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손님이 세 명 늘었다.
지금은 마르스티엘이 된 메넌과 콜더스트 남작가의 수석 기사, 그리고 그의 아들 알레프였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키슬크에게 약혼식 얘기를 들은 남작 부부는 약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약혼은 당연히 아들이 성년이 된 이후의 일이라 여겼다고 했다.
손님이 조금 달라진 것, 그리고 주인공들의 키가 좀 더 작다는 것 빼고는 키사드 궁에서의 약혼식과 거의 비슷했다.
대사제의 축성이 조금 더 길었다. 대신 날씨는 그때보다 더 화창했다.
키슬크가 이를 악물고 꾸민 제단도 더 아름다웠다. 페란스보다 좀 더 작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케이크가 조각상처럼 보였다.
페란스의 새 옷을 고쳐서 입은 로젠게인은 어제보다 더 커 보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하룻밤 새 더 자란 것 같았다. 키슬크가 솜씨를 부려 말끔하게 넘긴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잠깐 이곳이 키사드 궁인 것 같다는 착각이 일기도 했다.
키슬크는 현명하게도 페란스에게 옷을 줄이는 게 아니라 늘려야 해서 수선이 더 까다로웠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덕분에 페란스는 약혼식 제단 앞에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아, 잠깐 있어 봐.”
대사제가 축성을 시작하기에 앞서 페란스가 로젠게인에게 손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
오늘따라 표정이 없어 보이는 로젠게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 말고 왼손.”
“…….”
그러자 얌전히 손을 바꿔 주었다.
로젠게인의 무표정은 사실 긴장했기 때문이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네 약혼반지야. 마음에 들어?”
페란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왼손 약지에 노란색 꽃 두 개를 엮어 만든 풀반지를 밀어 넣었다.
이번에도 크기는 실패였다. 그때는 좀 작았던 기억이 나서 약간 더 크게 했더니 이제는 너무 컸다.
제 눈에는 충분히 커 보이는 손이었는데, 스물여섯 살에 비하면 작은 모양이었다.
“……이걸 만드느라 안 보이셨던 겁니까?”
로젠게인이 작게 물었다.
“응. ……아, 너무 실망하지 마. 제대로 된 반지는 나중에 끼워 줄 테니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로젠게인의 미간이 굳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자신에게는 페란스에게 끼워 줄 반지가 없어서였다.
헐렁해서 옆으로 기우는 풀반지를 잠시 바라보던 로젠게인이 페란스가 했던 것처럼 손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내 손도?”
“네.”
페란스가 로젠게인이 내민 손에 왼손을 얹었다.
로젠게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페란스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대다 제 입 속에 넣었다.
“앗…….”
손가락 끝 쪽에 짜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가 제 손가락을 살짝 깨무는 감각이었다.
……정말이지 같은 인간이 맞았군.
마르스티엘이 했을 때는 더 아팠다. 그땐 아프라고 한 짓이 맞았다.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정중하게 반지를 대신하듯 했다면 좋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저도 나중에 다시 드리겠습니다. 제대로 된 반지를.”
“……그렇게 해.”
로젠게인이 일어선 뒤 축성이 시작되었다.
다들 뭔가 좀 수줍고 간질간질하다는 생각을 하며 왕실의 약혼식답지 않은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설프고, 사랑스러웠다.
페란스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약혼식이었다.
식이 끝난 뒤 다 같이 케이크를 잘라 먹는 시간까지 전부 아름다운 오후를 잘라 그린 그림 같았다.
* * *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있었다.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사옵니다. 전하께서 각인의 위험성을 너무 가벼이 보시는 게 아닌지요.”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페란스는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된 기분으로 눈동자를 흔들었다.
“어떻게 각인 상대와 몇 년씩이나 떨어져 지낼 생각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게…….”
페란스가 힐끔 로젠게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반듯한 자세로 허리를 펴고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로젠게인은 각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부모를 안심시킬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부러 말을 끌며 계속 로젠게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남작 부부가 아만다리스와 내통할 일도 없을 텐데 과연 이들한테도 입을 다물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로젠게인이 저렇게 나오는데 자신이 나서서 각인이 가짜라고 해야 되는 건지, 그것도 확신이 없었다.
내가 거짓말까지 해서 너희들을 살려 줬다고 으스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어쩌면 남작 부부는 그런 방법까지 써서 콜더스트 가문을 도와준 이유를 의심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대의 아들은 나와 혼인하게 되어 있어,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끄응.
이래저래 고민하던 페란스는 로젠게인이 저렇게 나오는 한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안다. 당황했을 마음도 이해한다.”
남작 부부에게 아들의 각인은 된서리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성이 만들어지다 만 인간들이야 왕실과의 혼사에 영혼을 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남작 부부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열셋의 나이에 각인 상대가 생겼다. 더군다나 각인 상대는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다. 열세 살 인생은 다른 미래 없이 그대로 왕실에 저당 잡히게 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페란스의 신상에 각인으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면 로젠게인 알란드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모로서는 심경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그대의 아들을 위해 최선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페란스가 애써 헛기침을 참아 가며 말을 이었다.
“위스타드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 남작가가 겪은 일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각인과 관련한 문제는 어디서든 어떤 핑계를 들어서라도 불거져 나올 것이다. 섭정을 믿어서는 안 돼. 그는 이대로 얌전히 내 약혼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
남작 부인의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전하……,”
“당분간만이야. 내가 성년이 되는 해까지만이라도. 그리고 블루와렌에서 체류하는 일은 교육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위스타드에만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하.”
무례라는 것을 알 텐데도 남작 부인은 페란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남작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지만 부인은 오히려 남작의 손을 밀어내며 마저 말을 했다.
“그 점은 저도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저희 아들을 아끼고 걱정하신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각인을 한 당사자는 전하가 아니십니까? 상대와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게 각인이라 들었습니다. 로젠이 블루와렌에 가서 있게 되면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참입니까?”
“아……,”
그 얘기였구나.
페란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당연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걱정하는 줄 알았다. 거기서 제 몸에 대한 염려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게……,”
로젠게인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 내가 각인한 건 개새끼니까.
페란스가 다시 힐끔 로젠게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성년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주기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 실수를 덜어내고자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발정기는 성장을 마친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주기가 안정화되어 간다. 피치 못할,”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헛기침이 나왔다.
“……사정으로 미성년의 나이로 각인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오히려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멀리하는 게 더 도움이 돼. 상대의 페로몬에 빈번히 노출될수록 페로몬 종속은 심해진다.”
다행히도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 겪은 각인과 지금 겪는 각인은 확연히 달랐다. 성년이 되기 전까지 주기가 더디고 약한 것도 사실이었다. 발현은 했지만 페로몬 기관은 성장 중이고, 결국 성년이 되어서야 온전히 제 기능을 발휘했다.
발현과 각인이 호이헨 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더 버틸 만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각인을 시키고 내내 제 페로몬에 절여 둔 아만다리스가 개새끼였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성년이 되기 전에는 돌아와야겠군요.”
남작 부인이 말했고, 로젠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페란스와 남작은 볼과 귀밑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아니, 그게 꼭……. 물론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그게 꼭 각인 때문만은 아니라……, 여전히 어리기도 하고…….”
자신이 성년이 되어도 로젠게인은 여전히 열여섯이었다.
“나이는 상관이 없을 줄 압니다, 전하.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전하의 안위이지 않습니까.”
남작 부인은 단호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남작 부인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남작은 그런 부인을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열여섯이면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닙니다. 각인을 하신 건 전하라고 하나, 각인에는 상대의 페로몬 작용이 있어야 한다 들었습니다.”
베타인 남작 부부는 각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들이 각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부랴부랴 관련 지식을 얻었다. 여전히 각인은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이상형질에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일인지는 이해했다.
“그러니 책임은 저희 아들에게도 있을 겁니다. 열여섯이면 책임을 지는 게 뭔지 아는 나이가 맞습니다.”
“저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입니다.”
한 번도 페란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던 로젠게인이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