 그를 가지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이 가짜 각인도, 피치 못할 혼인도 진짜가 되길 바랐다.
“마르스…… 크흠, 혼인에 있어서 로젠게인 알란드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혼인을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나 야비했다.
이렇게 말하면 남작 부부는 뒤늦게라도 감히 혼인을 무르자는 청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저는 기꺼이 제 이름이 언급된 일에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로젠게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남작 부부가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손을 꾹 잡았다.
“모두의 뜻이 같다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전하.”
“……그렇다면 나 역시 기꺼이, 기쁘게 혼인 의사를 받아들이겠다.”
페란스의 답에 남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을 수 있겠군요.”
하지만 부모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저희 아들에게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로젠, 너는 언제 각인을 완성할 생각이니?”
각인의 완성은 쌍방 각인을 의미했다. 페란스가 먼저 각인을 했다고 알려졌으니 로젠게인이 뒤이어 각인을 완성하는 게 당연한 일이긴 했다.
“뭐? ……아니, 그건 안 돼!”
“지금이라도 하겠습니다.”
페란스와 로젠게인의 말이 뒤엉켰다. 페란스는 당황한 나머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각인이라니!”
로젠게인은 눈 한 번 깜빡대지 않고 페란스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할 수 있습니다, 전하. 알파니까요.”
“알파건 뭐건 지금 각……! ……너는 열세 살……이라고.”
페란스는 자칫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진실을 아슬아슬하게 삼켜 냈다.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전하. 게다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각인이나 주기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건 전하셨습니다.”
“상관있어. 아주 많이.”
페란스는 이가 갈리는 것을 참았다.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네가 내게 각인하는 걸 말리느라 과거로 돌아온 거나 다름없는데.
“그렇다면 전하께도 상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하여간 너는 안 돼. 너는 너무 어려.”
“전하께서도 어리십니다.”
“개……, ……잠깐 나 좀 봐.”
하마터면 욕을 내뱉을 뻔한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둘이 나눌 얘기가 있다. 잠시만 기다려라.”
남작 부부에게 짧게 눈짓을 던진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끌고 사실을 나와 옆방으로 들어갔다.
쾅!
문을 닫고 보니 왕자비의 침실이었다.
“미쳤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벽으로 몰아붙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각인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
“전하도 각인을 하셨으니.”
“그건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지금 내게 각인하면 너는,”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말을 잘랐다.
“어째서 상관이 없습니까? 저는 전하와 혼인할 몸인데.”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각인하는 건 또 다른 일방 각인이 될 뿐이라는…… 그런 말이었어. ……하아, 젠장.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어야 하는데. 너도 알고 있잖아.”
페란스가 한숨과 당황을 섞어서 내뱉으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자 로젠게인이 그의 손을 잡아 동작을 멈추게 만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각인을 푸는 법을 안다고 하셨으니 혼인 이후에는 쌍방 각인이 되는 거잖습니까. 제가 먼저 각인을 하는 것뿐입니다.”
마르스티엘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잘 들어.”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각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게 어떤 건지, 어떤 고통을 어디까지 겪게 되는지.”
“그러니,”
“시끄러워. 닥치고 일단 들어. 그건 절대, 그딴 걸 겪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나는 그런 짓을 하겠다는 인간이 설령 아만다리스의 아들이라고 해도 말릴 것이다. 그 인간이 고작 열세 살짜리라면 말할 것도 없지. 이를 전부 뽑아서라도 각인하지 못하게 할 거야. 그게 더 자비로운 일이 될 것이다.”
“…….”
“진심이야. 이가 다 뽑혀서 매일 죽만 먹고 살 게 아니라면 각인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알아듣겠어?”
“그러니까요.”
로젠게인은 이 상황에서도 고집을 부렸다. 저 고집 센 턱을 한 대 후려쳐서라도 말을 알아듣게 만들고 싶어졌다.
“뭐가 그러니까, 인데!”
“전하께서 겪으실 고통을 저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
페란스가 숨을 울컥 토해 냈다.
정말 후려칠까. 그러면 정신을 차리려나.
“나는 못 견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네가 일방 각인을 한다고 생각하면 못 참을 거라고. 당연히 나는 너를 블루와렌으로 보낼 수도 없고, 내 모든 계획은 전부 어긋나겠지. 끝내 아만다리스의 손에서 내 왕관을 되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 네 고집 하나로 인해.”
“…….”
로젠게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말하니 효과가 있는 듯했다.
“내가 널 블루와렌 같은 먼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나? 내가 좋아서 너를 멀리 보내는 것 같아? 혼인이든 뭐든 너를 내 옆에 묶어 두고 싶은 건 나야.”
“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이제 고작 열여섯이야. 대관식도 못 치른 주제에 등신처럼 각인까지 해 버리는 바람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를 내 땅에서 안전하게 지켜 주는 일조차 할 수가 없다고. 너는 정말 이런 걸 하나도 모르고 있나? 너를 보내는 내 마음이, 내 각오가 어떤 건지?”
“…….”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어깨를 붙들고 그에게 이마를 기댔다.
“제발……. 좀 알아줘. 약혼식 날 네 손에 끼워 준 게 풀반지라는 건 내게도 몹시 비참한 일이다. 그런데 반지처럼 비싼 걸 사려면 그것도 다 섭정의 인가를 받아야 해. 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체 왜 이런 얘기까지 하게 만드는 거야.”
“……저는, 그 반지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로젠게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하셨고, 귀엽기도 했고.”
“……젠장. 벌써부터 귀엽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마.”
“각인은 그럼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양보라니. 내가 방금 네 인생을 구원해 줬는데.
페란스는 로젠게인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웃음이 나오는 대로 웃었다.
“아아……. 진짜 고맙네, 그거.”
“대신 혼인을 하게 되면 그땐 생각을 달리 해 주십시오.”
그런 말을 하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네가 열세 살이 아니라 스물여섯이었다면. 스물여섯에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나는 심장이 터져서 죽었을지도 몰라.
페란스가 한 손으로 가슴께를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너야말로 그때 가서 마음을 바꾸지 말도록.”
“약속하셨습니다.”
“너야말로.”
“네. 전하.”
“……너야말로.”
약속이야.
스물여섯이 되면 너도 나를 사랑하는 거야.
잊으면 안 돼…….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꽤 긴 시간 동안 남작 부부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체면도 잊고 걱정으로 방 안을 서성이던 남작 부부는 각인을 미루기로 했다는 말에 안도하는 듯 보였다.
몇 년씩이나 위스타드를 떠나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 로젠게인은 잠시 남작의 영지로 가야 했다.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페란스는 왕실 근위대가 남작의 여정을 호위하도록 명했다. 메넌을 남작의 영지로 보내 거기서 곧장 블루와렌으로 가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이별이었다.
생각보다 더 이별이 힘들어 페란스도 깜짝 놀랐다.
둘은 다시 한번 편지와 답장의 개수 얘기를 나눈 뒤 어렵사리 작별 인사를 고했다.
로젠게인은 일주일 후에 블루와렌행 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그 일주일이 왠지 삼 년이라는 시간보다 더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